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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 이어령 산문집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평점 :
지난 2월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존경받던 이어령 선생이 별세했다. 그는 우리 현대사 한가운데서 문학·예술·철학·사상 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지성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 책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는 2010년 펴낸 이어령 선생의 산문집을 새롭게 출간했다. 종교적 표현을 빌자면 서원(誓願)산문집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어머니에 대한 여섯 가지 은유를 선생이 사유한 글이다. 이어 선생의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글들이 어어진 것으로 봐서 그렇다는 말이다.
여섯 가지 은유는 저자의 생각 속에서 거듭되며 형상화된 것들일 것이다. 「책」, 「나들이」, 「뒤주」, 「금계랍」, 「귤」, 「바다」이다. 모두 이어령 문학의 ‘우물물’이 되어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메멘토 모리’의 배경이 되는 여섯 살 소년 이어령의 고향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1부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선생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앞서 언급한 여섯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이 밖에도 이어령만의 사색적이고 섬세한 필치를 느낄 수 있는 산문들을 통해 그간 치밀하게 축조해온 이어령의 문학이 어떠한 과정으로 완성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독자들의 촘촘한 독서와 깊은 사유가 곁들여진다면 바로 독자들의 가슴속으로 쉽게 들어와 앉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글들에는 어머니부터 외갓집, 고향, 그리고 문학론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묵은 글들” 속 또렷이 남은 기억들을 향한 이어령의 진심이 담겨 있다. “나는 그동안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만났지만 내 개인의 신변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는 사적 체험이면서도 보편적인 우주를 담고 있는 이야기들, 이를테면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와 같은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그래서 ‘메멘토 모리’의 배경이 되는 내 고향 이야기를 담은 글들을 중심으로 책 한 권을 여러분 앞에 내놓게 된 것입니다.”(p.10, 「머리말」 중에서)
“늘 마음 한구석에는 사적 체험이면서도 보편적인 우주를 담”은 이야기들로 “한 권의 책을 엮었으면 하는 생각”과 ‘어머니의 귤’처럼 일부만 공개되었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의 “전문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소망을 위해 이 책을 내놓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이어령 선생의 신앙 고백에 관한 인터뷰를 담은 ‘나는 피조물이었다’를 빼고 1부에서 4부 모두 선생의 산문으로 묶었으며, ‘나는 피조물이었다’는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힌다.)
선생은 “잠들기 전 늘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셨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하얀 책의 목소리를 방문”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사 오신 가죽구두를 신고” 어머니와 외갓집 나들이를 나서며 맡았던 “레몬 파파야나 박하분 냄새”를 기억한다. “나는 글자를 알기 전에 먼저 책을 알았다. 어머니는 내가 잠들기 전 늘 머리맡에서 책을 읽고 계셨고 어느 책들은 소리 내어 읽어주시기도 했다. 특히 감기에 걸려 신열이 높아지는 그런 시간에 어머니는 소설책을 읽어주신다.”(「책」에서)
“어머니는 나의 작은 손을 잡으신다. 그리고 보리밭 사잇길과 산모롱이, 마찻길, 신작로 이렇게 작은 길에서 점점 넓어지는 길로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나들이를 한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 오신 작은 가죽구두를 신고 흙을 밟으면 이상한 소리가 난다.”(「나들이」에서) 선생에게 어머니는 “대청 한복판에 떡 버티고 앉아 집 안을 지키”는 뒤주처럼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존재였으며, “늘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기쁠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자랑”하고 “슬플 때 고통스러울 때 아직도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나의 서재에는 수천수만 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 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이 나의 어머니이다.(p.19)
“바깥 하늘이 눈부시게 개일 때일수록 대청마루는 어둡다. 그 그늘진 곳에 계목나무의 묵직한 뒤주가 있고 그 위에는 모란꽃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 같은 것이 놓여 있다. 네 기둥과 두꺼운 나무판자로 짜여진 뒤주 모양은 어머니가 안방에 앉아 계신 것처럼 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뒤주」에서) 선생은 여전히 “늦게까지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어머니께서 맛보게 하셨던 금계랍의 쓴맛을 기억하며 어머니를 추억하고, 수술을 위해 서울로 가신 어머니가 “머리맡에 놓고 보시다가 끝내 잡숫지 않으시”고 보내신 귤을 통해 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드리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기도 한다.
“귤은 어렵게 어렵게 구해서 병문안 온 손님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끝내 잡숫지 않으시고 나에게로 보내주신 것이다. 그 노란 귤과 거의 함께 어머니는 하얀 상자 속의 유골로 돌아오셨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나도 누구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그것은 먹는 열매가 아니었다. 그 둥근 과일은 사랑의 태양이었고 그리움의 달이었다.”(「귤」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그러나 늘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시는 어머니,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가깝게 계신 어머니, 기쁠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자랑하는 어머니, 슬플 때 고통스러울 때 아직도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어머니 - 그러나 언제나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딱딱한 흙의 저편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어머니 - 이 ‘현존하는 거대한 부재’ 그 바다가 바로 나에게 있어서의 어머니인 것이다.(p.38~39)
2부 〈이마를 짚는 손〉과 3부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에서는 저자의 사유가 개인에서 외부로 확대되고 있다. 2부 「오르페우스의 언어」에서는 신화로까지 확대된 저자의 사유가 비극적 음유시인화 되는 느낌을 받는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지내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 글은 상징적인 표현이 나온다. 낙타의 혹과 선인장 안의 샘이란 외부의 신기루와 대비되는 것으로 내부에 있는 신화의 도시이다. 이 신화의 도시에서 저자가 발견한 것은 세 가지 언어다. 첫째는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신과 인간을 갈라놓고 기술을 대립시킨다.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것을 양극화시키는 힘이다. 둘째의 언어는 헤르메스이다. 가장 빠르게 뛰어다닐 수 있는 구두를 신고 분열되어 있는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전령이다. 마지막 언어가 오르페우스다. 이미 오르페우스가 부는 피리 소리에는 모순도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충하는 것을 화합시켜 하나로 융합케 하는 결합의 언어라고 저자는 말한다.(p.62~63) 독자의 지식 수준이 낮은 탓인지 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글들에 쉽게 녹아들지 못하고 책장을 넘긴다.
3부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에서도 한 남자의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이어서 아버지로부터 값비싼 털모자를 선물로 받았는데 얼음이 깔린 마을의 공터에 아이들이 모여 팽이를 치고 있는 곳에 갔다. 그들의 팽이는 그들이 직접 만들었다. 산에서 나뭇가지를 잘라다 이리 깎고 저리 깎아 만들었을 팽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다 결국 맞바꾼다. 값비싼 털모자와 막 깎아만든 볼품없지만 잘 도는 팽이를. 이후 어떻게 될지는 저자의 말대로 부잣집 아이는 상속자로서 땅을 원고지와 맞바꾸고 정미소를 팔아서 음악을 연습하고... 연극배우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 겨울 한 사건(털모자와 팽이의 교환)은 부잣집 아이의 삶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된다. 이 부분에서도 저자의 어렸을 때 기억이라고 독자는 추측할 뿐 깊은 사유를 따라가지 못한다. 상징과 은유가 혼재되어 함부로 말했다 고인이 된 선생의 명예에 누가 될까 하는 우려에서다. 다만 잃어버린 꿈, 덧없이 흘러버린 세월, 언젠가 사라져버릴 삶에 대한 감성이 독자의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 문학에 관심을 두고 적잖은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 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이 밖에도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는 이어령만의 사색적이고 섬세한 필치를 느낄 수 있는 산문들로 가득하다. 특히, 4부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는 이어령의 문학이 어떠한 과정으로 완성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나의 문학은 밤이었다. 혼자 깨어 있는 밤이었다. 나의 문학은 남폿불이었고 “어서 불 끄고 자라!”는 말 끝에 묻어오는 그을음 냄새였고 어디에선가 밤새도록 새어 나오는 물소리였다.
배신자들처럼 나보다 먼저 잠드는 식구들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더러는 행복한 밤잔치이기도 했다."(「등불을 끄고 난 다음」에서)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이제는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묵은 글들” 속 또렷하게 남아 있는 향수를 전한다. 특히,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며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향한 선생의 진심이 이 책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잠이 많은 아이였다면 마지막에 등불을 끄는 아이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나는 어느 당인가 전국구 의원 후보가 되어 내 차례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거나 혹은 어느 수출회사 판매사원이 되어 노스웨스트를 타고 태평양 일부 변경선을 건너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p.212)
대학에 들어가고 비평에 눈을 뜨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여섯 살 난 아이 그대로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뒤꼍 마당을 파고 다녔다. 그 호젓한 뒤꼍 마당은 대학 강의실이 아니라 도서관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프로이트를 배우고 프로스트를 읽었다. 그들은 생의 표층이 아니라 저 땅속의 심층, 무의식을 뒤지는 갱부들이었다.(p.222)
저자 : 이어령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의 창간을 주도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일보]에 당시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새로운 ‘개성의 탄생’을 알렸다. 20대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두루 맡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으로 활약했다. [새벽]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 전작을 게재했고,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아 ‘문학의 상상력’과 ‘문화의 신바람’을 역설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았다.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지성의 오솔길』 『젊음의 탄생』 『한국인 이야기』, 문학평론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 문명론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가위바위보 문명론』 『생명이 자본이다』 등 160권이 넘는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다. 마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 쉼 없는 말과 글의 노동으로 분열과 이분법의 낡은 벽을 넘어 통합의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