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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악마 ㅣ 이삭줍기 환상문학 5
자크 카조트 지음, 최애영 옮김 / 열림원 / 2021년 11월
평점 :
『사랑에 빠진 악마』는 문예사조 분류로서는 '환상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현실주의와 환상을 섬세하게 표현한 자크 카조트의 대표작으로, '금속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복종시키는 과학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주인공 알바로가 악마와의 연애에 빠져드는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소설이다. 연금술에 의해 불려진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과정, 인간의 원칙과 열정이 그것과 투쟁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서 그려진다. 이성과 감성, 합리성과 초자연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 청년의 방황과 고통, 그리고 인내와 극복의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주인공이 어느 정도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들면서도 결코 그의 명예가 완전히 훼손되지는 않는 이야기의 모호한 흐름을 통해, 사건의 진위를 되묻는 묘한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이것은 그 시대의 기본 사유원칙이었던 ‘회의(懷疑)’에 기댄 새로운 미학이었다. 작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작품은 이성의 합리성에 회의를 던지는 ‘지적 불확실성’의 미학적 효과를 겨냥하는 환상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알린다. 환상문학의 시초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특성은 카조트가 만들어낸 악마의 이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패를 거듭하는 무기력한 희극적 존재로 그려지던 이전의 악마들과 달리, 카조트는 두려운 중세적 악마의 이미지를 복원하고 그 위에 청순하고 순종적이지만 강렬한 욕망을 품고 있는 교활한 비온데타를 탄생시킨다. 비온데타의 이중성은 초자연적인 신비를 태생의 근원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데까지 이어진다. 어머니가 심어준 도덕적, 종교적 의무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유혹에 저항하는 알바로에게, 사랑이 반드시 육체적 결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득시키는 그녀의 논리는 너무도 정연하다.
어머니를 존경하는 것은 인간의 본연에 속하지만, 사랑하는 두 마음의 결합은 육체적 결합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것도 오직 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 알바로와 사랑하기 위해 정령의 세계를 떠나 육체를 갖고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여성이 되어버린 그녀의 주장은 육체(혹은 물질)의 에너지를 근간으로 하는 당시의 유물론적이고 감각론적인 가치체계와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풍조를 흥미롭게 반영한다.
더불어 비온데타의 존재를 통해 끊임없이 발산되는 고혹적인 매력은 이제는 아득해져버린 중세적 정서를 기억에서 들춰냄으로써, 이미 탈신비화되고 회의주의가 팽배해진 의식에 혼돈을 유발하여 독자들을 기이하고 불안한 느낌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 작품의 경쾌한 어조에서 독자들은 악마의 치명적인 유혹에 대한 두려움이 불식되고 그것이 육체적 욕망을 환기시키기 위한 상상적 표현도구로 통용된 증거를 보게 된다. 카조트는 악마를 중심에 놓고 욕망에 대한 유혹과 절제의 중요성을 대립시킴으로써 그 시대의 자유연애사상에 새로운 뉘앙스를 드리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환상문학은 18~19세기 서유럽문학의 주류였다고 여겨지는 리얼리즘 문학이 일단 고갈점에 이르고, 그 이전의 환상성을 풍부히 가진 문학이 재평가되는 기운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는 모더니즘 문학 이후 기법상의 환상성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서 상징적 픽션성에 대한 관심이 깊어짐에 따라 종래의 리얼리즘문학과 구별되는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1719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난 자크 카조트는 마술적 분위기의 에피소드들로 주목받는 중세풍의 소설 『올리비에』(1763) 등을 발표했고, 1768년에는 디종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1772년에 발표한 『사랑에 빠진 악마』는 진지한 문학적 가치로 높이 평가받으며 ‘환상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형태의 탄생을 알렸다. 환상문학이란 현실을 반영하는 요소보다 가상적이고 비사실적인 요소 등으로 상상력이 강조된 문학을 이른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초자연의 세계, 즉 천상에 사는 신들이 모두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인간적인 욕망을 지닌 상태에서 자연과 인간세계에 개입했었다. 그런 점에서 고대 신화는 리얼리즘과 환상 사이의 아주 자연적인 혼합을 허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중세 시기에도 고대의 신들과 대체된 그리스도교의 신앙체계가 초자연과 자연을 하느님 아들의 부활ㆍ재림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혼합시켜 주었다. A. 단테의 『신곡(神曲)』이 그러한 경향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정신에서 싹튼 예술의 자연학화(自然學化)와 테크놀로지화 경향으로 17세기 무렵에는 초자연과 자연에 대한 뚜렷한 구분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시민사회가 탄생된 18세기에는 실리주의와 현실주의가 대두하였고 이후 두 세기를 압도하는 리얼리즘 장편 시대가 이어졌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1730년대부터 낭만주의가 대두하여 현실에 종속된 종전의 인간 존재에 대하여 픽션과 현실, 작품과 상상력, 이성인과 환상인 등 다양한 각도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또한 오성(悟性)에 대한 상상력의 우위를 내세우고 고대·ㆍ중세의 경이, 꿈ㆍ가공ㆍ희망 쪽에 인간성의 근원을 두는 문학이 제창되었다. 환상문학은 문학사적으로 구조주의자 토도로프에 의해 개념화되었다. 토도로프는 『환상문학 입문』(1970)에서 ‘드라큘라’류나 SF소설처럼 초자연적인 사건을 초자연적으로 설명하는 ‘경이문학’, 초자연적인 사건을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미스터리 문학’, 초자연적인 사건을 쓰되 그 해답을 독자에게 맡기는 ‘환상문학’으로 구분하고, 이 세 범주를 모두 광의의 환상문학이라고 정의하였다. 문학사전상에서의 환상문학은 초자연적 가공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라고 되어 있다.(출처 : 시사상식사전)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 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표현한 작품이 모두 환상문학은 아니다. 환상문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성들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환상문학의 특성으로 ‘단절과 공포감’, ‘애매성과 의혹’을 들 수 있다. 환상은 그 자체로 일상이란 현실 속에 단절을 만들어 내고 이러한 현실 세계의 느닷없는 단절은 자연스럽게 공포감을 유발시키게 된다. 공포를 유발하는 초자연적 현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현상에 대해 어떤 추측만을 할 뿐, 뚜렷한 확신에는 이르지 못한다. 환상소설의 백미로 꼽히고 있는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독자와 작중인물들은 주인공이 끔찍한 벌레로 변한 현상에 대해 애매하게 인식하고 의혹 속에서 결말을 맞음으로써 환상효과의 극치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환상소설로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서구 환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을 비롯하여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 리처드 바쿠의 『환상』,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미카엘 엔데의 『거울 속의 거울』, 도리스 레싱의 『생존자를 위한 비망록』, 스티븐 킹의 『다른 계절』, 매리 셀러의 『프랑켄슈타인』 등이 있다. 또한 영화화 면서 다시 유명해진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21세기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 역시 환상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사랑에 빠진 악마』는 출판사 열림원의 '이삭줍기'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됐다. 이미 환상문학의 시대로 접어든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환상문학의 고전과 걸작들 중 아직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을 소개한 것이다. 이 시리즈 기획위원 김석희는 "우리가 이미 깨닫고 있다시피, 21세기는 인류 역사상 또 하나의 대전환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직선적 역사 발전을 신봉해온 근대주의는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과학주의 같은 지배 담론들도 그 권위를 의심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면에 그동안 전근대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폄훼되어 문화의 비주류로 밀려났던 환상과 직관 같은 사유와 감성 체계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디지털 시대의 코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하여 발굴, 소개합니다.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의미한 텍스트들은 늘 새롭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고 출간 소감을 대신하고 있다.
“오! 비온데타, 난 사랑으로 충만해 있고 당신이 전혀 환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당신에 대한 나의 반항적인 소행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게 되었소. 하지만 당신은 나의 걱정이 근거 있는 것이었는지 그 진위를 알고 있어요. 포르티치 동굴 속에서 나의 시선을 괴롭혔던 그 기이한 환영의 신비를 내게 상세하게 설명해줘요. 당신이 도착하기 전에 나타났던 그 끔찍한 괴물과 그 작은 강아지는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되었죠? 어떻게,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그 존재들을 대신하게 되었소? 그들은 누구였던가요? 당신은 누구인가요?”(p.78)
“저는 나리께서 완전히 악마로부터 벗어나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리의 적이 후퇴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나리를 유혹했습니다.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는 나리를 타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나리의 의지와 가책이 나리에게 비범한 은총의 도움을 받을 기회를 온전히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악마가 주장하는 자신의 승리와 나리의 패배는 나리께도 그에게도 한낱 착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회개를 통하여 그것을 말끔히 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p.144)
저자 : 자크 카조트(JACQUES CAZOTTE)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자크 카조트는 1719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났다. 해군 행정관으로 일하던 그는 시골에서 집필에 몰두하여 마술적 분위기로 주목받는 중세풍의 소설 『올리비에』(1763) 등을 발표했고, 1768년에는 디종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그는 신비주의자 클로드 드 생마르탱의 제자들과 교류했는데, 발랄하고 명랑한 그가 몽상이나 신비주의적 환각에 빠져드는 것에 사람들은 적잖이 놀라곤 했다. 왕당파였던 그는, 혁명의 공포가 휩쓸던 1792년 9월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익살스럽고 교훈적인 작품들』(1776)이라는 전집으로 출판되었다. 『사랑에 빠진 악마』는 1845년, 낭만주의 작가 네르발의 감수성을 통해, 당시 성행하던 환상문학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된다.
역자 : 최애영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LE VOYEUR A L’ECOUTE』가 있으며, 『문학 텍스트의 정신분석』(공역) 『아프리카인』 『칼 같은 글쓰기』 『꿈』 『충격과 교감』 『엿보는 자』 『환상문학 서설』을 우리말로,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를 프랑스어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