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의 월중 행사표 옵빠야! 5
엘튼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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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원래 기능은 언어로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안정케 하는 데 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억눌린 감정이나 욕구를 분출시켜 내버리고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시로, 소설로, 또 다른 문학적 장르로 나나타는 것은 표현의 영역이다. 문학은 언어(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文, 글)학이고, literature(letter)이다. 옛날에는 글(문자)은 귀족, 양반(조선시대) 등 지배층이 사용하고 일반인(농부, 어부, 상인, 천민, 노예)이 사용할 수 없었다. 글을 알면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깨우치게 되고 피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배우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문자다. 언어는 남 따라 하면서 배울 수 있지만 글은 별도로 배워야 소통하는 본래 목적에 다가갈 수 있다. 한자(漢字)는 한나라 때 발명된 문자지만 그 이전부터 갑골문자 등 상형문자가 발전돼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에서 수천 년 전부터 발명돼 사용돼 왔다.

공자가 살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에 글자는 지배층 권력층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때는 남성 위주의 시대다. 여성은 사회 생활(당시에는 관직에 등용되는 것)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공자는 인간의 삶의 원칙을 제시한 학문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평생 학문으로 정치를 해야 하고, 인(仁)으로써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사상은 지금도 유효해서 널리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그때도 사람의 감정은 같지만 표현은 피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달랐다. 화가 나서 분노를 말로 표시할 때 사용하는 것이 욕, 욕설이다. 주로 사람 몸의 일부분이나 동물을 일컫는 것이 많다. 특히 문자로 표현할 때는 여성을 비하는 표현이 많이 들어간다. 노비, 간음 등의 문자 표현엔 모두 계집 여(女)가 사용되는 이유다. 여성은 차별이 아니라 비하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시인들은 표현의 자유가 있다. 어떤 글, 문자를 사용하더라도 협박, 허위 등의 표현이 아니라면 법적 제재를 받지 아니한다. 비웃는 표현도 폭넓게 허용되고 있다. 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표현이라면 허위가 아닐 경우 신랄한 비판도 허용된다. 그만큼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신장된 탓이다. 민주주의 국가이어서 그렇다. 이를 바탕으로 풍자시, 해학적인 시에서의 거친 표현, 성 비하 표현 등이 허용된다. 다만 비하적 표현이 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으면 윤리적 제재를 받을 뿐이다. 정치적 풍자를 하는 시에서 자주 보여지는 비유적 표현들이 허용되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말과 글의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다고 호평을 받기도 한다.그러나 사회 현상을 해학적으로 하는 표현에 있어서는 스스로 윤리적 잣대를 시인 자신에게 들이대는 것 같다. 이는 시인에게 윤리적으로 부적절하고 도덕적 결함이 있다는 비판을 독자들로 받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으로 독자는 생각한다. 그 생각의 틀은 쉽사리 깨지지 않는 틀이다. 시인 스스로 도덕적 결함을 드러내는 순간 시인으로서의 대접 받기를 포기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관념 또한 깨기 어려운 틀이다. 시인은 말을 조탁해서 가꾸고 아름다운 말로 만드는 사람이라는 인식 말이다.

이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난 시를 보는 독자들은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풍자와 해학도 점잖은(?) 표현을 써야 한다는 게 시인, 독자 모두의 생각이다. 그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은 독자이지 시인이 아니다. 독자가 허용하면 시인들은 거친 표현이나 비하 표현을 쓰는 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도 대부분 글을 아는 사람이고 세상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다른 표현도 있는데 굳이 시인이 거칠고 비속어를 남발하는 시를 쓴 데 대해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공동 사회를 살 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굳이 거친 언어와 비속어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 『카사노바의 월중 행사표』를 읽으면서 독자의 생각이 착잡하다. 시집에 비속어나 거친 표현이 많아서가 아니다. 시인이 그런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욕망에 사로잡히고, 성 문화가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왜 시인은 거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표제어가 된 시 「카사노바의 월중 행사표」에서 시인은 30일 한 달 동안 30명(하루 쉬니까 29명)의 각기 다른 여성들과 만날 계획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헤서 화자(話者)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여성들을 농락하고 거기에 여성들은 장단을 맞출 것으로 화자는 생각한다. 화자가 그렇게 생각하기까지는 그 여성들의 속성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거침없는 표현들이 줄을 잇는다.

'날밤 까기' '취한 척 개기고 자고 와야지' '원나잇' '끌어안고 비벼대야지' '모텔' '못 해본 체위 다 해봐야징' 헤어지기 위해 '불치병이라고 속이기' '차에서 모모' 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차박' '키스만 가지고 되겠나' 떡실신 시켜야지' '밤 봉사 활동' '홧김에 서방질' '복상사' 등의 말이 난무한다. 우리 사회가 이런 일들이 예사처럼 번져 있다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건 아닐까. 옛날 풍속 우화집 『고금소총』이 생각난다.

 


 

이후 수십 편의 시들은 좀 더 구체적인 남녀의 관계에 대해 노골적인 표현으로 일관한다. 주제가 꼭 성(性)이 아니더라도 성적 결합을 연상케 하는 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알고 보면 비유적 표현임이 확실한 것들도 많다. 다음은 퇴근 후 독수공방하며 TV를 보는 남자에 대한 시다.

 

이 남자가 사는 법

 

나는 현재 마누라가 7명이다

그리고 가정부가 한 명 있다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가종부 지니에게 말한다

지니야 티비 틀어줘!

 

그리고 티비 드라마에서 열심히 열연하고 있는

첫 번재 마누라에게 말한다

여보 당신 연기 너무 잘한다

역시 내 마누라야!

 

(중략)

 

드디어 쌍둥이 아빠가 되다...

저의는 오늘부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동안 저를 흠모해주셨던 여성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고

그녀와 동침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 쌍둥이를 낳고 말았습니다.

 

(하략)

 


 

시인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 「봄바람」을 동화처럼 썼다. 앞의 수십 편의 시와 다르게 맑고 여린 마음을 봄바람을 표현한다. 이 시는 시인의 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궁금하다. 강하고 저돌적인 표현들로 위험 수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던 표현의 기세가 다름을 느끼는 것은 독자 한 사람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봄바람이 분다

내 가슴에

 

님의 향기가 난다

봄바람 속에서

 

바람에 실려 오는

님의 소리가 들린다

 

님은 벌써 가고 없다

여름을 만나러

 

내 마음만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전문, 全文)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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