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호텔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2
마리 르도네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림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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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Hotel Splendid'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인 『장엄호텔』은 폐허를 연상케하는 주변 분위기 때문에 더 썰렁하다. Splendid는 '훌륭한' '아주 좋은'이란 뜻으로 풀어보면 역설적 표현인가 싶다. 부서지거나 고장나도 수리하지 않아 호텔 곳곳이 허술하고 투숙객도 인근 공사장 노동자들의 숙소로 장기 투숙지로 일부 사용될 뿐 거의 폐업 직전의 바닷가 허름한 여관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상태다. 더욱이 늪지대에 세워진 호텔이라 감염병까지 돌아 인적마저 끈길 위험에 처해 있다.

이 소설은 작가 마리 르도네가 '여성의 상속적인 불행'을 주제로 쓴 3부작 중 첫 작품이다. 출판사 열림원의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시리즈 두 번째 책이기도 하다. 마리 르도네는 「작가의 말」을 통해 “백지 위에 첫 번째 중요한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시체’였다. 그것은 앞으로 내 글쓰기가 생산될 디딤돌이 될 단어였다”라고 썼다. 마리 르도네의 소설은 희망이라고는 없는 종말의 세계를 그리며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허무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세기말적 모습으로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다.




『장엄호텔』은 얼굴도 이름도 없는 소설의 화자(話者)인 ‘나’가 인적이 끊긴 늪지대에서 할머니의 마지막 유산 ‘장엄호텔’을 지키며 분투하는 이야기다. 호텔을 세운 할머니가 죽고 호텔을 상속 받은 나는 장엄호텔의 주인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언니들을 데리고 불쑥 떠났고, 장엄호텔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어머니가 죽고 들이닥친 언니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호텔이 “제 안방인 양 산다.” 나는 “무엇보다도 장엄을 먼저 생각하며 호텔 운영에 힘쓰지만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늪은 모든 걸 썩게 만드는 습기를 내뿜고 남루한 호텔은 그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곳곳에 곰팡이가 핀다. 온갖 해충이 들끓으며 쥐 떼는 병을 옮겨 호텔에 방문하는 모두를 앓거나 죽게 만든다. 지옥의 모습이 이럴까. 중세 흑사병이 유럽을 덮칠 때 이랬을까. 세기말적 풍경을 연상케 한다.





항상 배경 속에 희미하게 서 있던 어머니와 지팡이를 짚고 아주 꼿꼿이 서 있던 할머니도 죽었다. 결코 완쾌된 적이 없이 늘 병들어 있던 아다와 오지 않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배우의 꿈에 매달리던 아델도 마침내 죽었다. 폭우가 물러진 땅을 헤치고 시신을 쓸어간 덕에 할머니와 언니들은 늪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종기가 돋고 굽은 몸으로 호텔을 조금씩 정리해간다. 이렇듯 “산 사람은 계속 사는 거다.” 어려서 호텔을 떠난 언니들도 결국은 장엄에 돌아와 죽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불행의 세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닳고 닳을지언정 끊어지지 않는 그 선명한 생의 의지 위로 장엄한(?) 네온사인이 비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썩은 늪, “장엄은 밤낮으로 열려 있다.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다.” 장엄호텔이 곧 지옥이다.




이 소설은 이재룡 문학평론가에 의해 처음 국내에 소개됐으며 새로 출간된 이번 개정판에는 이재룡 교수의 「묵시론 다음에는?」이란 제목의 해설이 실렸다. 해설에서 이재룡 교수는 "이미 시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마리 르도네는 1986년 『장엄호텔』로 평단의 눈길을 끌었고 연이어 발표한 3부작이 완성되자 그녀는 프랑스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앞선 세대인 뒤라스, 에르노의 작품세계와 비교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중략) 『장엄호텔』이 출간된 지 35년이 지난 요즘, 늪에 빠져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주변 사람들이 시름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우두망찰 지켜보는 화자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고 적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기를 잃어가는 세상 모습과 장엄호텔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호텔 주변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죽음과 세기말적 풍경을 본다.



이재룡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곁들여 본 이 소설은 자질구레한 불행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지옥의 모습이다. 자잘한 불행의 연속이 지옥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작가는 오물을 토해내듯이 대화와 감정이 배제된 서술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죽음마저 무심히 이야기하는 둔중하고 서늘한 문장은 끝없이 이어지는 암울한 세계를 그린다.

겨울엔 얼어붙고 여름엔 벌레가 들끓어 계절이 바뀌어도 삶은 털끝만치도 달라지지 않는 장엄호텔이 바로 지옥, 그것이다. 썩은 늪의 악취 나는 호텔은 거역할 수 없는 불행의 무게로 소설의 객(客)들을 모조리 압도한다. 붕괴되고 침수되고 오염되고…… 마리 르도네의 세계에서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불행은” 말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인 '나'는 묵묵히 삶을 살아낸다. 고통에 둔감하다기보다 차라리 고통이 생의 충동을 유지하는 연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평론가의 해설에 고개가 절로 주억거린다. 아다와 아델은 더러운 늪과 친절하지도 말끔하지도 않은 불청객들의 행패에 죽음에 가까워가지만 나는 병든 몸으로 두 언니와 호텔을 건사하기 위해 애쓴다.

"유령 같은 두 언니”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와 다르지 않다.” 좌절되고 흔들리고 서로 증오하는 동시에 보살펴주는, “나의 동반자이자 훼방꾼인 나.” “언니들이 내 고생의 근원이”지만 나는 “그들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어쨌든 언니들은 장엄에서 태어났”지만 “그건 그들 탓이 아니다.” 매우 평범한 의식의 소유자인 나.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장엄호텔은 '생명' 그 자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제아무리 세계가 우리의 삶을 부서뜨리고 무너뜨려도 우리는 무른 땅 위에 단단하게 서 있다. 꼴이 어떻든 지탱하고 있고 그게 중요한 거란 생각이 든다. 장엄은 선수가 반쯤 썩어 눈 위에 좌초된 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좌초되었으니 완전히 가라앉을 염려는 없다는 평가에도 설득력이 있다. 작품 분위기가 제대로 흡수된 평가로 보인다.

“장엄은 잘 버틴다.” “날씨가 춥고 손님이 없더라도 장엄호텔은 계속해서 밤을 밝혀야 한다.” “중요한 건 현재뿐.” 더럽고 치욕적이고 비참해도 살아만 있으면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죽음, 그건 삶보다 나쁘다”는 아델의 말처럼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는 우선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리막길에 있어도 매일 밤 장엄호텔에 네온사인을 켜고 손님을 기다린다.




저자 : 마리 르도네

194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르틴느 로스피탈리에(MARTINE L'HOSPITALIER). 문학을 전공한 그는 1970년대 말부터 글쓰기를 시작했고, 1985년 일본 하이쿠에 영감을 받은 시 「사망자주식회사」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1986년 소설 『장엄호텔』을 미뉴이 출판사에 투고해 출간했고, 이듬해 어머니 성을 따른 마리 르도네라는 필명으로 두 권의 소설 『영원의 계곡』 『로즈 멜리 로즈』를 출간해 삼부작으로 완결했다. 이밖에 장편소설 『이제 더 이상은』 『콜트 45 권총을 든 여인』, 단편집 『대역인물』 『실시』, 희곡집 『티르와 리르』 『모비-딕』 등이 있다.

역자 : 이재룡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다. 지은 책으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 1, 2, 3』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장 필리프 투생의 『욕조』 『사진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앙투안 콩파뇽의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벵갈의 밤』, 마리 르도네의 『장엄호텔』,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 르 클레지오의 『오니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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