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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행복
김미원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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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불안한 행복』은 여류 문인 김미원 수필집이다. 요즘 흔히 쓰이는 '에세이'라는 문학 장르 이름이 아닌 '수필'이라 고집한 데서 독자에게는 일말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제목에 '불안'이란 단어가 들어가서가 아니라 저자가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로 불리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독자는 저자와 일면식이 없다. 그(독자는 3인칭 대명사로 '그'와 '그녀'를 구분하지 않고 '그'로 통칭한다)의 작품마저 이번이 처음이다. 책 표지 안쪽에 사진이 있지만 그의 외모가 버지니아 울프를 닮았는지는 분별되지 않는다. 사진이 정면도 아니고 옆면에다 크기가 작고 모자까지 써서 독자처럼 사람 식별 못하는 사람은 분간해낼 재주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란 애칭은 임헌영 선생이 붙여준 별명이란다. 왜 버지니아 울프란 애칭을 붙여줬을까.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이라면 아마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와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가 외모보다는 문학적 향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버지니아 울프란 별명을 갖고 있는데 독자는 전후 명동 신사란 별명으로 불리던 시인 고 박인환 선생이 생각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그의 시 「목마와 숙녀」에서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독자로서는 가장 먼저 외운 시였기에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터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중략)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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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1)는 영국의 소설가 겸 비평가이다. 두산백과를 인용해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여기에 적는다.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이자 《영국 인명사전》의 편자인 L.스티븐의 딸이다. 빅토리아조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 속에서 주로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세인트 에이브스의 별장에서 보낸 어릴 때의 여름철 경험이 그녀와 바다를 밀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 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부모가 죽은 후, 런던의 블룸즈버리로 이사하여 남동생 에이드리언을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출신의 학자 ·문인 ·비평가들이 그녀의 집에 모여 ‘블룸즈버리그룹’이라고 하는 지적(知的) 집단을 만들어 그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부터는 《타임스》지(紙) 등에 문예비평을 썼으며, 1912년 정치평론가인 L.S.울프와 결혼하였다.1915년 첫 작품 《출항》을, 1919년에는 《밤과 낮》을 발표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서식스 주 로드멜 근처 별장으로 이사하여 전원생활을 하였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1941년 3월 28일 우즈강(江)에서 투신 자살을 하였다.
우리 여류 문인의 서평에 다른 시인의 시와 다른 나라 작가의 생애까지 등장시켜 죄스러운 마음이지만 용서를 빈다. 저자의 문학이 박인환 시의 분위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비슷한 심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인용했다.
저자의 전작 수필집이 두 권 더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접하고 나서 알게 됐다. 『즐거운 고통』, 『달콤한 슬픔』과 이번 작품까지 합치면 세 권이다. 저자가 2005년에 등단했으니 15년 동안 세 편밖에 못 썼다고 스스로 과작(寡作)이라고 한다지만 쓴 책의 권수는 문제될 것이 아닐 것이다. 독자는 이 세 권의 제목이 의식적인지 역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고통이 즐거울 리 없고, 슬픔이 달콤할 리 없듯이 행복도 불안할 리 없을 터인데 저자는 초지일관 아이러니한 제목을 고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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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누리면서도 이따금 찾아오는 불안을 걱정해 본 사람이라면 『불안한 행복』이라는 제목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행복』은 ‘내 행복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저자가 삶과 죽음, 불안과 행복, 만남과 헤어짐 등을 한 발짝 떨어진 시선으로 그려낸 에세이다.
김미원 작가는 2005년 등단 이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즐거운 고통』, 『달콤한 슬픔』 그리고 『불안한 행복』까지 총 세 편의 책을 냈다. 세월을 담아, 글에 내몰리듯, 몸으로 치열하게 써 내려간 불안한 행복의 기록은 철학, 인문학, 예술 사이를 오가며 깊이 있는 성찰을 담아낸다고 평자와 편집자가 한 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저자의 말에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인생의 기미에 대해 쓰고 싶었다. 가는 것, 지는 것, 쓸쓸한 것, 약한 것, 남루한 것, 적막한 것과 사라져가는 숙명을 지닌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따뜻한 글을 쓰고 싶었다. (…) 가끔, 나는 글쓰기의 궁지에 몰려 있는가 묻는다. 그러나 나는 글 없이도 잘 살았고, 행복했다. 글보다 삶이 소중하다. 그래도 아주 가끔, 글에 내몰리듯, 몸으로 치열하게 글을 쓰고 싶다." - 머리말 「생의 기미에 대해」 중에서
그의 글은 언뜻 위태로운 듯 보이면서도 그만이 가진 단단함을 내보인다. 얼핏 읽으면 어려운 생활을 하다 삶을 비관적으로 생각한다거나 오히려 슬픔을 즐긴다거나 하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독자에게는 저자의 문학을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어려움과 힘듦을 그대로 문자로, 글로 옮기며 내포된 뜻의 정반대적인 수식어를 붙이면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활약했던 시인 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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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많은 단어들이 난분분하지만 특히 슬픔이나 최악의 상황, 죽음, 죽을 운명, 침묵, 허공, 백발, 레퀴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어들이 저자의 문학적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그가 쓰는 어휘의 절반은 무거움과 중압감을 주지만 저자는 매우 가볍게 다룬다. 저자의 어휘 능력이 감정을 축약시키는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가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을 표현할 때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슬퍼 몇날며칠을 문을 걸어잠그고 통곡했다"는 표현을 저자는 단 한 단어로 해결하고 있다. '참척의 슬픔'이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많아도 끝내 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 생전에 박완서 선생 강의 자리에 간 적이 있는데, 대문장가인 선생이 고작 100여 명 대중 앞에서 어눌할 정도로 말을 잘하지 못했다. 사이사이 말이 끊어지면 선생은 얼굴에 주름을 가득 만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진심이 와 닿았다. 글에 대한 열정과 아들 잃은 참척의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p. 153) 「말을 잘하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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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저자는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 서울의 중산층 작가라고 버지니아 울프라고 별명 지은 임헌영 선생마저 역설적 표현으로 별명을 지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의 글을 통해 저자의 생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살림을 해온 작가는 아들과 딸의 방, 침실과 남편의 서재 사이에서 오랫동안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해 글을 쓸 때마다 컴퓨터가 있는 방을 전전했다. 살아가며 언제나 자기 자신을 뒷전으로 미루어야 했던 그의 모습은 누군가의 어머니, 누이, 친구 또는 ‘나’라는 여성을 대변한다. 그를 두고 “런던 중산층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서울의 중산층 여류 수필가 김미원은 여성의 글쓰기라는 자기만의 방의 동거인일 수 있다”고 평한 임헌영 선생의 말처럼, 김미원 작가는 작고 초라한 것을 외면하지 않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글쓰기’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가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로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작가는 모름지기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가. (…) 유산을 물려받을 숙모도 없으니 경제적인 수준은 물론, 글의 수준도 버지니아 울프와 비교할 수 없지만 나만의 고요한 방이 있으니 그녀와 동거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P. 134) 「자기만의 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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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적절하게 표현한 한 평론가의 평으로 독자의 공감을 더한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불안한 행복』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 무딘 칼날 같은 글을 꺼낸다. 그의 시선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약한 것, 화려한 것이 아니라 남루한 것, 활기찬 것이 아니라 적막한 것을 향해 있다. 그리하여 김미원의 에세이는 쓸쓸하고 담백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것은 모든 생명에 대한 따스함이다. 사라져가는 숙명을 지닌, 선천적 불안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위로이자 찬사의 글이기도 하다. 오늘의 행복을 마냥 기뻐하며 즐기지 못하는 사람. 행복에 젖은 순간에도 그 뒤에 찾아올 내리막길을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사람. 그런 우리에게 『불안한 행복』은 찰나마다 빛나는 위로와 공감을 안겨준다.
저자 : 김미원
1959년 12월 엄마가 김장 배추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평생 야인으로 사신 이상주의자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엄마 사이에서 때론 흔들리고 균형감각을 체득했다. 다섯 시간도 앉아서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를 좋아하고 문인들의 발자취를 찾는 여행을 좋아한다. 세월과 세상에 마모되는 자신을 견디기 위해 2005년 수필가로 등단해 수필집 『즐거운 고통』, 『달콤한 슬픔』을 냈다. 『즐거운 고통』으로 남촌문학상과 조경희수필문학상 신인상을 받았고, 『달콤한 슬픔』이 세종우수도서에 선정되었으며 서정주문학상을 받았다. 월간 『한국산문』 발행인과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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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