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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들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월
평점 :
2021년 1월 대한민국은 지난해 몰아친 트로트 열풍에 휩싸여 있다. 처음 몰아칠 당시 '광풍'에는 못 미치지만 아직도 열기는 이어가고 있다. 공교롭게도 트로트 열풍은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왔다. 갑자기... 팬데믹은 우리를 잠재우려 했지만 대한민국은 트로트로 밤을 샐 정도로 대단한 인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는 팬데믹 종식보다 점치기 어려울 정도다. 한 방송국의 '트로트 경연대회'는 전 국민적 인기를 얻었고, 타 방송국도 이에 질세라 가담해 작년 12월 초엔 을씨년스러운 찬바람 속에 캐롤송 대신 트로트가 '코로나 시름'을 덜어주려 더 큰 목소리로 "대한민국엔 트로트가 24시간 방송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도대체 왜 트로트가 이 같은 열풍을 몰고 왔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도 내놓지 못한다. 트로트 원로가수는 물론 트로트나 유행가 평론가들마저도 원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은 없다. 그 질문은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트로트 가사나 곡조에 '갑자기' 우리 정서에 잘 맞아서일 리도 없고, 트로트를 재해석해 새로운 트로트 풍의 노래가 쏟아져 나온 것도 아닌데...
독자는 트로트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학교 다닐 때 교문 밖 단골 주점 등에서 목청 높여 불렀던 트로트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그때는 이른바 '젓가락 장단'이라고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드럼'을 대신 하기도 했다. 독자는 7080세대여서 복고적 의미에서 무척 환영했지만 그때처럼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러대진 못한다. 나이 탓이기도 하지만 팬데믹으로 그럴 자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 부르던 트로트는 역시 당시의 시대적 향수와 아울러 트로트가 방영되는 방송을 한참이나 듣곤 한다.
이 책 『유행가들』은 말 그대로 유행가에 대한 저자 김형수의 자전적 에세이다. 트로트 역사를 기술하거나 트로트에 관해서만 쓴 글은 아니다. 그러나 트로트를 집중 조명한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우리 트로트의 역사를 굳이 따진다면 약 100년이다. 독자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1921년 〈희망가〉로부터 시작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독자가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많이 들어 알고 있다. 당시의 라디오를 통해 심심찮게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미 문화예술교육사로 활동하는 유차영 씨가 트로트의 흐름과 궤적을 엮어 노래별로 작사·작곡·가수·시대·사람·상황·사연을 해설한 『트로트 열풍-남인수에서 임영웅까지』라는 책을 작년 10월 펴낸 바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트로트는 노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사연과 가수들에 관한 뒷이야기는 하나같이 흥미롭다. 사연을 모르고 들었을 때와 알고 들었을 때의 차이를 통해 느껴지는 감성이 다르다. 작가가 읊조리듯 풀어내는 센티멘털한 감상도 함께 어우러져 풍미가 담겨 있다. 재미있는 일화는 그 시절의 아련한 향수까지 떠오르게 한다. 특히 우리나라 대표 트로트 100곡을 해설해 놓아 독자는 추억의 과거와 열정으로 되살아난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 곡들이 '국민애창곡'이라고 명명해 통속적인 음률과 가사가 전해주는 깊이와 울림이 남다른 우리에게 트로트의 역사를 한눈에 짚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 『유행가들』은 모두 5개의 부로 나뉘어져 시대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꽤 긴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유행가들에 대한 짧은 노트’에서는 우리나라가 트로트의 나라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며 그 당시 불렀던 노래들을 일별한다. 그렇게 “유행가에 얽힌 추억담을 늘어놓다 보면 다들 시간의 마술에 속고” 만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저자는 특히 “옛날이 오늘이 되고 노래 속의 풍경들이 갑자기 나의 것으로 돌변”한다고 말문을 연다.
1부 ‘유행가 지대’는 유행가가 어떤 지대에 있는지 어떤 위치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짧은 글이다. “본능적으로 고향에 가고 싶거나 헤어진 연인이 견딜 수 없이 떠오르거나 마음의 상처가 덧나기만 할 때”처럼 (시로도 감당하지 못할) 노골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날것’의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2부 ‘어릴 때는 어린 노래가 있었다’부터는 본격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풀어놓으며,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70년대까지를 회고한다. 해방과 분단 상황까지는 〈황성옛터〉 〈눈깔 먼 노다지〉 〈노들강변〉 〈목포의 눈물〉 〈감격시대〉 등을 소환하고, 그 후 시대를 풍미했던 신중현과 이미자, 그리고 김추자를 추억해낸다. 독자도 〈황성옛터〉를 잘 알고 있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하던 노래라고 풍문으로 전해들은 바 있다. 또 〈목포의 눈물〉은 독자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로 가사가 떠올라 옛 생각이 떠올라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숱한 기라성 같은 가수 중에 나의 귀에 가장 많이 닿은 목소리는 단연 이미자이다.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는, 그 이름 석 자로 이미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어버린 가수다.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아마 한국에서 1960~1970년대를 살았던 사람 모두에게 거의 완벽하게 전파된 낭설이 아닐까 하는데, 우리는 어렸을 때 이미자에 대해 두 개의 소문을 듣고 자랐다. 하나는 전쟁통에 고아처럼 버려져 울다 못해 그만 목청이 터져버렸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의 목을 연구하기 위해 죽으면 시신을 미국으로 가져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독자도 들은 바 있다. 미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3부 ‘20세기의 청년들이 부르던 노래’에서는 1970~1980년대 청년문화를 다룬다. 통기타와 청바지와 맥주로 대표되는 세대 감성. 그때 한국의 거리는 반항적 낭만주의로 가득 찼고 취미 생활자와 재능기부자 같은 모습의 뮤지션들 덕에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젊음의 연대감을 함께 누렸다. 독자는 60년대의 가요계 소식은 모르지만 분위기는 저자 말대로 열심히 사는 부모님들을 모습에서 유추해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이미 ‘대중의 아마추어화’ 현상이 발아되었다는 점이다. 포크송 가수들이 보여주는, 대단한 악단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는 문화야말로 듣는 자를 ‘절대적 수용자’로만 존재할 뿐 창조의 주체로 나설 수 없게 하던 이전 세대의 풍속을 일거에 전복하는 것이었다.
송창식과 양희은 김민기 등으로 대표되는 시기에는 광주에서 잊히지 않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에도, 그 이후에도 그날을 기리며 노래는 불리었다. 4부의 무대는 광주다. 저자는 1980년 5월 스물두 살 광주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때를 회상한다. “5.18 때 광주 시위현장에서 가장 많이 애창된 가요는 양희은이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였다고 말한다 당시 대학생들은 이를 〈투사의 노래〉로 개사했지만 시민들의 태반은 따라 하지 못해서 불가피하게도 호출된 노래가 〈전남도민의 노래〉라고 덧붙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라도 사람을 통째로 역도(폭도) 취급을 하는 동안 민간인 공동체에서는 관제 향토 가요가 애국가가 되었던 것 같다. 분위기나 당시 사회 현상, 이후 5.18 조사 등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저자의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있으며 오히려 글로 옮기기 힘들 정도의 잔혹한 장면들을 이미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뒤늦게 봤기 때문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소소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진솔한 고백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가수 김광석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담담하게 회상하기도 하고, 1990년대적인 것들과 불화했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한다. 노래에 대해서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노래의 생명력은 노래 자체에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르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롯이 저장되어 있다는 듯이.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불러온 저자는 노래에 대한 애정을 담아 『유행가들』을 썼으리라. 오늘의 트로트 열풍이 결코 갑자기 빛을 본 게 아니라 우리들 가슴속에 내재된 것이 일시에 폭발한 것처럼. 저자 덕분에 독자 역시 트로트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지나간 가수들이 한층 그리워진다.
이 책은 내가 음악을 잘 알아서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라디오, 전축, 녹음기 따위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인간의 마을에서 떠다니는 숱한 소리들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음악의 전부였다. 하지만 내 삶은 시대의 오지에서 한참 뒤떨어진 풍속사의 현장을 절묘하게 놓치지 않고 통과해왔다. 주막집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온통 유랑극단의 노래들 속에서 보냈으며, 학교에 들어가서는 집 뒤에 극장이 생기는 바람에 그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래를 날마다 피하지 못하고, 또 나중에는 뮤직박스의 디제이를 했던 형에게 포크송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리고 5·18을 겪은 이후 민중가요사가 그려가는 궤적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 이름 없는 가객들에게 받았던 감동의 기억들은 내 영혼의 세포에 스며들어 오늘도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 : 김형수
1959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5년 『민중시 2』에 시로, 1996년 『문학동네』에 소설로 등단했으며, 1988년 『녹두꽃』을 창간하면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정열적인 작품활동과 치열한 논쟁을 통한 새로운 담론 생산은 그를 1980년대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시인이자 논객으로 불리게 했다. 시집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가난한 성자들 1, 2』,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흩어진 중심』 외 다수와 『문익환 평전』 『소태산 평전』, 고은 시인과의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 그리고 작가수업 시리즈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