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김현화 옮김 / 마시멜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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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학이 왜 추리소설에 강한가. 독자는 늘 그것이 의문이었다. 지금도 의문이긴 마찬가지다. 그동안 일본의 추리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좀 불편한' 진실을 또 마주 대했다는 느낌을 이 소설 『폭염』에서도 지울 수 없다. 불편하다는 것은 일본의 추리소설이 막장 드라마처럼 배경이나 시대성의 성역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일본 독서계는 굉장한 인기 속에 추리소설의 몸집도 불리고, 작가들의 내공도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해 한국의 추리소설은 아직 일본의 저력에 조금 못 미친다고 독자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민족성 때문일까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

우리는 잔인한 행위나 범죄를 싫어하는 반면 일본은 그것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킬 정도로 즐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독자의 이 같은 의문엔 시원하게 답변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추리소설은 일본 것이 가장 재밌다'고 고정관념까지 생길 정도니까 독자만의 잘못된 판단일까. 그렇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문단에서 추리소설을 너무 도외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버릴 수 없다.

이 소설 『작열』의 작가 아키요시 리카코는 스스로의 작품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 미스터리가 한국식 막장을 만났을 때'. 썩 유쾌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그렇게 표현한 작가의 자유니까 말꼬리를 붙잡을 이유는 없다. 다만 한국의 드라마가 '막장 드라마'로 표현되는 부분이 한국의 일부 드라마를 본 느낌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일본의 추리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과 몰입에 따른 쾌감도 있지만 스토리의 다양성에도 푹 빠져들곤 한다.

이 소설도 독자에게는 사망한 남편의 복수를 위해 가해자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된다는 설정에서부터 오는 '잔인한 복수'가 예상됐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에 단정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독자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만은 좋지 않은 이 습관이 발동되는 것 같다.

도입부 발단은 굉장히 평온한 일상의 가정의 부부가 등장한다. 여주인공 사키코는 야간 고등학교에서 만난 다다토키와 결혼 후 수년 동안 행복한 부부생활을 해온다. 그러던 어느날 경찰로부터 비보를 듣는다. 출근한 남편 다다토키가 근교 아파트에서 추락사했다는 것. 도저히 믿을 수 없던 사키코는 남편의 시신을 보고서야 남편이 죽었음을 납득한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의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어지는 경찰의 말은 더욱 사키코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남편이 사기로 사람들의 돈을 취득했으며 남편의 사고 현장에 사기 피해자로 보이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복수를 위해 사랑을 위장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독자로서는 처음이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설정과 비슷하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복수를 계획한 사키코가 과연 어떤 일이 생길지 사뭇 궁금하기도 하다.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는 과정은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작가 아키요시 리카코가 진부함을 그냥 놔둘 리 없다. 독자는 그 정도의 인내심을갖고 있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특히...


텔레비전 장식장에 놓인 액자에서 턱시도를 차려입은 다다토키가 미소 짓고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는 대신에 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다다토키의 옆에는 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내가 있었다. 우리 둘 다 무척이나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앞으로 지킬게. 이 세상에 서로 의지할 사람은 우리 둘뿐이니까.”

그는 나에게 이렇게 프러포즈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그는 쭉 나를 지켜주었다. 내가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도록 부지런히 일해 돈을 벌어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해주었다. 세상에 단 둘뿐이라는 말은 로맨틱한 비유도 과장도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실제로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만 내 옆에 있으면 돼. 사키코.”

다다토키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사키코. 그게 내 본명이었다.(p. 53)




복수를 위해 아내가 되었지만 일단 아내가 된 이상 사키코는 '아내'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부족함이 없이 충실하다. 그리고 히데오 역시 그녀에게 지극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의 성실함과 높은 직업정신을 눈 앞에서 지속적으로 보는 그녀의 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그녀의 내면 심리의 묘사가 사실 이 소설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닌가 싶다. 복수의 대상임을 숨길 수 없어 방심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증오, 때때로 밀려오는 전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차오르는 눈물, 원치 않는 히데오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 조금씩 흔들리는

마음. 이야기가 조금씩 정말 막장처럼 가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커져만 간다.




소설 『작열』은 앞서 언급한 대로 남편 다다토키를 잃고 살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성형수술로 얼굴을 고친 후, 살인자에게 접근해 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가는 사키코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상대를 남편으로 맞이해 전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려는 그녀의 집념은 대단하다. 매일 죽도록 싫은 사람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극심한 고통과 분노 속에서도 사키코는 인내하며 진실을 밝히고, 전 남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증거를 계속 찾아나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키코는 작열하듯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자신의 삶을 불태워도 좋다고 각오한 것이다. 소설 제목이 여기서 나온 듯하다. 배경도 여름이고...




여름은 저물지 않은 채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 끝없이 이어진다. 타는 듯한 날씨와 꺼지지 않는 복수심은 이렇게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고 형상화된다. ‘작열’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더 와 닿는다. 또한 작가가 선사하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 역시 탁월한 문학적 미스터리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독자는 읽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생생한 긴장감과 예측할 수 없는 반전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독자들은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사키코의 심정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하면서 점차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결말에 숨죽이게 될 것이다. 엄청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과연 사키코의 복수는 성공할 것인가? 운명의 신은 그녀에게 어떤 답을 선사할 것인가?




『작열』은 독자의 취향이 작가와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캐릭터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드라마성이 좋았던 작품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작열하는 태양처럼 부글부글 타오르는 한 여성의 비극적 복수. 눈 내리고 찬바람에 몸을 움츠리는 초겨울 추위를 잊게 만들 정도로 독자들을 달궈주기에 충분하다.


저자 : 아키요시 리카코


일본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원에서 영화·TV 제작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눈의 꽃」으로 제3회 ‘Yahoo! JAPAN 문학상’을 수상, 2009년 수상작을 포함한 단편집 『눈의 꽃』이 출간됐다. 첫 번째 장편 『암흑소녀』는 한 여고생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여섯 동급생 이야기를 다룬 구성과 충격적인 결말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2015년에 출간된 세 번째 장편 『성모』는 ‘반전이 어마어마하다’, ‘오랜만에 나온 최고의 미스터리 작품’, ‘반드시 두 번 읽을 수밖에 없다’ 등등 독자들의 찬사를 받으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외 작품으로 『자살예정일』 『침묵』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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