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이한칸 지음 / 델피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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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외로움. 그것은 이후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좌절의 구렁텅이로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삶을 끝낼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졌다.

사람은 모두 외로움을 느낀다. 혼자보다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위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현생 인류 탄생부터 지속돼 온 습관이 유전자로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함께 살지 못하는 경우 그 외로움은 다시 살아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외로움을 두려움이나 괴로움보다 더 싫어하는 것 같다. 두려움이나 괴로움은 일시적이지만 외로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까.

외로움은 외부적 요인일까, 내부적 요인일까. 이 소설은 외로움의 극한 상태가 한 사람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살피기에 적합한 느낌이다. 어릴 때 환경이 성장 후까지 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면 어떤 삶이 될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소설은 어릴 적 기억이 모티브가 된 '자전적 소설'의 경향을 보인다. 매우 척박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부터 집안에서 일어나는 입에 담기 어려운 폭력도 모티브에 작용했다. 그 폭력에 대응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소극적이고 회피성 태도, 그러나 그 속에서의 할머니와의 추억 등이 복잡하게 얽히며 주인공의 삶을 지배하고 관여한다. 독자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 없이 어릴 때 행복한 추억을 되새기는 '우'를 범하지만 그 역시 감정의 자연스러운 것이니 탓할 게 못된다. 흰 눈 내리는 저녁 어스름. 사위가 어둠으로 덮이기 시작할 때의 고요함. 소리는 없지만 굴뚝을 통해 나오는 연기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의 기억으로 마냥 행복한 시간이 남아 있는 독자로서는 저자가 내민 소설 배경에서의 느낌이 다르다.



눈이 많이 오는 고향에서 자란 주인공은 심장귀신을 보고 산신령을 믿으며 할머니와 기묘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정월 대보름이면 쥐불놀이대회를 여는 풍습이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열 살의 어린 나이에 가장 멀리 쥐불을 날리며 우승을 하지만, 집에서는 살육과 같은 폭력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인공은 자신이 살기 위해, 어머니와 다름없는 할머니의 사고를 모른 척하고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뜨거운 피가 흐르지만, 단지 살아만 있는 상태‘로 죄책감을 스무 살까지 오래도 끌고 오게 된다. 주인공이 죄책감을 없애기 위한 선택들은, 마음을 짓누르고 자신을 괴물로 만드는 선택들이었다. 결국, 감정을 숨겨가며 억지로 나를 소모시키며 살아가고 깊은 우울감에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되지만 할머니와의 추억이 주인공을 살리게 된다. 흰 두부, 은방울꽃, 은반지, 목화솜 눈, 여린 쑥, 잣 세 알, 한지 석장, 은혜 갚은 까마귀, 되돌아온 고양이, 현충원의 설국 등의 희망적인 단서가 제시되고, 쇄빙선이 만들어낸 일직선을 따라가며 불행하지 않은 미래를 암시한다. 눈에 대한 그리움을 창호지와 장독과 같은 따스한 한국적인 정서로 담아냈다는 것이 평단의 설명이다.



처음 소설 배경에 주목하던 독자들은 이상한 존재를 보는 어린아이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할머니덕분에 이상한 존재를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조금 더 읽으면 해맑게 쥐불놀이를 하고, 그러다가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해 다친다. 이게 무슨 내용인가 하고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을 따라 읽어가면 조금씩 느낌이 달라진다. 할머니와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만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개입되고서부터는 분위기가 변한다. 암울하고 증오심 가득한 주인공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저자의 말은 섬찟하기까지 하다.

"순간의 충동정인 감정으로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은 이름 없이 나 또는 막내입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모든 분이 주인공에게 투영되어 고개 숙이지 말고 땅을 보지 말고 당당하게 걷기를 바랍니다."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도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던 저자에게는 "지긋지긋한 빚을 갚고, 언니를 지켜내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 외에는 중요한 일이 없었다. 나는 영원히 진짜 내가 될 수 없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삶이라기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내 감정을 속이는 삶. 그 삶 속에 어울릴 수 없는 내가 되어 있었다"며 소설의 내용을 대신해 고백한다.



이른바 ‘국딩(초딩) 세대‘는 그 당시만의 추억과 감성이 있다. 쥐불놀이를 하며 환영의 불꽃을 보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어린 자신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과거 속에서의 나 자신을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쥐불놀이, 상인들의 잔치였던 운동회, 수박 서리, 개울가 빨래, 간첩신고, 뒷동산 눈썰매장, 얼굴만 아는 동네 사람이 아이들의 밥을 넉넉한 인심으로 챙겨주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고, 훨씬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이 좋았다고, 그리워하며 산다.

소설 속 주인공도 국민학교 세대를 보냈다. 80년대 생들에게,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공감될 만한 이야기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정착하게 된 주인공은 여러 사건으로 두 번의 극단적인 선택을 마주한다. 자살시도자 10명 중 8명은 충동적인 자살을 시도하며 14세기 무렵에야 인간이 중심이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개인에 대한 다방면의 분석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역사와 함께한 오래된 분석과 예방책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사회에서 10대 청소년 자살, 처지비관, 빈곤자살, 더 세부적인 명명이 늘어가기만 할 뿐, 자살률이 해마다 증가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책을 읽다보면 아름다운 추억만 되새기고 소설이 전개되기를 바랐던 독자의 기대를 저자는 정면으로 외면한다. 자매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감내하기 힘든 생활이 이어진다. '흰 눈'에 대한 서정적 생각이나 극복 과정의 현명함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끝내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발단이 돼 삶의 위기를 잘 극복해내는 자매에게 감동의 마음도 생긴다.

이때 독자로서는 주인공 자매가 기특하다는 생각도 했고, 감정이입해 '나는 이런 상황이었다면 과연 이 자매들처럼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비교도 해본다. 그리고 누구 못지 않게 힘든 삶을 잘 버티고 대응해 최소한 보통 사람들처럼 살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평탄한 내 삶을 감사하게 생각한 삶에 대한 옹졸하고도 안이한 의지를 혼자서 꾸짖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의 삶의 태도가 독자에게 오히려 교훈이 된 셈이다. 앞으로라도 평온한 삶에 대한 감사도 해야겠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늘 자신을 성찰하는 태도로 임해야겠다는 반성도 했다. 주인공 자매가 할머니나 큰아버지의 존재로 그나마 좋은 삶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큰아버지, 그런 할머니가 되겠다는 위인전을 읽고 난 다음 같은 감동도 있다. 어려운 환경의 극복한 어린 아이들의 삶의 성공을 보는 듯해서. 그것은 저자의 의도된 구성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이 소설가로서의 당연한 일이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저자를 폄훼하려 하는 말이 아니지만 소설이기 때문이다. 구성이 허술하면 극적 포인트가 없고 일대기를 나열한 밋밋한 글이 되기 십상이니까. 그러나 아무튼 자전적 성장 소설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벽돌 같은 모양을 한 심장귀신이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일기. 호두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명확한 두 명. 두 명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 부분을 아버지가 펼치더니 불같이 화를 내며 찢어냈다.(p. 29)


나는 그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떤 누군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만 아니고자 하는 사람으로 자랐다.(p. 144)


확실히 내 발끝까지 뜨거운 피를 보내며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이 심장이 정말 나를 위해 뛰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런 나를 위해서도 뛰고 싶은 것일까. 내 의지를 싣지 않은 뜨거운 혈액이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p. 297)


저자 : 이한칸


책과 글을 늘 가까이 두고자 했고 독립서점-슈뢰딩거에서 우겨서 얻어낸 본부장 직함으로 덕업일치의 삶을 꿈꿔왔습니다. 허름한 공장 한구석, 독서실 한 칸, 고시원 한 평, 내 꿈이 담기지 않은 사무실, 교실의 비좁은 책상과 그 모든 한 칸 남짓한 공간에서 우주만큼 큰 꿈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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