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성의 정치학 - No.1, 2007 부커진 R 시리즈 1
그린비 + '연구공간 수유+너머' 기획 / 그린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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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좀 의아했다. 왜 소수자들인지, 그들의 단편단편적인 저항들을 통해서 말하자는 게 뭔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단편 단편같아 보이는 이야기들 속에 일관된 논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저런 책들에서 떠돌던 단어들, 예를 들면 "타자화, 영토, 권력, 탈주, 소수성, 푸코, 들뢰즈'들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를 조금 알게된 것이다.

포스트 맑시즘 이후에, 알튀세와 라깡과 푸코와 들뢰즈로 이어지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사회과학계의 새 화두가 됐을 때 쯤, 나의 사회과학적 이론의 탐색도 끝났었다. 도무지 맥락이 잡히지 않는 어려운 철학 이론들과 그것들이 나의 현실에 대한 어떤 행동적 지침도 주지 못한다는 생각들은, 그것들로부터 나를 아주 쉽게 멀어지게 했다.

이후 그 이론들을 붙잡고 있었던 사람들의 사고가 어디까지 밀려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가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글을 접할 때마다 등장하는 '타자'니, '탈주'니, '권력' 이란 단어는, '그래, 푸코 이론에 이런 용어가 있었지.', '책에서 보긴 했었지.'라는 생각 이상의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새로운 사회변혁 이론의 밑그림을 그려내지 못하기 때문에, 소수자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이려니 짐작했었다. 하지만 이 책의 필자들은 바로 현존 체제를 거부하고 탈주하는 소수자들의 연대야말로 이 시대의 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힘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은 무엇인가? 주목할 점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생산수단, 즉 땅에서 분리된 존재, 인클로저를 통해 농촌에서 땅과 분리되어 도시와 농촌을 떠도는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원형이다. ...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부르주아 질서 자체로부터 떠나버릴 조건이 되기도 한다.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영토에 자신이 볼 수 없고, 예상할 수도 없고,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존재가 돌아다닌다는 사실처럼 권력에게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이들이 원하는 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통제 대책을 세울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다. 체제에 어떤 공격을 할지 알 수 없는 존재. 이동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 <이주 노동자의 이동> 조원광 p147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은 '이동성'에서 나온다. 주어진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이동할 능력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틑 뭔가 동일한 성격을 공유하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주어지는 성격에서 '벗어남'을 공유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프롤레타이라트는 동질성보다는 오히려 이질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주 노동자의 이동> p148

왜 계급이라는 말 대신, 노동자라는 말 대신 소수자라는 말을 하게 된 건지, 그 하나의 맥락을 읽어내게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이 권력이 정해준 자리를 벗어나 '이동'-이것이 탈주의 진정한 의미인 듯- 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생산해낼 때, 그리고 그 '이동'들이 연대하여 '이동'할 때, 새로운 역사도 새로운 민중도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읽어낸 부분이 여기까지고, 아직도 세부적인 이해까지는 좀더 정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이제야 푸코와 들뢰즈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권력과 욕망의 탈주가 무엇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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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5 1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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