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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인생을 씹어 주세요.
이만큼, 이만큼, 아그작 아그작 투명한 얼음을 씹는 듯이.
나는 너무 좋았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집.
난 에쿠니의 다른 소설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도 좋아했는데
이 책은 더 좋다.
섬세하게 인생을 씹는 것.
키우던 개가 죽어서 눈물을 흘리던 나와 하룻동안 데이트를 하고, 그동안 즐거웠노라며
"듀크"처럼 키스를 하고 떠나간 남자.
죽은 듀크가 주인이 너무 상심하기에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찾아와 위로를 건네고, 행복했노라 말하고 간 것이다.
애인과 벚꽃 흩날리는 밤길을 걷다가, 뱀, 돼지, 조개이던 시절의 연인을 만나 다시 사랑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난 이 이야기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뭔가 근원적인 그리움. 나와 지금 마주치는 생물들에 대해 나의 전생인듯, 그들과 사랑하였던 것 아닐까 상상력을 펼치는 것은 무척 작가답고, 천진난만한 생각이며, 아름답기도 하다.
아이들이 매실을 던지며 놀던 곳에 부모들이 찾아와 놀고 있는 모습은, 피식 웃음이 나온다. 별 것 아닌듯한 이야기이지만, 어른인 우리의 모습을 보며 웃게 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우정을 나누고 찾아가고, 그러나 그 할머니는 소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끝내는... 어린 소년이 죽음을 앞둔 할머니와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친할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여 찡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노인이 일상적으로 밥을 먹고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 오지만, 결국은 혼자였다는 이야기. 그는 자꾸 기억이 깜빡깜빡 한다고 하며 소설이 시작 된다. 실은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아내가 죽은 것조차 잊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백발의 노인이 아직도 아내가 곁에 있는듯 대화를 하며 밥을 먹고 산책을 다녀오고, 그런 노인을 며느리는 안타깝게 바라본다. 늘 먹어오던 그 밥상도 할미(죽은 할머니)의 솜씨가 아니라 며느리의 솜씨였다. 노인은 저녁에도 같은 밥상을 차려 달라 부탁한다. 그는 끝끝내 할미를 놓치 못하고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이 찡하고 아련하던지. 평생을 함께한 사랑...
물론 이야기 전반에 걸친 기이함을 괴담이라 볼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괴담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발을 걸친,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물, 소설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원래 요괴도 많고 그에 관련된 설화 같은 것도 많아서 문학적 토양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견 부럽기도 하다.
예를 들면 전 세계 유명 감독들이 스승으로 생각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도 그러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하나를 보더라도 거기에 등장하는 요괴들, 성게처럼 생겼던 숯 검댕이나 머리만 있고 늘 셋이 몰려 다니던 것. 모두 일본에 전해져 내려오던 캐릭터들이고, 하야오는 그것을 만화 영화에 사용했고, 우리는 신기해서 남다른 상상력으로 보았다. ㅋㅋ
에쿠니의 이 책도 일견 일본의 그런 성향을 띤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요괴집도 괴담집도 아니다. 괴담은 좀 더 기괴하고 으스스하고 공포를 자아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얼음을 씹는 듯 투명하고 시리고 아프고, 그립다. 면면히 살펴보면 우리의 이야기 아닌 것이 없다. 단순한 사랑 놀음, 거기에 기인한 상처 따위나 써내린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소설에도 에쿠니 특유의 삶을 포착하는 한 줄들이 들어 있어 가치를 더하지만.
인생의 이쪽부터 저쪽까지, 삶과 죽음까지 넘나드는 작가의 단편집 앞에 어떻게 감동하지 않고, 함께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난 에쿠니 소설들 중 이 책이 가장 작가다운 상상력을 지닌 것으로 보아 좋다. (맨드라미&버드나무 보다 더 좋음)
향수를 사용하다 보면 말이다.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내 게는 별로인 향수가 있다.
그것은 향수의 잘못일 때보다, 내가 아직 그 향수를 사용할 나이가 아닐 때가 더 많다.
20대에 좋은 향수가 있고, 서른이 되어서야 그 향의 맛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책, "차가운 밤에"는 읽을 줄 아는 사람만이 그 맛을 느끼고 감동 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마음에 안드는 단편이 한 두 개 정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