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평점 :

도시를 걷는 것만으로도 책이 된다.
여행책이 아니다.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책이다.
책의 띠지에 있는 말의 느낌이 모두에게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도시의 기쁨과 위험을 만끽했던 여성들을 따라 걷는 여행"
어떤 사람은 '여행'에 방점을 찍으며
여성 예술가들의 시선이 도시의 어디쯤에 머물렀을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내 눈을 잡아끌고 생각에 머물게 한 것은 '기쁨과 위험을 만끽했던' 이다.
이제나 저제나,
여성들이 길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아, 물론.
밝은 낮에 여러 명이, 치안이 확실한 곳을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만큼
필요한 업무를 보거나, 잠깐의 산책을 즐긴 다음
해가 떨어지거나 인적이 드물어지기 전에 각자의 집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길거리를 걷는다'라고 표현한다면 예사로운 일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알 것이다.
시골이든 도시든 한적한 길거리를,
아무런 목적이나 생각없이 발 가는대로 혼자서 거닌다는 것은
'위험!' 이란 불을 켜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나의 짐작일 뿐이지만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런 과민한 반응에 씁쓸하거나
세상은 위험한 곳이니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지지를 보낼 수도 있겠다.)

이 책은 도시를 거닐었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 로런 엘킨은 뉴욕 태생으로 2004년에 파리로 이주해 살고 있는
책, 예술, 문화, 여행에 관해 쓰는 작가이자 비평가다.
그는 길을 걸으며 사유하던 '사람'들 속에서 '여성'의 존재가 빠져있음에
일종의 충격을 받는다.
영문학 전공자인 저자가,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느낀 감정과 탐험심, 열정 등을
플라뇌르(산보자,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 이라는 프랑스어) 라는 단어 속에
녹여내려다 발견한 사실.
같은 단어라도 여성형과 남성형 (혹은 단어마다 여성/남성으로 나누는)
프랑스어의 특성과 규칙에 따라 '플라뇌르'의 여성형인 '플라뇌즈'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바꾼 저자는 사전에 설명된 '플라뇌즈'는 전혀 다른 뜻임을 알게 된다.
19105년의 사전에는 '산보하는 사람'으로 'flaneur, -euse'가 등재되어 있지만
<생생한 프랑스어 사전>에 따르면 플라뇌즈는 '안락의자의 일종'이라고 한다.
산책과 산보라는 뜻의 능동적인 플라뇌르를 여성형 플라뇌즈로 바꾸면
가만히 앉거나 누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물건이 되어 버린다.
산책으로 사유하고 철학의 깊이를 만드는 남자들과
거리에 나와 정처없이 돌아다니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여자들.
평판과 정숙함, 안전이라는 가치를 내려놓아야만 여자들은
자유롭게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안전은 담보되지 않고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도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늦게까지 돌아다녀서-/그런 골목에 들어가다니- 로
스스로 위험에 노출시킨 분별없는 사람이 될 뿐이다.

함께 하여도 그 성과를 나눠갖지 못하고,
도로의 이름이나 공공장소의 명칭도 신화 속 인물, 왕족 여성, 여자 성인(saint)에서
민주적 영웅, 지성인, 과학자, 혁명가로 근대적이며 평등하게 바뀌어가는 동안,
문화 자본을 지니지 못했던 여성들이나 다른 인종이 소외되는 일들에 대해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혹은 생각할 이유도 없이 자연스러워서-
그렇게 묻혀져 왔던 사각지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작가의 말은
별 생각없이 걸었던 도시의 공간이 얼마나 계급/성별/자본/나이/정치/출신으로
세밀하게 구별되어 있었는지 깨닫게 했다.
당장 내가 자주 가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을 머리 속으로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공간을 주로 차지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생각해보자.
아무도 '금지'하지 않지만 무서울 정도로 놀랍게 사람들의 공간은 나뉘어있다.
분리까지는 아닐지언정, 어색함이나 친숙함을 느끼는 공간이 확실히 있다.


처음에는 여성학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남성의 시선, 제도의 억압, 불안의 이유로 거리를 맨 몸으로 걷지 못하는 여성과
그로인해 예술, 문화, 철학,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면에서 지워진 여성예술가에 대해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점점 책을 읽으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두드러지지 않고, 눈에 띄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두 발과 아무런 보호막이 없는 맨 몸으로도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권력이며
(사유지가 아닌) 허락된 공간이라면 어디든 탐색하고 모험하며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안전 뿐만 아니라 할 일에 대한 초조함으로부터 해방되어)
길을 거닐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도로와 길은 다르다.
신호체계가 없고, 속도제한이 없으며,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 길을 자기의 속도와 경험으로 활보하는 일이 성별/장애/나이/계층에 따라
한계지어지지 않길 바란다.
길 위에서 드러나는 존재로 인해
비로소, 있었으나 차지하지 못했던 각자의 모습이
시대와 세상에 등장하고, 인식되며, 함께 하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