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단상
-- ‘전향’의 현상이 보여주는 진보적 지식인의 이면

그 ‘진보주의자’의 학연, 혈연에 대한 동류의 한국인 유학생에게마저도 과도하게 보이는 집착은, 필자로 하여금 레닌이즘과 학벌주의, 혈연주의가 과연 한 사람의 머리와 마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진보주의’의 대열에 합류했으면서도 본인이 ‘최고의 학부’, 그리고 ‘주류 집안’의 출신이라는 의식을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이 ‘민중의 혁명’을 부르짖으면서도, 본인들이 ‘최고의 학부’를 나온 만큼 당연히 그 민중들을 지도, 계몽해야 한다는 당당한 선민의식을 갖는다. 그 ‘최고의 학부’를 ‘최고’로 만든 것이 바로 민중들을 억압,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이 특별히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계급적 ‘구별 짓기’의 장인 입학시험에서 본인들이 성공했다는 ‘사건’이 그들의 의식과 행동을 계속 지배한다. 한국 진보주의자들의 놀라울 만큼 공고한 학벌 의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학벌의식과 ‘진보’ 행동의 관계에 관한 역사적인 연혁이 어떻게 되는가?

진보평론  제15호 - 박노자(오슬로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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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긴딘Sam Gindin (캐나다 자동차일반노조 CAW 전 활동가) 


매그나 협약이 있었다. 이것은 최대 규모의 부품 회사에서의 조직화를 위한 시도였다. 그런데 그 대가로 '영원히' 파업을 포기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3년, 6년이 아니라 영원히 안하겠다는 거였다. 게다가 현장위원도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매그나협약 Magna Contract : 매그나는 세계 최대 다국적 자동차 부품회사. 캐나다에도 10여개의 공장이 있음. 2008년 CAW는 매그나를 조직했고, 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이 협약이 CAW 사상 최악의 양보교섭이었다. CAW지도부(하그로브, 전직 위원장 화이트 등)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조직을 확대하는 목표를 우선시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이 협약을 변호했으나, 캐나다 노동운동계에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 하그로브 위원장이 퇴진하고 현 위원장(Ken Rewenza)이 선출된 이유의 하나가 됨.)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좌파의 문제점은 그들이 작업장의 조직과 연계가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대응해야만 하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으면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에만 매달리게 된다. 

노조는 싸우지 않으면 관료화된다. 싸우기 위해서는 조합원들을 교육하고 상황을 설명해야 하고 토론하고 동원하고 집회를 조직해야 한다. 그래야 노조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 매우 위험하다. 

자동차에도 실업자가 더 많지만 이들을 동원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이 모이고 토론하고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철강노조는 모든 폐쇄된 공장의 현장위원, 조합원들과 함께 싸운다. 이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전략을 짜고 모든 다른 이슈들, 예컨대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중동 사태, 환경 문제 등도 함께 논의하고 토론한다. 인상적인 일이다. 

아직도 전투적인 파업이 계속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파업을 하면 어떻게 되나? 이 파업에서 지면 어떻게 되나? 그 전망이 없으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파업이란 그것을 거치면서 더 강해진다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파업에서 감동을 받지 못한다. 파업을 통해 대중을 동원해야 하는데, 거꾸로 고립되고 있다. (공공노조의 청소부 파업을 가리킴) 

그 동안 신자유주의 시기에 노동운동은 패배의 연속에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결집하고 있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공세가 아니다. 알다시피, 더 길게, 더 많이 일함으로써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럴수록 행동할 시간이 없고, 집단적이 아니라 개인적이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에 적응하기를 배운 것이다. 집단적 대응능력을 잃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앞으로 10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긴 시간 일을 할 수 없는 싱글맘, 빈민들, 실직자 등등, 그러나 자연발생적으로 해결책이 나올 수는 없다. 그래서 조직이 필요하다. 조직하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다.  

회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설비, 공장 자체를 다르게 운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전국적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체제를 구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조는 노동력을 관리한다. 내가 보기에 신자유주의가 노조를 바꾸어버렸다. 신자유주의에 대응해서 그것을 바꾸어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바꾸어 버렸다. 이제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경쟁력을 말한다. 어쩌잔 말인가?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NGO들이 그렇듯, 사회운동도 국가의 기능을 대행하고 있다. 더 싼 값으로, 국가가 NGO에 보조금을 주고, 아니면 프로젝트를 발주해준다. 돈도 따라온다. 돈이 없어지면, 사람을 쓸 수 없다. 이것이 정말 노동조합이 직면한 근본적 도전이다. 전반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임영일소장이 샘긴딘(캐나다 자동차일반노조 CAW 전 활동가)와 한 대담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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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공포와 두려움, 이것이 바로 가난이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강제된 가난'의 본질적 모습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자발적 가난은 절감하지 못한다. 
-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에 대한 한겨레 고명섭기자의 서평중 -

*** 
이제 진보를 이야기하려면 가난해야한다는, 즉 자발적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머릿속에 머물고있었다.
그러다가 뒷통수를 맞은것만 같았다.
진짜 가난속에 있는 이들을 잊지 말아라,
결핍의 공포와 두려움속에 있을 누군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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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기 전에 공화주의자가 되는 기본적인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공화주의자가 아니면서 시인이 된다는 것은 ㄱ, ㄴ, ㄷ을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자유의 과녁이 되지 않으면서 자유를 읊는 것은 위선이거나 사기였다."

네루다의 글이었던가.

시를 잊고 산 지 참 오래다. 재작년 겨울 목 디스크가 왔다. 빨리 수술을 하라는 의사들의 말을 뒤로 하고, 내설악 만해 마을로 내딴엔 긴 여행을 떠났다. 3개월 동안 처박혀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온통 세상이 하얀 눈밭이었다. 인적이 드문 먼 산까지 올라가 얼음을 깨고 계곡물을 받아 마시곤 했다.

그리운 것들이 많았다. 그 기간 동안 밀린 숙제로 네루다 평전을 쓰기 시작했다. 거의 연애하는 심정이었다. 그가 내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고 느낀 때부터 미친 듯이 쓰기 시작했다. 바깥일들을 잊기 위해 썼다고 해도 될 것이다. 보름동안 1000매가 써졌다.

서울로 내려와 마지막 교정을 봐서 출판사로 넘기려고 했다. 그 사이 잠깐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만났다. 3년여 잠깐씩 연대하며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들이 싸움 1000일을 곧 맞는다고 했다. 안타까웠다. 그들의 1000일은 이 사회 89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의 1000일이었다. 월 급여는 법정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1850원, 3개월, 6개월짜리 노예계약, 상여금 0%의 파견직 노동자들이 1000일이 가까워 오도록 노숙농성을 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기륭전자 여성비정규직의 1000일은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움과 자성의 1000일이어야 했다.

잠깐 돕겠다고 들어간 일이 1년여 지속되었다. 두 번의 고공농성, 94일에 이르는 집단단식, 미국 원정투쟁, 마지막 망루 투쟁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나 역시 두 번 국회의사당 내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점거를 들어가야 하기도 했다. 과정에 두 번 유치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기륭전자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에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꾸리기도 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 역시 당시 500여일을 빈 공장에서 맞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양계장의 닭처럼 일하며 그들은 세계 기타 시장 점유율 1/3에 이르는 기타를 낳았다. 빼빠질로 지문이 없어지고, 거개가 유기용제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30여년 동안 이들과 기타와 노래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삶을 착취해 박영호 회장은 물경 1000억 대의 자산가가 되었지만,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박영호 회장은 더 값싼 노예를 찾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영혼이 없는 기타, 착취받는 기타로는 노래할 수 없다고, 우리는 동료 예술인들과 사회에 호소했다.

정말이지 올해 초에는 다시 도망가고 싶었다. 네루다 평전도 정리해서 내고,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다시 책을 읽고, 쓰고 싶었다. 차분하게 삶과 사회에 대해 돌이켜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읽는 일보다 나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자성하며 그리운 것들을 소중하게 갈무리하고, 다시 조금은 더 외롭고 싶었다.

하지만 이 개떡 같은 사회는,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내게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1월 20일,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람들을 죽였다. 용산에서 였다. 이 평지에서는 갈 곳이 없어 저 하늘에 답답한 망루를 지어 오른 사람들이었다. 제발 우리의 절박하고 참혹한 얘기를 들어달라고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공권력 진압이었다. 어차피 쓰레기 같은 인생들이니 죽여도 괜찮다는 허가였다. 12시간만에 유족들을 따돌리고 강제 부검이 이루어졌다. 호들갑은 금세 잠잠해질 거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있는 사회다보니 누구도 타인의 죽음에 대해 크게 애통해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용산 참사 현장을 쫓아다닌 지 오늘로 140일째, 결국 네루다 평전은 지금도 고이 컴퓨터 한 폴더에서 한가롭게 잠자고 있다. 난 한 번도 그를 깨워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 네루다도 한때는 시를 버리고 참사의 현장을 쫓아 다녔다. <스무개의 사랑노래와 하나의 이별노래>라는 연애시집으로 유명했던 네루다가 세계적인 민중시인이 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겪으면서부터다.

나는 잠시 멈추고 현대 문학에서는 금지되었지만 인류의 염원에 깊이 뿌리내리고 인본주의로 향한 길을 찾기로 했다. 시가 핍박받고 소외된 다수를 향해 힘과 다정함과 기쁨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시는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노래하지는 못할 거다.

당시 스페인은 오늘 세계의 모습과 어쩌면 닮아 있다. 스페인은 세계의 미래와 과거가 맞붙은 힘의 대결장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이후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한 착취로 만회하려는 자들과 좀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간의 대리전이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즉각 왕당파인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중립이라는 얼빠진 자리에 가 서있었다.

왕정과 세속화된 교회와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공화파들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무려 100만 명이 이 내전으로 죽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소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가, 어부가, 목수가, 대장장이가, 그들의 아내들이 죽어갔다. 그러고도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조국을 등져야 했다.

당시 네루다는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칠레영사였다. 그의 스페인 친구들은 열렬한 공화파들이었다. 파쇼에 맞선 투쟁에서 그가 '스페인의 가슴'이라고 칭했던 로르까도 죽고, '스페인의 얼굴'이라 했던 염소지기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도 총을 잡고 죽어 갔다. 참을 수 없었던 네루다는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옹호한다>라는 잡지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랭스턴 휴즈와 영국의 W.H.오든, 아일랜드의 예이츠, 훗날 모두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와 스웨덴의 셀마 라게를뢰프, 사무엘 바케트 등이 함께 했다.

공화파에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 세계의 지성들과 양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 50여 개국에서 스페인의 공화정을 지키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저항하려는 전 세계 젊은이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다. 그건 위대한 일이었다. 4만 여명의 세계 젊은이들이 인류의 도덕과 양심을 지키는 총을 들기 위해 달려왔다. 2만 여명의 세계인들이 의료와 보육과 병참 지원을 위해 달려 왔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작가 헤밍웨이가 총을 들고 싸웠던 곳이 여기였다. <1984년>으로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조지 오웰이 총을 들었던 곳이 여기였다. <인간의 조건>을 쓴 세기의 지성 앙드레 말로가 총을 들었던 곳이 여기였다. 피카소가 그의 대표작 <게르니카의 학살>을 그린 곳이 여기였다. 이반 요리스의 다큐영화 <스페인의 대지>에는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넣었다. 존 코포드와 랠리 폭스가 죽어간 곳도 여기였다.

네루다는 스페인에서 확실하게 <스무개의 사랑노래와 하나의 이별노래>, 그리고 이어진 시집 <지상의 거처> 시절 내내 드리워져 있던 우울의 장막을 벗어났다. 스페인은, 그리고 거기에서 죽어가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은, 그를 고뇌에 찬 자기만의 방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슴 속의 스페인>은 그렇게 쓰여졌다. 양심과 정의가 거리에서 피 흘릴 때 중립이란 사실은 학살자의 편에 선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제 시는 평화의 행동이었다. 평화는 시인에게 빵을 만들 때 밀가루가 필요한 것과 같았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네루다가 살던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만큼은 아니지만, 2009년 용산에도 그런 바보스런 문화예술인들의 연대가 있었다. 그간 문화예술인들은 용산 학살의 진상을 규탄하고 규명하기 위해 적잖은 일들을 해왔다. 용산 참사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많은 진혼무들을 행했다. 1937년 스페인에서 이반 요리스가 다큐 <스페인의 대지>를 만들 때, 피카소가 홍보 포스터를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넣듯, 아직 이름없는 작가인 장호경이 다큐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들 때, 만화가 신성식이 삽화를 그렸다. 네루다와 그의 친구들이 급히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옹호한다>를 내듯, 15명의 르포작가들이 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여기 사람이 있다>를 판화가 이윤엽의 작품을 표지에 새겨 냈다. 미술인들은 25년, 30년 넘게 한 가족의 희망이었다가 지금은 버려져 헐릴 처지에 있는 포장마차를 기억과 추모의 예술포장마차로 꾸며냈다. 전국순회 미술전 '망루전'과 더불어 고 이상림 열사가 운영하던 레아 호프 1층에서 '끝나지 않은 미술제'를 개인전 형식으로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대추리에서부터 한미FTA와 기륭전자를 지나 오늘 용산에서 이름없이 함께 하고 있는 그들 전진경, 나규환, 이윤정, 정윤희, 김재석, 김기호, 김천일, 배인석 등 그 아름다운 이름들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 1층에는 조약골과 허경, 김도형과 그의 친구들이 2층에 있는 <촛불방송국>과 함께 <언론재개발 행동하는 라디오>라는 대안미디어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의 자율과 활력은 아스팔트에서도 꽃이 피어오르게 할 것 같다. 연극인들은 매주 금요일 '끝나지 않는 연극제'를 열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 대구의 <함께 사는 세상>, 청주의 <예술공장 두레>, 경북 청송의 <나무닭움직임연구소>, <한두레> 등이 다녀갔다. 문학인들 역시 매주 금요일 자신들의 책을 들고 나와 연대를 위한 무료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다. 대중음악인인 김승환, 이상은 등이 늘 든든한 문화연대 벗들과 함께 용산참사 추모음악제를 열어주기도 했다. 시사만화가들이 '용산, 가자전'을 보태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진가 노순택 등이 사진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모든 이들이 내일(6월 10일) 용산 참사 140일, 거덜나버린 6.10항쟁 22돌을 맞아 용산 참사 현장에서 추모와 규탄의 현장 문화제를 갖기로 했다. 통한의 140일에 맞춰 각자 1가지씩 140가지의 문화행동을 준비하자 했는데 이미 190여개로 늘어나 버렸다. 시인들은 벽시를, 소설가들과 평론가들과 동화작가들과 영화인들은 벽글을, 미술가들은 벽화와 추모그림들을, 사진가들은 사진관과 슬라이드 작품들을, 연극인들과 음악인들과 춤꾼들과 풍물패들은 공연을 준비키로 했다. 참여 인원으로 보면 300여명이 넘는다. 작은 자리인 듯 하지만 쉽지 않은 자리였다. 하나의 사안을 가지고 하나의 장소에, 한 가지씩의 예술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함께 한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형식적인 기념의 6.10을 넘어 다시 올 새로운 6.10이 어떤 장소, 어떤 사건, 어떤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우린 그곳이 용산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구의 시신이 140일째 갇혀 있는 순천향병원 냉동고를 열지 못한다면 어떤 민주주의도 가능치 않다고 생각했다.

1937년 7월 파리로 피신했던 네루다는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 글과 서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세계적인 예술가들에게 내전 중인 스페인 마드리드 한복판에서 반파시스트 작가 총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어떤 기차도 그렇게 많은 작가들을 싣고 파리를 떠나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온 200여 명의 작가들이 스페인과 세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확고한 평화와 평등의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고 공화파가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법정, 진실의 법정에서만큼은 그들 이 승리해 왔다고 믿는다.

그렇게 다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아 2009년 6월 10일,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불안한 시대의 열차들을 타고 네루다처럼, 엘뤼아르처럼, 피카소처럼, 쇼스타코비치처럼, 이반요리스처럼 위대하지는 못하지만 양심을 버리지 않고 살려는 소중한 문화예술인들 300여명이 용산을 향해 길을 나선다. 더 많은 이들이 용산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우리 시대를 함께 지켜내야 한다는 소망을 담아 나선다. 그날, 그 길에 더 많은 예술가들, 양심들이 함께 해주기를 바래본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용산에서 무자비한 공권력 진압 과정에서 5명의 철거민들이 학살당했다. 독재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쓰레기 몇을 치웠을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고 끌려가며 외쳤다. 다섯 달이 다 되도록 시신들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자신들 역시 그 냉동고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고, 그 진실은 곧 밝혀졌다. 아직 심장이 살아 있고, 머리가 채 굳지 않았던 예술인들도 그 길에 함께 했다. 


"당신들은 물을 것이다 - 라일락은 어디에 있냐고
양귀비꽃으로 치장한 형이상학과
구멍들과 새들로
가득 찬 언어는
끊임없이 두들겨 패는 비는 어디에 있냐고

모든 것들이
저마다 커다랗게 외쳐대고 있었다 사고 팔리는 소금이 있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빵이 노적처럼 쌓여 있고
그리고 숟가락에서는 기름이 흐르고
거리에는 활기에 넘치는 손과 발의 깊은 율동이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자질구레한 생활의 척도
미터와 리터가 있고
겹겹으로 쌓아올린 생선들이 있고
지붕의 구조 위에는 차가운 태양에 지쳐 빠진 첨탑이 있고
상아와 같이 하얗게 타오르는 감자와
토마토가 바다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이 모든 것에 불이 붙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반지를 낀 공작부인들을 태운 악당들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검은 성직자들을 태운 악당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살해했다
거리에는 온통 어린 아이들의 피로 넘쳐 흘렀다
아이들의 피처럼 천진난만하게
오 승냥이도 경멸해 마지않을 승냥이들아
목이 타는 엉겅퀴까지도 침을 뱉을 돌멩이들아
살모사까지도 혐오해 마지않을 살모사들아

그래도 당신들은 물을 것인가 - 왜 나의 시는
꿈에 관해서 나뭇잎에 관해서 노래하지 않느냐고
내 조국의 위대한 화산에 관해서 노래하지 않느냐고

와서 보라 거리의 피를
와서 보라
거리에 흐르는 피를
와서 보라 피를
거리에 흐르는!"
- 네루다, <그 이유를 말해주지> 중에서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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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용 싯구를 보고 송경동 시인임을 직감했다.
나는 그의 네루다 평전도 궁금하고,
뭣보다 그의 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만,
그거 쉽지않을 것 같다.
그는 고공농성에, 참사현장에.. 그렇게 투쟁의 현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젠간 그의 글을, 그의 노래를,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때도 오지 않겠는가. 
단 한권의 책이, 아니 그 모든 한줄한줄의 문장이 
오롯이 세상을 드러내고 그렇게 또 우리 마음을 울리리라. 
지금 싸우고 있기 때문에,
늘 가난뱅이들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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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 

해어진 남방에 그을리지 않고도 
건강한 얼굴, 붉은 입술 가진 아이야 

가진 이들에겐 조화로운 세상 

우뚝서거라, 안아주거라
너의 품으로 

걱정마, 넌 우리보다 더 따뜻하단다 
자랑스런 네 검은 피부 가리지마라
어리석은 이들의 눈빛 피하지마라 

너는 똑똑하다 
너는 건강하다
너는 아름답다
대한민국보다

지지 않는 네 엄마의 땅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온기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먹보다 위대한 이름
차별보다 거대한 이름
가르쳐 주어라
깨우쳐 주어라  

(루시드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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