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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대신 걱정 끼쳐 죄송…
예능 대신 자꾸 시사프로 섭외 와요
몸 아파 한의원 갔더니 화기 때문에 장 약해졌다고
돌아가신 분께 예 표한 게 정치적이라면 할말 없어
사회 중추적인 분들 사고가 그 정도라 생각 않고파
 
 
한겨레 권복기 기자 김미영 기자 김명진 기자
 








 

 
   





‘KBS 하차’ 개그맨 김제동

김제동(35)씨는 요즘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산을 좋아해 자주 가거든요. 예전에는 산길에서 저를 만나면 그냥 웃고 지나들 가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자꾸 먹을 것을 주세요. 시장에서는 상인분들이 물건을 더 주시고요.”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위로받는 현실이 조금은 당혹스럽다.

2008년 2월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식전행사 때 마이크를 잡았다. 교회에 다니는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날 노제 무대에 섰다. 4개월여 뒤 그는 <한국방송>의 ‘스타골든벨’ 메인 엠시를 느닷없이 그만둬야 했다. 방송사의 설명은 석연치 않았다. 논란이 일었다. 국회에서까지 그의 ‘하차 배경’을 두고 여야 사이에 정치적 공방이 벌어졌다. 그는 침묵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뒤 그를 만났다. 그는 ‘퇴출’에 대해 “내 책임이 97%”라며 자기반성이 먼저라고 말했다. 노제 사회와 관련해 그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영결식과 같은 국가적 행사에 사회자로 서는 일을 “도리”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보는 “몰상식한 사회지도층의 존재”에 대해서는 믿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3%의 가능성은 남겨뒀다.

웃음에는 좌우가 없다는 그. 살아 있는 한 웃음을 주는 일을 하겠단다. 방송 일도 더 하고 싶다. 하지만 “넘어진 김에 꽃 보고 간다”며 그는 방송 아닌 다른 공간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가슴 뛰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12월5일부터 한 달 동안 대학로 이랑씨어터에서 열리는 토크 콘서트 ‘노 브레이크’다. 2년 전부터 꿈꿔온 일이다.

김제동씨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웃음을 줘야 할 사람이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그 ‘사건’에 대해 그동안 그 자신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몸이란 놈은 생각보다 고지식하다. 몸은 마음이 겪는 일을 꼭 드러낸다. 김씨는 얼마 전 장염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몸을 추스르려 찾은 한의원에서는 화기로 인해 장부가 약해졌다고 했다. 속이 상하긴 상했나 보다.


 

» 스스로를 ‘웃음을 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김제동씨는 “좋아하던 분이 돌아가셔서 사회를 보는 게, 돌아가신 분에게 예를 표하는 게 정치적이라면 할 말이 없다.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고 한 게 정치적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정치적이다”라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스타골든벨 하차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됐습니다. 당시 심경은 어땠습니까?

“4년 동안 해온 프로그램은 제 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다음주 월요일(녹화일)이 사실 힘들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다 ‘아, 오늘 녹화가 없지’라는 생각이 들어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산으로 갔습니다. 말들이 많았지만 제가 그 프로그램에 얼마나 열정을 쏟아부었는가를 반성하는 것이 진행자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부 요인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것이 맞든지 맞지 않든지 간에 2차적인 문제입니다. 또 적어도 이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 분들의 생각이 그 정도밖에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노제 사회와 같은 정치적인 활동으로 ‘엠시 하차’라는 불이익을 받았다고 여깁니다.

“(방송인으로서) 정치적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에 100% 공감합니다. 하지만 맹세코 전 단 한 번도 정치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던 분이 돌아가셨는데 사회를 보는 것이, 돌아가신 분에게 예를 표하는 것(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에 조문한 뒤 방명록에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살겠습니다. 대통령님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중의 한 명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로 사랑에 보답하고 살겠습니다’라고 썼다)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 트위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이것이 좌나 우로 나눌 수 있는 개념이라면,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좋습니다. 저는 정치적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도 사회를 본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없었나요?

“(대통령 취임식 사회는) 아주 영광스런 자리였습니다. 정당 행사나 어용적으로 동원된 행사가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에 사회를 보는 것을 정치적인 행위라고 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전화가 왔는데 매니저가 잘못 알아듣고 인순이 선생님이 취임한다고 하는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말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도 나네요.”

그는 몰상식한 사회가 가장 웃기는 사회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사실과 진실이, 정권과 민족이 혼동되는 사회는 그에게 몰상식한 사회다. 물론 좋은 몰상식도 있다. “자꾸 한계를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상식이라고 규정되고,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져 있는 어떤 규제들, 생각의 틀들 이런 것들을 지워나가는 것은 좋은 몰상식입니다.”

힘들 때 달래주는 세 친구는 이승엽, 술 그리고 산
넘어진 김에 꽃 보듯 토크콘서트로 사람들 만날 것
원래 꿈은 선생님...놀며 배우는 대안학교 만들고파

-이번 일을 계기로 방송인이나 연예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숨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 사회활동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축구팀을 응원하는 것과 방송인이 특정 장소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요?

“(발언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거나 영향을 준다면 신중해야 합니다. 미칠 파장을 떠나 제가 믿는 것을 옳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는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타골든벨을 그만둔 뒤 다른 방송이나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오지는 않습니까?

“예능프로는 섭외가 안 오고 자꾸 시사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옵니다. (시사프로그램에는) 안 나가렵니다.(웃음)”

-성공한 방송인치고는 이력이 특이합니다. 공채 아나운서나 탤런트 출신이 아니고 배우나 가수도 아니었는데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동일화되는 과정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크게 경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외모가 (방송에) 나오니까 ‘저렇게 생긴 사람들도 텔레비전에 나오는구나’라며 쉽게 동일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방송인으로 성공한 뒤 우울증이 생겼다. 아주 가끔은 약도 먹는다. “서민들과의 빠른 동일화 과정을 거쳐 서민에서 빨리 벗어난” 역설이 그를 힘들게 했다. 채무의식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거의 해마다 억대의 돈을 남을 돕는 데 쓰는 이유다. 그는 이를 갚아드린다고 표현했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착한 일이 아니라 제가 살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빚에 쪼들리면 힘들지 않습니까? (나눔은) 빚을 갚는 거니까요. 물질 이외의 것들로도 하려고 계획중입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될 수 있으면 많은 곳에 서있고 싶습니다.”

그는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망은 물에 새기라는 말’을 실천하며 산다. 지금 소속된 기획사로 옮길 때는 계약금 한 푼 받지 않았다. 윤도현씨 등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이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벌어진 논란이 더욱 부담스럽다. 그는 “황금돼지가 아닌 고슴도치가 들어온 셈이죠”라며 소속된 기획사에 거듭 미안함을 표시했다.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주위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너무 튀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누나들이 가장 곱지 않게 봅니다. 우리 집 전세가 얼마인 줄 아느냐고요.(웃음)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모난 돌이 물론 정을 맞죠. 그러나 정으로 쪼아 놓은 조각품치고 자연의 바위보다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난 돌도 있어야죠. 그런데 저는 모난 돌 아닌 것 같은데….(웃음)”

-방송인으로 당분간 정체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되지는 않나요?

“제가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몇 년 전부터 느꼈습니다. 빠르게 진화하는 예능프로그램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몸개그를 하려고 집에서 넘어지는 연습까지 해봤어요. 안되더라고요. 적응하면 저를 잃어버릴 것 같고, 저를 계속 고집하면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청률이 잘 나오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제일 좋겠지만 심야시간대에 2~3% 시청률이 나와도 좋으니 저를 잃지 않는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얼마 전 문화방송(MBC)에서 시험 제작해 방영한 <오 마이 텐트>도 정규 편성 진입에는 실패했다. “흔한 일”이지만 2009년 겨울, 그의 가슴은 시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세 벗이 있다. 이승엽 선수가 첫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아는 사이”라고 한다. 이날도 인터뷰를 마친 뒤 “승엽이와 당구를 하기로 했다”며 떠났다. 다음은 술. 막걸리와 소주를 섞은 막소주를 즐기는 그는 “술을 먹은 뒤 솔직해지는 분위기가 좋다.”

그의 또다른 위안처는 산이다. 그는 산을 탄다는 말 대신 업힌다고 표현한다. 산은 오르는 대상이 아니라 편안하게 그를 업어주는 할머니 같은 존재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지쳐 힘이 들 때면 그는 ‘할머니 산’에 업히러 간다.

김제동은 어록을 가진 방송인이다.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죠. 우리는 네잎클로버를 따기 위해 수많은 세잎클로버들을 짓밟고 있어요. 그런데 세잎클로버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행복이랍니다. 우리는 수많은 행복 속에서 행운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랑은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댈 곳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책과 허영만의 만화를 제일 좋아한다는 그는 독서량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집에는 네 종류의 신문이 배달된다. ‘김제동 어록’은 그런 독서와 글읽기가 밑바탕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 정도 말을 할 수 있는데 저는 다만 마이크를 얻었기 때문에 좀 널리 알려졌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 김제동.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토크 콘서트를 준비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방송인으로서 그런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는 경우는 드문데요.

“2년 전부터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근거리에서 아무런 장벽 없이 (사람들과)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아무런 편견 없이, 심지어는 마이크도 없이. 소주 토크도 해보고 싶습니다. 질문 한 번 받을 때마다 술 한 잔 먹고, 술 취해서 쓰러져서 횡설수설도 해보고, 환불해달라면 환불도 해주고. 물론 비밀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그는 공동체 운동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대안학교는 몇 해 전부터 그의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띠어가고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성공회대학교에 편입한 것도 이런 그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전문대 출신으로 사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만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력으로서의 학교가 아니라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성공회대를 선택한 이유는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더 좋은 학교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 꿈이 원래 선생님이었습니다. 성적이 안돼서 사범대를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진행하고 있는 <환상의 짝꿍>에 나온 8살 아이가 ‘꼭 미국 사람과 결혼할 거다”라고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는 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답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들고 싶은 학교는 15분 수업하고 45분 휴식하는 학교입니다. 컴퓨터와 게임기를 철저히 배제하고 45분간 사람하고만 노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 3개월 과정의 영어캠프를 준비중입니다. 아이들 10명이 조를 짜 원어민 강사 한 명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할 생각입니다. 3개월 뒤에 원어민 강사가 필기시험을 봅니다. 잘 가르친 아이에게는 상을 주려고 합니다. 원어민 강사들이 우리말을 잘 못하는 것 보면서 아이들이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방송인 아닌 김제동을 많이 만났다. 공사장 인부로 자신이 살던 집을 철거했던 가난한 청년, 늘 책을 끼고 다니는 늦깎이 대학생, 해마다 거액을 다른 이를 돕는 일에 쓰는 가슴 따뜻한 사람, 대안학교 설립에 관심이 많은 사회 운동가 등. 그럼에도 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웃음의 의미를 물었다. “웃음은 애정의 표시이자 공감과 인정의 표시입니다. 누구나 웃을 수 있고 누구나 웃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공평합니다. 웃음은 나누고 나눠도 모자라지 않는 무한한 에너지입니다.” 그는 앞으로도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 일이 편하고 재미있다. 무엇보다 좋다.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정리/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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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썩다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는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정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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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품는다

나무 한 그루 심고
그것들 나날이 자라 이젠
영 딴 모습으로 열매 맺었다
자랑하는 이 있더라만

가슴 속에 심은 것은 그렇게
함부로 자라거나 변하지 않아서
차라리 바위덩어리 하나
가슴 속에 품은 사람도 있네

잘생긴 나무들 울창하게 우거져
발 딛을 틈 없는 세상에서
나도 푸르른 나무 한 그루 자랑스럽게 품는 날
꿈꾼 적 왜 없겠냐마는
 
똥과 함께 묵정밭 거름으로 뒹굴어도
아무 뿌리나 선뜻 받아 함부로 품지 않는
흙이 먼저 되기를.
한 번 품으면 영영 뒤집을 줄 모르는
뚝심 좋은 흙이 먼저 되기를

세월의 이끼 싯푸르게 더께 낀
바위 덩어리 하나, 끝끝내
품고 사는 미련도 있는 것이다

(박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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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서울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면

이 양반 머리가 돌았구만 할 테지

그래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하는 수 없지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아니 그래도 나는 간다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고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고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
 
38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것이라고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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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기 전에 공화주의자가 되는 기본적인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공화주의자가 아니면서 시인이 된다는 것은 ㄱ, ㄴ, ㄷ을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자유의 과녁이 되지 않으면서 자유를 읊는 것은 위선이거나 사기였다."

네루다의 글이었던가.

시를 잊고 산 지 참 오래다. 재작년 겨울 목 디스크가 왔다. 빨리 수술을 하라는 의사들의 말을 뒤로 하고, 내설악 만해 마을로 내딴엔 긴 여행을 떠났다. 3개월 동안 처박혀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온통 세상이 하얀 눈밭이었다. 인적이 드문 먼 산까지 올라가 얼음을 깨고 계곡물을 받아 마시곤 했다.

그리운 것들이 많았다. 그 기간 동안 밀린 숙제로 네루다 평전을 쓰기 시작했다. 거의 연애하는 심정이었다. 그가 내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고 느낀 때부터 미친 듯이 쓰기 시작했다. 바깥일들을 잊기 위해 썼다고 해도 될 것이다. 보름동안 1000매가 써졌다.

서울로 내려와 마지막 교정을 봐서 출판사로 넘기려고 했다. 그 사이 잠깐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만났다. 3년여 잠깐씩 연대하며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들이 싸움 1000일을 곧 맞는다고 했다. 안타까웠다. 그들의 1000일은 이 사회 89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의 1000일이었다. 월 급여는 법정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1850원, 3개월, 6개월짜리 노예계약, 상여금 0%의 파견직 노동자들이 1000일이 가까워 오도록 노숙농성을 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기륭전자 여성비정규직의 1000일은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움과 자성의 1000일이어야 했다.

잠깐 돕겠다고 들어간 일이 1년여 지속되었다. 두 번의 고공농성, 94일에 이르는 집단단식, 미국 원정투쟁, 마지막 망루 투쟁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나 역시 두 번 국회의사당 내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점거를 들어가야 하기도 했다. 과정에 두 번 유치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기륭전자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에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꾸리기도 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 역시 당시 500여일을 빈 공장에서 맞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양계장의 닭처럼 일하며 그들은 세계 기타 시장 점유율 1/3에 이르는 기타를 낳았다. 빼빠질로 지문이 없어지고, 거개가 유기용제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30여년 동안 이들과 기타와 노래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삶을 착취해 박영호 회장은 물경 1000억 대의 자산가가 되었지만,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박영호 회장은 더 값싼 노예를 찾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영혼이 없는 기타, 착취받는 기타로는 노래할 수 없다고, 우리는 동료 예술인들과 사회에 호소했다.

정말이지 올해 초에는 다시 도망가고 싶었다. 네루다 평전도 정리해서 내고,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다시 책을 읽고, 쓰고 싶었다. 차분하게 삶과 사회에 대해 돌이켜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읽는 일보다 나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자성하며 그리운 것들을 소중하게 갈무리하고, 다시 조금은 더 외롭고 싶었다.

하지만 이 개떡 같은 사회는,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내게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1월 20일,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람들을 죽였다. 용산에서 였다. 이 평지에서는 갈 곳이 없어 저 하늘에 답답한 망루를 지어 오른 사람들이었다. 제발 우리의 절박하고 참혹한 얘기를 들어달라고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공권력 진압이었다. 어차피 쓰레기 같은 인생들이니 죽여도 괜찮다는 허가였다. 12시간만에 유족들을 따돌리고 강제 부검이 이루어졌다. 호들갑은 금세 잠잠해질 거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있는 사회다보니 누구도 타인의 죽음에 대해 크게 애통해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용산 참사 현장을 쫓아다닌 지 오늘로 140일째, 결국 네루다 평전은 지금도 고이 컴퓨터 한 폴더에서 한가롭게 잠자고 있다. 난 한 번도 그를 깨워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 네루다도 한때는 시를 버리고 참사의 현장을 쫓아 다녔다. <스무개의 사랑노래와 하나의 이별노래>라는 연애시집으로 유명했던 네루다가 세계적인 민중시인이 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겪으면서부터다.

나는 잠시 멈추고 현대 문학에서는 금지되었지만 인류의 염원에 깊이 뿌리내리고 인본주의로 향한 길을 찾기로 했다. 시가 핍박받고 소외된 다수를 향해 힘과 다정함과 기쁨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시는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노래하지는 못할 거다.

당시 스페인은 오늘 세계의 모습과 어쩌면 닮아 있다. 스페인은 세계의 미래와 과거가 맞붙은 힘의 대결장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이후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한 착취로 만회하려는 자들과 좀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간의 대리전이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즉각 왕당파인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중립이라는 얼빠진 자리에 가 서있었다.

왕정과 세속화된 교회와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공화파들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무려 100만 명이 이 내전으로 죽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소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가, 어부가, 목수가, 대장장이가, 그들의 아내들이 죽어갔다. 그러고도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조국을 등져야 했다.

당시 네루다는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칠레영사였다. 그의 스페인 친구들은 열렬한 공화파들이었다. 파쇼에 맞선 투쟁에서 그가 '스페인의 가슴'이라고 칭했던 로르까도 죽고, '스페인의 얼굴'이라 했던 염소지기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도 총을 잡고 죽어 갔다. 참을 수 없었던 네루다는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옹호한다>라는 잡지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랭스턴 휴즈와 영국의 W.H.오든, 아일랜드의 예이츠, 훗날 모두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와 스웨덴의 셀마 라게를뢰프, 사무엘 바케트 등이 함께 했다.

공화파에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 세계의 지성들과 양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 50여 개국에서 스페인의 공화정을 지키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저항하려는 전 세계 젊은이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다. 그건 위대한 일이었다. 4만 여명의 세계 젊은이들이 인류의 도덕과 양심을 지키는 총을 들기 위해 달려왔다. 2만 여명의 세계인들이 의료와 보육과 병참 지원을 위해 달려 왔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작가 헤밍웨이가 총을 들고 싸웠던 곳이 여기였다. <1984년>으로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조지 오웰이 총을 들었던 곳이 여기였다. <인간의 조건>을 쓴 세기의 지성 앙드레 말로가 총을 들었던 곳이 여기였다. 피카소가 그의 대표작 <게르니카의 학살>을 그린 곳이 여기였다. 이반 요리스의 다큐영화 <스페인의 대지>에는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넣었다. 존 코포드와 랠리 폭스가 죽어간 곳도 여기였다.

네루다는 스페인에서 확실하게 <스무개의 사랑노래와 하나의 이별노래>, 그리고 이어진 시집 <지상의 거처> 시절 내내 드리워져 있던 우울의 장막을 벗어났다. 스페인은, 그리고 거기에서 죽어가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은, 그를 고뇌에 찬 자기만의 방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슴 속의 스페인>은 그렇게 쓰여졌다. 양심과 정의가 거리에서 피 흘릴 때 중립이란 사실은 학살자의 편에 선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제 시는 평화의 행동이었다. 평화는 시인에게 빵을 만들 때 밀가루가 필요한 것과 같았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네루다가 살던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만큼은 아니지만, 2009년 용산에도 그런 바보스런 문화예술인들의 연대가 있었다. 그간 문화예술인들은 용산 학살의 진상을 규탄하고 규명하기 위해 적잖은 일들을 해왔다. 용산 참사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많은 진혼무들을 행했다. 1937년 스페인에서 이반 요리스가 다큐 <스페인의 대지>를 만들 때, 피카소가 홍보 포스터를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넣듯, 아직 이름없는 작가인 장호경이 다큐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들 때, 만화가 신성식이 삽화를 그렸다. 네루다와 그의 친구들이 급히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옹호한다>를 내듯, 15명의 르포작가들이 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여기 사람이 있다>를 판화가 이윤엽의 작품을 표지에 새겨 냈다. 미술인들은 25년, 30년 넘게 한 가족의 희망이었다가 지금은 버려져 헐릴 처지에 있는 포장마차를 기억과 추모의 예술포장마차로 꾸며냈다. 전국순회 미술전 '망루전'과 더불어 고 이상림 열사가 운영하던 레아 호프 1층에서 '끝나지 않은 미술제'를 개인전 형식으로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대추리에서부터 한미FTA와 기륭전자를 지나 오늘 용산에서 이름없이 함께 하고 있는 그들 전진경, 나규환, 이윤정, 정윤희, 김재석, 김기호, 김천일, 배인석 등 그 아름다운 이름들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 1층에는 조약골과 허경, 김도형과 그의 친구들이 2층에 있는 <촛불방송국>과 함께 <언론재개발 행동하는 라디오>라는 대안미디어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의 자율과 활력은 아스팔트에서도 꽃이 피어오르게 할 것 같다. 연극인들은 매주 금요일 '끝나지 않는 연극제'를 열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 대구의 <함께 사는 세상>, 청주의 <예술공장 두레>, 경북 청송의 <나무닭움직임연구소>, <한두레> 등이 다녀갔다. 문학인들 역시 매주 금요일 자신들의 책을 들고 나와 연대를 위한 무료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다. 대중음악인인 김승환, 이상은 등이 늘 든든한 문화연대 벗들과 함께 용산참사 추모음악제를 열어주기도 했다. 시사만화가들이 '용산, 가자전'을 보태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진가 노순택 등이 사진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모든 이들이 내일(6월 10일) 용산 참사 140일, 거덜나버린 6.10항쟁 22돌을 맞아 용산 참사 현장에서 추모와 규탄의 현장 문화제를 갖기로 했다. 통한의 140일에 맞춰 각자 1가지씩 140가지의 문화행동을 준비하자 했는데 이미 190여개로 늘어나 버렸다. 시인들은 벽시를, 소설가들과 평론가들과 동화작가들과 영화인들은 벽글을, 미술가들은 벽화와 추모그림들을, 사진가들은 사진관과 슬라이드 작품들을, 연극인들과 음악인들과 춤꾼들과 풍물패들은 공연을 준비키로 했다. 참여 인원으로 보면 300여명이 넘는다. 작은 자리인 듯 하지만 쉽지 않은 자리였다. 하나의 사안을 가지고 하나의 장소에, 한 가지씩의 예술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함께 한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형식적인 기념의 6.10을 넘어 다시 올 새로운 6.10이 어떤 장소, 어떤 사건, 어떤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우린 그곳이 용산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구의 시신이 140일째 갇혀 있는 순천향병원 냉동고를 열지 못한다면 어떤 민주주의도 가능치 않다고 생각했다.

1937년 7월 파리로 피신했던 네루다는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 글과 서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세계적인 예술가들에게 내전 중인 스페인 마드리드 한복판에서 반파시스트 작가 총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어떤 기차도 그렇게 많은 작가들을 싣고 파리를 떠나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온 200여 명의 작가들이 스페인과 세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확고한 평화와 평등의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고 공화파가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법정, 진실의 법정에서만큼은 그들 이 승리해 왔다고 믿는다.

그렇게 다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아 2009년 6월 10일,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불안한 시대의 열차들을 타고 네루다처럼, 엘뤼아르처럼, 피카소처럼, 쇼스타코비치처럼, 이반요리스처럼 위대하지는 못하지만 양심을 버리지 않고 살려는 소중한 문화예술인들 300여명이 용산을 향해 길을 나선다. 더 많은 이들이 용산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우리 시대를 함께 지켜내야 한다는 소망을 담아 나선다. 그날, 그 길에 더 많은 예술가들, 양심들이 함께 해주기를 바래본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용산에서 무자비한 공권력 진압 과정에서 5명의 철거민들이 학살당했다. 독재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쓰레기 몇을 치웠을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고 끌려가며 외쳤다. 다섯 달이 다 되도록 시신들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자신들 역시 그 냉동고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고, 그 진실은 곧 밝혀졌다. 아직 심장이 살아 있고, 머리가 채 굳지 않았던 예술인들도 그 길에 함께 했다. 


"당신들은 물을 것이다 - 라일락은 어디에 있냐고
양귀비꽃으로 치장한 형이상학과
구멍들과 새들로
가득 찬 언어는
끊임없이 두들겨 패는 비는 어디에 있냐고

모든 것들이
저마다 커다랗게 외쳐대고 있었다 사고 팔리는 소금이 있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빵이 노적처럼 쌓여 있고
그리고 숟가락에서는 기름이 흐르고
거리에는 활기에 넘치는 손과 발의 깊은 율동이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자질구레한 생활의 척도
미터와 리터가 있고
겹겹으로 쌓아올린 생선들이 있고
지붕의 구조 위에는 차가운 태양에 지쳐 빠진 첨탑이 있고
상아와 같이 하얗게 타오르는 감자와
토마토가 바다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이 모든 것에 불이 붙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반지를 낀 공작부인들을 태운 악당들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검은 성직자들을 태운 악당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살해했다
거리에는 온통 어린 아이들의 피로 넘쳐 흘렀다
아이들의 피처럼 천진난만하게
오 승냥이도 경멸해 마지않을 승냥이들아
목이 타는 엉겅퀴까지도 침을 뱉을 돌멩이들아
살모사까지도 혐오해 마지않을 살모사들아

그래도 당신들은 물을 것인가 - 왜 나의 시는
꿈에 관해서 나뭇잎에 관해서 노래하지 않느냐고
내 조국의 위대한 화산에 관해서 노래하지 않느냐고

와서 보라 거리의 피를
와서 보라
거리에 흐르는 피를
와서 보라 피를
거리에 흐르는!"
- 네루다, <그 이유를 말해주지> 중에서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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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용 싯구를 보고 송경동 시인임을 직감했다.
나는 그의 네루다 평전도 궁금하고,
뭣보다 그의 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만,
그거 쉽지않을 것 같다.
그는 고공농성에, 참사현장에.. 그렇게 투쟁의 현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젠간 그의 글을, 그의 노래를,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때도 오지 않겠는가. 
단 한권의 책이, 아니 그 모든 한줄한줄의 문장이 
오롯이 세상을 드러내고 그렇게 또 우리 마음을 울리리라. 
지금 싸우고 있기 때문에,
늘 가난뱅이들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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