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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이주, 모바일 놀이 (양장)
이경숙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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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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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관련 만화책 <내가 살던 용산>(보리출판사) 중 한 꼭지인 '상현이의 편지' 

용산참사 관련 책 소개 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6&id=478&page=1

출처 : 용산참사범대위 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6&id=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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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의 타결, 그 지난함과 초라함 [2010.01.08 제793호]
 
[특집]
 
 
 
임인택


 
 

용산 참사를 둘러싼 협상이 2009년 12월30일 타결됐다. 영하 10도까지 수은주가 곤두박질하던 날이다. 사건이 터진 그해 벽두도 그리 추웠다. 아니, 살 수 없을 만치 뜨거웠다.

지난 1년이 그랬다. 망루에 불이 붙던 정초, 검찰이 “용산 참사, 경찰의 과잉 진압은 없었다”고 발표한 2월, 검찰이 수사 기록 3천여 쪽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던 5월, 문규현 신부가 단식 농성으로 쓰러져 사경에 발을 디뎠던 10월, 그리고 법원이 기소된 철거민 모두에게 유죄를 내린 또 10월…. 2009년의 어느 계절도 이들에게 따뜻하지 않았다.


 
 


» 2009년 12월30일 오전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시청 별관에서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던 시각, 참사가 난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영정을 끌어안은 유족들이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의 별도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공치사’만 화려하다. 국무총리가, 서울시가, 국회의원이 ‘적극적’이었다. 재개발조합은 ‘인도적’이다. 보상금·위로금·장례비를 모두 떠맡았다. 하지만 그들만의 ‘따뜻한 세계’는 쪼들린 몸 하나를 누일 아주 작은 방, 잡초처럼 키 낮은 꿈 하나 키울 또 작은 가게는 절대 포용하지 않는다.

죽은 자의 고향은 가진 자들의 낙원으로 바야흐로 바뀔 참이다. 숨진 이들은 1월9일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사라질 것이다. 다들 극적 타결이라 하는데, 저들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이들이 원하는 36.5℃의 자그마한 세계는 오지 않은 탓이다.


 
 


» 2009년 9월1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유족과 시민들이 용산 참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삼보일배를 하다 경찰에 가로막혀 있다.
 
 
 


 
 


» 참사 140일째인 2009년 6월10일 젊은 예술가들이 희생된 5명의 얼굴이 담긴 초상화를 철거 가림막에 새기고 있다.
 
 
 


 
 


» 2009년 4월29일 서울역 앞에서 시민들이 ‘용산 참사 100일 추모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 2009년 3월12일 희생자들의 주검이 있는 서울 순천향병원 영안실 앞에 박래군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의 수배 전단을 손에 쥔 경찰이 서 있다.
 
 
 


 
 


» 참사로 숨진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의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글. 참사 당일 고인의 생사와 행방을 알아보려 유가족들이 분투한 흔적이 보인다.
 
 
 


 
 


» 2009년 1월20일 새벽 경찰의 무리한 강제 진압으로 6명의 희생자를 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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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럴 걸 왜 외면해왔나” [2010.01.08 한겨레21 제793호]
 
[특집] 유가족·세입자의 ‘어버이 같은 동지’ 문정현 신부
“정권의 무지막지함, 사회의 냉담함·무관심 절실히 느낀 한 해”
 
 
 
임인택


 
 

2010년 1월1일 남일당 앞에 문정현 신부가 서 있다. 2009년 1월20일 아침 7시20분께 불타버린 서울 한강로 용산 4구역 초입의 그 건물. 아무도 찾지 않는, 여섯 명의 ‘무덤’이다. 문 신부는 건물 계단을 지팡이로 당겨가며 힘겹게 올랐다. “너무 무섭고 끔찍해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민주화 복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거리의 신부’가 무서워하는 게 있다. 해 바뀌며 나이 일흔을 꽉 채웠고 신부가 된 지 45년이 된 그가 끔찍해하는 게 있다. 게다가 용산 참사는 이제 모두 타결이 되었다 하질 않는가. 그런데도 문 신부는 애면글면 공포에 관한 것으로부터 말머리를 열었다. 모두 ‘희(希)·활(活)·생(生)’을 얘기한다는 새해 첫날 인터뷰였다.


 
 


» 문정현 신부.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 합의 결과가 알려지고서 처음 든 소회가 궁금합니다.

= 결국, 결국에 이렇게 할 것을 정부가 1년 동안 그건(용산 참사 협상) 사인 간의 문제라면서 얼마나 외면했냐 말이죠. 1년을 넘기는 게, 기일이 다가오는 게 부담이 됐나? 올해 선거가 부담이 된 건가? 한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밤샘 협상까지 하면서, 결국 이렇게 할 것을, 그동안 얼마나 무지막지했느냐 말이죠. 정말 잔인하고 무서운 정권이에요, 잔인해.

- 아쉬움이 많으신가요.

= 모두 타결이 되었다고 생각지 않아요. 모든 마을이 해방되면서부터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일시에 이것을 무너뜨리고 대다수를 쫓아내고 죽이고 호화주택을 짓는다?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는 거죠? 근본적으로 지금의 재개발 정책에 대한 반성과 수정이 필요해요.

- 그렇다면 아직 개인적으로 숙제를 남기신 겁니까.



= 제 원칙은, 내 바람이나 목표가 이분들(유가족·세입자)의 수준을 넘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 문제가 남아 있으나 이분들께 그것까지 해결하자 할 순 없죠. 하루빨리 새 삶을 꾸려 살아가야 하는 분들 아닙니까.

- 대중은 타결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 분명한 건, 결국 이곳 세입자들은 통째 사라지고 재개발은 본래대로 유유히 진행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크고 작은 제2의 용산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겠죠. 여기서 교훈 하나 얻지 못할까 착잡하고, 지금이 여기 아니면 어디서 다시 재개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겠느냐는 목소리를 들으면 아득하지요.


문 신부는 2009년 3월28일 용산 참사 현장으로 들어왔다. 본거지인 전북 군산에서 직접 차를 한 대 몰고 왔다. 옷가지 등을 모두 챙겨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잤다. 하루, 한 달을 넘어 새해를 용산에서 맞게 될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유가족·세입자에게 문 신부는 ‘동지’이자 세배까지 드리는 ‘어버이’가 됐다. 가장 단단한 걸목이었다.


- 처음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배경이 뭔지요.

= 사고가 터진 날,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었어요. 딱 대형 참사다 했지. 난 재개발이나 철거 문제, 솔직히 잘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단박에 든 생각은, 이렇게 추운 겨울에 사람을 내쫓겠다며 죽였다는 것, 그건 도대체 말이 안 된다는 거였죠. 그러다 집에 왔는데,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도 계속 뉴스가 나와요.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올라가야겠다 했지요.

- 그래도 홀몸으로 쉽지 않았을 텐데요.

= 여러 지인들이 용산에 어른이 없다고 했어요. 간절한 마음으로 와닿았지요. 게다가 그즈음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2009년 2월16일)하고 추모 미사가 열렸어요. 미사 때마다 용산에 대해선 전혀 얘기되는 게 없더라고요. 서글펐어. 추기경님이 용산 참사도 그냥 지고 올라가셨나 했지요.

- 유가족·세입자 모두 문 신부가 아니었다면 이만큼 버티기도 어렵고 이 정도의 결과도 얻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합니다.

= 내가 하고, 할 수 있는 게 뭐 미사밖에 더 있나. 처음 짐을 실은 차를 끌고 왔는데, 현장에 못 세우게 할 줄 알았어요. 실제 경찰들이 안 된다고 차를 빼라는 거예요. 내가 그럼 전경차도 빼라, 그랬죠. 안 빼더라고. 그래서 내 차도 안 뺐지. 허허.

- 그렇게 신부님들이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 어, 미사를 건드리진 않더라고. 대신 경찰에 완전히 둘러싸인 채 했지요. 하루 걸러 몸싸움이 있었으니까. 플래카드 하나만 붙이려거나 천막 하나만 치려고 해도, 부수고 빼앗고 잡아갔어요. 유가족이나 세입자 가운데 성한 사람이 없었어요. 깁스를 하거나 보호대를 차고 그랬지. 그래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합류하고, 서울대교구 이강서 신부(빈민사목위원 위원장)도 와줘서 큰 힘이 되었지요. 사실 나 혼자 미사를 한 건 두 차례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이강서 신부는 처음 일주일만 머물겠다고 해서 4구역 빈집에서 지내셨는데, 막상 도저히 못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내가 그랬지요. 그동안은 내가 남일당 성당의 주교였는데, 이 신부가 주교 하시고 난 은퇴한 사람이니 보좌신부라고. 허.

- 용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써준 분들이 많다고 곳곳에서 목소리가 나옵니다.

= 여기 와서 세상을 봅니다. 정부나 서울시, 이런 데는 둘째 치고라도 ‘종교의 가면’이 너무 많아요. 강도를 당한 곳인데, 오기만 하면 그 사실이 다 보이는데 오질 않아요. 용산 주변만 해도 성당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옆인데, 어찌됐건 사람이 죽었잖아요.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죠. 서울시에서 타결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보니 종교인분들도 자리하셨던데,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하지만 그렇게 참석하실 거라면, 그전에 여기부터 깊숙이 계셨어야죠. 용산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분도 있으니까. 두 전직 대통령 서거 때나 김수환 추기경 서거 때 참석한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지도 난 궁금합니다.

- 정권의 외면은 민중의 무관심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초기에 관심을 받다 금세 잊혀지고선 용산은 섬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많은 이들이 무력했다고 얘기합니다.

= 공권력 앞에 더없이 왜소해졌어요. 도대체 메아리가 없었으니까, 이 사회에 희망이란 게 있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 새해입니다. 바람이 있으신지요.

= 우리 몸 어디 발가락에 상처라도 나면, 머리끝까지 거기에만 신경을 쓰잖아. 그런데 여긴 사람이 죽었는데도 남 일 보듯 할 수 있느냐 말이죠.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겠어요? 당장 1월25일(남일당에서 최종 해산키로 한 날)이 지나면 다들 어떻게 현실로 돌아갈지 상상을 못하겠어요. 4대강을 보는 것 같아요. 밀고 나가는 거지. 건물들이 쭉쭉 올라가겠지. 여기 사람들은 잊혀지고 사라진 채.


그는 용산 참사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신부를 포함한 가까운 지인들에게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용산 타결… 유족과 엉켜 울다. 속은 부글부글. 재개발은 유유히.” 사실 그의 속내는 이 ‘24글자’에 모두 담겼다. 한 달에 두 글자씩 새겨온 셈이다. 그리고 부족한 게 있다면 ‘눈물’이 말하리라.

“아직 덕담을 나눌 때가 아니에요. 딱 봉합한 수준의 타결이란 게 맞아요. 여러 권력자들 혹 하나 떼냈다고 하겠지요. 이 모든 고통이 정말 승화되길 바랍니다. 이 사회의 냉담함, 무관심을 무섭게 확인했어요. 그건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문제 아닙니까?” 인터뷰 말미, 흘리고 흘렸던 눈물을 문 신부는 결국 또 쏟아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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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 보노짓 후세인 교수와 그와 동행하던 한국여성에 대한 인종적, 성차별적 발언을 계기로 한국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바 있다. “더러운 X, 왜 외국X 만나고 다니느냐”는 발언은 다음과 같은 인종주의적 신화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일자리를 훔치는 이방인들이 우리의 여성과 안전까지도 훔치고 있다.’ 이 사건은 인종적 편견이 성차별적인 표현으로 또는 성적 편견이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드러나면서, 서로를 강화하고 근거 없는 불안을 재생산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 주었다.

한 장의 사진과 인종주의에 대한 질문
철학자 지젝은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욕망의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다. 두 가지의 인종(주의)적 ‘환상’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인종적 타자가 우리의 향락을 욕망한다고 걱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종적 타자가 어떤 낯선 향락에 도달했다는 불쾌감이 그것이다. 이런 분석에 의하면, 인종과 성의 문제가 욕망의 차원에서 중첩적으로 결합될 때 그 차별적 편견이 가장 폭발적인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지젝의 분석 이전에, 근대적 인종주의 자체와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민족주의의 상관관계를 감안하면 인종주의에 내재한 그러한 정서적 태도는 미루어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번 보노짓 후세인 사건 이외에도, 양주 여중생 살인사건 발생 시 동남아 출신 외국인 일반에 대한 격한 감정적 비난이 그랬다. 또 ‘러브인아시아’의 이슬람 국제결혼 미화 논란에서 방글라데시 남편이 대식구들을 데려와 시중을 들어야 하는 한국인 여성이 불쌍하다는 반응도 이런 정서적 태도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옆의 사진은 미국의 『LIFE』지가 선정한 “역사를 움직인 100장의 사진” 중 한 장의 사진이다. 'Lynching 1930’ 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만 명의 성난 백인 군중들이 교도소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백인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세 명의 흑인 청년을 빼내서는 그 중 2명을 나무에 매달아 죽인다. 같이 기소된 흑인 1명은 희생된 소녀의 삼촌이 결백을 인정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된다. 남북전행 후 남부 재통합 기간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남부에서만 약 5000명의 흑인들이 위와 같은 사적인 처벌(lynch)로 죽임을 당했다. 때로는 이런 장면을 찍은 사진이 백인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우편엽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우리에게 제도적 인종주의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린치(lynch)는 제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심판을 의미한다. 린치의 어원 자체가 미국 독립전쟁 기간에 영국 지지자들을 심판한 비공식 법정을 이끌었던 실존 인물(Charles Lynch, 1736·1796)로부터 비롯된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헌법상 흑인에 대한 비차별 원칙이 확인된 1930년에 벌어진 위와 같은 야만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린치는 말 그대로 제도적 인종주의와는 거리가 먼, 시민들 내부의 인종적 편견에 기인하는 차별에 불과한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간략히 짚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미국의 역사, 법과 제도에 의한 인종주의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포드 사건(Dred Scott v. Sanford)은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 대결의 상징적 사건이다. 당시 미국은 ‘미주리 타협’에 의해 위도 36도를 기준으로 북부는 노예해방을 인정하는 자유주, 남부는 노예제를 고수하는 노예주로 분리되어 있었다. 드레드 스콧은 노예해방을 인정하지 않는 남부 노예주 미주리주의 흑인 노예였으나, 군의관인 주인의 직업상 자유주인 일리노이주와 위스콘신주를 옮겨 다니며 12년을 보내게 되었다. 자유주에 있는 동안 그는 법적으로 자유인이었다. 그 후 다시 노예주인 미주리주로 돌아오게 된 스콧은 자유주에 있을 때 이미 자신의 노예 신분은 무효가 되었으므로 자유신분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이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미국 헌법에 의해 흑인은 미국시민이 아니므로 노예인지 자유인인지 여부를 떠나 흑인은 연방대법원에 제소할 권리가 없고, 또한 노예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므로 재산권을 침해하는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이 판결을 계기로 노예제도와 인종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의 정치적 대결은 극에 달하고, 결국 남북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남북전쟁(1861~1865)의 결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수정헌법 제13조(1865), 시민권의 평등 보장에 관한 수정헌법 제14조(1868)가 통과된다. 그러나 미국의 흑백 인종차별은 노예제 폐지만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링컨 암살 이후, 앤드루 존슨 정부의 보수적 성향에 편승해 남부는 짐크로우 법을 제정해 흑인을 예속 상태에 묶어두려 했다. 짐크로우법은 흑인이 백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백인들과 같은 식당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흑인은 호텔, 병원, 극장은 물론 스포츠 경기에도 백인들과 동등하게 함께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수도꼭지도 함께 쓸 수 없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여러 차례 남부의 짐크로우법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린다. 대표적인 판결은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Plessy v. Ferguson)의 판결이다. 철도회사가 백인과 흑인 승객의 객차를 분리한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러한 조치가 ‘분리하지만 평등한’(separate but equal) 대우를 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합헌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분리평등의 원칙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입장은 1954년의 브라운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he City of Topeka) 판결에서 번복되기까지, 노예제도가 폐지되고도 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미국 남부에서의 흑인 차별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는 불법과 차별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법과 제도였음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미국 이민사에서 초기 백인 이민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종적 타자들에게 법은 노예화, 배제,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위의 짐크로우법과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외에도, 1882년의 중국인배제법률(Chinese Exclusion Act)에서부터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주법, 그리고 이주민들의 복지혜택을 박탈하는 1997년 클린턴 정부의 정책에 이르기까지 미국 이민법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법에 새겨져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불평등의 뿌리 깊은 흔적은 쉽게 드러난다.


위 사진이 담고 있는 1930년의 린치 사건은, 노예제 폐지 이후 헌법상의 실질적 평등이 이루어지기 전의 단절과 그 간극을 제도적 인종주의로 보충하던 시기의 산물이다. 법과 제도 내부에 뿌리박은 인종적 편견들이 사회에 방류되어 차별의 씨앗을 뿌리고, 그 편견이 제도로부터 나와 개인에게 되먹임(feedback)되는 과정에서 사적 차별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제도 외부에서의 사적 심판과 처벌인 린치는 당시의 제도적 인종주의로부터 뒷받침되고 강화된 것이며 이를 보충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법과 제도의 인종주의


2009년 한국의 보노짓 후세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인종·성차별적 발언은 제도적 인종주의와 무관한 한 개인의 편견이 돌출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다. 그 발언은 여전히 한국의 제도적 인종주의의 실천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으며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열린사회”를 구축한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비전을 실현하는 목표·전략·정책은 모두 근본적으로 차별적이다. 정부가 통합적 이민정책의 명분으로 추진하는 내용은 ‘두 외국인 전략’(two-foreigners strategy)에 기초한 국가주의·민족주의적 배제와 통합이다. 자본과 기술을 갖춘 고급인력을 국익과 경제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재외동포와 결혼이민자를 민족과 국민으로 포섭하고, ‘단순노무인력’과 ‘불법체류자’를 적극적인 통제·관리의 대상으로 배제해나가는 기본정책이 확고하게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에서 피부색은 경제적 능력 또는 계급을 구분하는 상징적 구분선이다. 동남아인에 대한 경멸과 서양인에 대한 컴플렉스는 동전의 앞뒷면으로 제도와 사회적 인식 속에 함께 뿌리내리고 있다.

국적법, 귀화, 이중국적의 문제


제도적 인종주의 대표적 사례로는 국적제도를 들 수 있다. 한국의 국적법이 제정 당시부터 ‘부계혈통주의’를 규정하였다는 점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도 상징적이다. 자국민과 외국인의 성적 결합에 관한 법적 처리를 둘러싸고 존재했던 젠더 불평등의 문제는 근대적 인종주의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말이다. 가령 식민지 경험을 통해 근대적 인종주의를 성립해간 유럽에서 백인 남성과 유색인종 여성 사이의 결합은 적극적으로 장려된 반면, 그 반대의 경우 백인 여성은 시민권을 상실하고 민족 전체의 모욕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한국의 국적법이 부모양계혈통주의로 개정된 것은 1997년의 일이다. 법 개정으로 성차별적인 국적 실무가 적극적으로 개선된 것은 아니다. ‘농촌 총각과 결혼한 필리핀 새댁’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결혼이민자에 대한 시선은 남성 결혼이민자의 문제를 비가시화한다. 실무적으로는 여전히 부계혈통주의의 뿌리가 깊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귀화의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 국적법에서 정한 ‘품행이 단정할 것’이라는 요건 역시 결코 젠더 중립적 의미의 규정이 아니다. 품행 단정 요건은 여전히 여성 결혼이민자의 순결을 스크린하고 그 결과를 민족적 순혈주의 정서로 되먹이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귀화제도를 통한 국적의 부여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는 것이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미래적 평가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품행이라는 모호한 방식의 평가를 기초로 하는 과거 판단의 문제, 상벌의 문제로 전치된다. 6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아이를 낳고 현재까지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조선족 여성에게 결혼 초기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회의 성매매 사실을 이유로 귀화를 인정하지 않은 최근의 판결은 인종적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법무부는 최근 글로벌 인재와 해외 입양인에게 복수국적(이중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의 국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글로벌 시대에 다중적 정체성을 허용해 나가자는 방향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 기본적인 성격과 범위에 있다. 개정안은 복수국적 용인의 주요 대상을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외국인 우수인재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적을 부여한다고 외국의 우수인재가 유치될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중국적의 문제를 고려했다면, 우선적으로 국적으로 인해 삶의 조건이 왜곡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정안의 복수국적 용인의 대상에 한국 거주 화교, 결혼 이민자, 다문화 가정 자녀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가령 화교의 경우는 해방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대표적인 한국사회의 이방인이다. 분단과 냉전 이후의 이데올로기적 차별에 더해, 화교의 경제권 장악을 견제하려는 차별은 집요한 것이었다. 가령 1973년 중국 음식점들에게만 내려졌던 ‘쌀밥판매금지령’과 같은 차별적 조치가 대표적이다. 스스로의 상징적 뿌리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본국의 국적을 유지함으로써 최소한의 유대를 지켜온 이들에게 이중국적 부여를 모색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반성이자, 이중국적 제도 자체의 취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또한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대표적인 선천적 이중국적의 사례다.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국적선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중정체성을 인정하고 교류의 자원을 삼는 지혜야말로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법무부는 이들을 복수국적 용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유가 이중국적에 대한 국민 정서적 반감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반감은 이중국적이 일부 특권층을 위한 제도적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는 것 때문이다.


이번 국적법 개정의 근본 성격은, 해외 입양인을 포함시켜 명분을 쌓기는 했지만,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국경을 개방하는 것이다. 여전히 특권층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속의 나라’는 정반대다. 태국은 2003년 정부 주도로 해외의 주요 고객들(VIP)에게 엘리트 카드(Thailand Elite Card)를 판매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약 3만 달러의 가격에 판매된 이 카드는 5년의 체류비자를 보장하는 일종의 ‘국가 멤버십 카드’로, 회원에게는 출입국상의 편의와 함께 골프, 사우나 등의 최고급 서비스를 평생 무료로 제공하는 혜택을 부여했다. 태국의 사례를 조금만 순화시켜 밀고 나가면, 우수인재유치를 위한 복수국적 용인이라는 법무부의 개정안이 나온다.

고용허가제, 사업주에 대한 철저한 예속


최근 이주노동자의 체류기한을 5년으로 연장하는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노동부는 현행 3년의 체류기간을 사업주가 요청하는 경우에 한해서 1개월의 출국 후 재입국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최대 2년간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러한 개정안에 대해 인권단체는 이러한 방식은 사업주에게만 일방적으로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며, 사업주에게 부과된 재고용의 독점적 지위로 인하여 사업장에서 이주노동자의 고용 종속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이러한 개정은 기존의 종속적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근로조건의 악화로 이어질 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자의 요청’이라는 부가적 조건 없이 이주노동자의 체류기한을 5년으로 연장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정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체류기한을 5년으로 연장할 경우 이주노동자가 영주자격을 신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주자격 신청의 가능성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이라면, 체류기간을 5년 미만으로 설정해서라도 사업주에게 독점적 지위를 부과해서는 안 되며, 개정안대로 법률이 확정될 경우에는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사업주를 소개하는 브로커가 양산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법률은 정부의 개정안대로 통과되었다.


‘해외우수인재’에게는 특별한 조건 없이 국적을 부여하고 복수국적을 용인할 수 있지만, ‘저임금 대체 인력’에게는 최대 5년의 체류기간도 허용할 수 없다는 정부의 정책은 제도 내부의 인종주의가 철저하게 계급적·경제적 관점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또한 위의 국적법 개정과 이 사례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주인과 하인이 누구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형식적으로는 신분제도를 폐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경(국적)과 체류자격은 새롭게 글로벌 신분을 창설하는 경계선이 되어가고 있다. 국경과 국적이 경제적 지위와 능력의 차이에 따라 비대칭적이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국경은 인종적, 계급적 경제선이자 경제적 경계선이기도 하다. ‘부자에게는 VISA와 자유, 풍요로운 신세계를!’ 태국 엘리트 카드에 담긴 메시지는 바로 그런 것이었고, 대부분의 이민 정책도 그 노골적 메시지와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글로벌 드림’은 세계화의 주인들에게만 허용되는 꿈이다.

통치전략으로서의 인종주의적 동원


복지국가에서 경찰국가로의 변화는 신자유주의 시기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설명된다. 국가는 시장의 불안과 불평등한 결과에 개입해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국가적 정당성을 포기하고, 다른 영역에서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 “국가가 경제적 영역으로부터 물러나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형사적 개입의 확대와 강화”로 변화시킨다. 시장에서의 ‘작은 국가’가 치안을 명분으로 ‘큰 국가’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다. 높은 실업률과 사회적 안전망의 해체 등으로 국민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그 결과 사회적 불안감이 팽팽해지며 간혹 일탈적 범죄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는 사회적 불안의 원인이 범죄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전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치안 공백을 막고 사회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분과 계획을 세운다.


이때 사회의 불안을 전가하는 가장 ‘편리한 표적’은 내부의 이주민들이다. 이주민에게는 범죄자, 슬럼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부과되고, 사회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가정된다. 2005년의 프랑스 소요 사태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사건의 근본에는 범죄자로 낙인찍혀 게토화된 공간에 폭력적으로 격리된 아랍 출신 이주민들의 역사적 삶이 있었다. 그들의 삶에 쌓인 분노와 증오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은 프랑스 정부의 폭력적 대응이었다. 이 사건은 주권이 어떻게 사회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가정되는 내부의 적 혹은 위험한 계급들을 만들어 내고 낙인찍음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방식의 이주민에 대한 국가적 동원은 2008년 한국의 마석에서 재현되었다. 마석에서의 대대적인 단속 사태는 ‘불법체류자’라는 편리한 표적을 통해서 사회의 불안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경찰국가적 징후들이 한국 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

왜 인종주의를 주목하고 경계해야 하는가


프랑스 국민전선 등 유럽에서 극우파의 성장은 새로운 ‘내부의 적’으로서 이민자를 동원하는 것에 있다. 더 이상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선으로부터 통일성을 창출할 수 없게 되자, 정치의 전선을 가르는 적과 친구의 부활이 낡은 적대의 형식을 빌려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전선의 부재는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들을 접합하려는 극우파에 점령지반을 내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사회 또는 이민사회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정치적인 논의는 실종된 채 정부의 행정기술 관료들만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민정책의 문제는 매우 논쟁적이고 갈등적인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문제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통합적 이민정책의 명분으로 은폐되고 봉합되어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가시화되고 있는 인종적 편견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아직은 그 존재와 영향력이 미약하지만 조직화된 형태의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정부 정책에 일정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정황도 발견된다. 낮은 수준이라도 이미 인종주의를 분할선으로 하는 새로운 적대의 전선이 희미하게나마 그어지고 있음을 포착해야 한다. 갈등과 문제점들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제도적 인종주의의 문제를 포착하여 실천적 논의의 지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글_정정훈 변호사

이 글은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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