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국사회] 루저 / 김규항 
 
한 여자 대학생이 텔레비전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며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해서 큰 소란이 났다. 나는 포털의 메인 화면에 뜬 기사를 보고 그 일을 알았는데 내가 본 기사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는 예의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낱말까지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스펙이 좋다면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두 번째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단지 내 기억력이 신통치 않아서가 아니라 매우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터넷 마녀사냥 시비가 날 만큼 일파만파 퍼져나갔지만, 두 번째 이야기는 마치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양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라진 이야기에 공감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이야기도 그 절반, 즉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부분은 사라져버렸음을 알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역시 공감한 것이다. 결국 남은 건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뿐인데 그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루저라는 말에 발끈했지만 그 반발엔 꽤 중요한 사회적 맥락이 들어 있다.

이제까지 대놓고 외모를 상대 성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말하거나 경쟁력 없는 외모를 가진 상대 성에 대한 경멸을 공공연히 표시하는 건 남자만의 권리였다. 이를테면 경쟁력 없는 외모를 가진 여자에 대한 경멸은 오늘 한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지존이라는 <개그콘서트>엔 아예 그런 캐릭터만 전담하여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여자 코미디언이 있으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여자를 보면서 웃는다.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은 그 공고한 체제에 대한 도발이었다. 그 여대생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 내용이 바람직하든 않든, 매우 중요한 사회적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같은 이야기도 미국의 마돈나가 하면 사회적 도발이 되고 한국의 여대생이 하면 골 빈 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여대생의 사회적 도발은 그뿐이 아니다. 그 여대생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생생히 알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그 여대생은 우리가 사람을 됨됨이가 아니라 스펙으로 평가하며,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숨기려 들지 않을 만큼 닳고 닳은 사람들임을 알게 해주었다. 양식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오늘 이명박 반대를 외치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은 내가 왜 ‘우리’에 포함되는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명박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말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가?

글이나 말, 혹은 기사나 성명서 따위 말고 실제 삶에서 말이다. 하긴 다른 구석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이명박을 지지하는 부모들은 편안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지만 이명박을 반대하는 부모들은 매우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교육 목적이 인간이 아니라 스펙이라는 점은 같지만 표정만은 정말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 이명박을 반대한다면 그래서 이놈의 세상을 눈곱만큼이라도 바꾸고 싶다면, 우리가 이명박과 다른 사람이어야 하고 우리 아이를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키워야 한다.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이명박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일 뿐이다. 여전히 억울하게 느껴지더라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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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품는다

나무 한 그루 심고
그것들 나날이 자라 이젠
영 딴 모습으로 열매 맺었다
자랑하는 이 있더라만

가슴 속에 심은 것은 그렇게
함부로 자라거나 변하지 않아서
차라리 바위덩어리 하나
가슴 속에 품은 사람도 있네

잘생긴 나무들 울창하게 우거져
발 딛을 틈 없는 세상에서
나도 푸르른 나무 한 그루 자랑스럽게 품는 날
꿈꾼 적 왜 없겠냐마는
 
똥과 함께 묵정밭 거름으로 뒹굴어도
아무 뿌리나 선뜻 받아 함부로 품지 않는
흙이 먼저 되기를.
한 번 품으면 영영 뒤집을 줄 모르는
뚝심 좋은 흙이 먼저 되기를

세월의 이끼 싯푸르게 더께 낀
바위 덩어리 하나, 끝끝내
품고 사는 미련도 있는 것이다

(박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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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사회 디자인 / 김규항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따라 부의 격차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그 격차는 지나쳐선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평범한 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이건희씨의 재산만큼 벌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50만년을 모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격차로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큰 틀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즉 사회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작업도 결국 그 격차를 최소화하는 것, 어떻게 하면 부자들의 돈을 빼서 가난한 약자들의 삶을 괼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출발한다.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그걸 해결하려던 현실 사회주의가 일단 퇴장한 오늘, 우리 앞엔 대략 두 가지 사회 디자인이 제출되어 있다. 첫째는 기부나 자선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식 사회 디자인이다. 빌 게이츠 같은 이가 엄청난 거액을 기부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들은 제 아이에게 말한다. “부자가 되어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단다.” 그러나 미국식 사회 디자인은 부자들의 일방적인 의사로 운영된다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알다시피 세상엔 남을 위해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는 부자가 훨씬 더 많고, 천사 같은 얼굴로 내놓다가 제멋대로 돈줄을 끊어버리는 부자도 많다.

세금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식은 그런 결함을 상당 부분 보완한 사회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거액을 기부한 부자가 사회적 영웅이 되고 가난한 약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 부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든 사악한 마음을 가졌든, 내고 싶든 내고 싶지 않든 상관없이 내야 한다. 그들이 내는가 안 내는가, 혹은 얼마를 내는가를 결정하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다. 사회적 약자들은 그 부자들을 의식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다는 얼굴로 사회적 도움을 받는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닌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사회에 더 많은 돈을 내놓는 건 말이다. 또한 사회 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살아온 사람이, 말하자면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심지어 병역의 의무도 이행해온 사람이 삶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대체 왜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군대를 가야 하는가? 미국식 사회 디자인은 바로 그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비굴하게 구걸하게 만드는 부자들의 쇼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는 이미 미국식으로 접어들었다. 그 흐름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박원순씨일 게다. 그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며 부자들과 손잡고 일해왔다. 그러나 얼마 전 국정원의 명예훼손 소송에 대응하여 발표한 그의 글은 그의 사회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드러낸다. “(이명박 정권 이후)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를 드나들었던 기업인들이나 대기업의 임원들은 철새처럼 모두들 날아갔습니다. 다시 원점에 섰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게 대통령 후보 시절까지도 돈독한 사이였다는 이명박씨의 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의 사회 디자인에 있다. 양식을 가진 사람 가운데 박원순씨의 인간적 진정성과 사회적 헌신을 의심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의 실패, 지난 10년 이상 우리 사회의 의인이자 대표적 사회 디자이너로 추앙받아온 그가 부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한겨레 200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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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서울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면

이 양반 머리가 돌았구만 할 테지

그래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하는 수 없지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아니 그래도 나는 간다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고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고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
 
38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것이라고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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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수잔 벅 모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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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역사’의 역설

“엄밀한 의미에서 신화와 역사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적 역사’라는 말은 형용모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역사가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신화로 기능하는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역사’라는 용어는 앞서 살펴본 ‘자연사’라는 용어 자체가 지닌 역설과도 같다.

역사를 예정된 어떤 것, 혹은 불가피한 운명과도 같은, 즉 신화와 같은 것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은 주술이나 종교가 맹위를 떨치던 중세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화와 같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신의 세계관에 대한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한 계몽주의 시대에 이러한 신화적 역사가 견고해 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또 하나의 역설이다. 테크놀로지는 “진보”에 대한 맹목적 신념을 조장하는 비과학을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은 역사를 신화하하는 진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진보 이념을 제거한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원칙은 진보가 아니라 현실화”로 보았다. 현실화는 역사에서의 진보라는 신화적 이미지를 벗겨내는 것, 즉 역사가 진보하지 않았음을 밝힌다는 의미이자 계급착취와 물신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진보(산업, 기술의 발전)와 역사의 진보는 동의어일 수 없고, 오히려 자연의 진보는 현실을 은폐함으로써 역사를 퇴보시켰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벤야민은 역사가 저절로 진보한다는 신화, 특히 사회진화론을 공격 대상으로 삼으며 줄곧 역사의 진보를 부정한다. 더욱이 인류역사를 발전과 진보의 역사로 보는 맑스의 시각 역시 비판하며, 노동계급 스스로 산업과 기술의 진보를 계급진보와 동일시하는 환상을 “어떻게 노동자의 것이 아닌 (공장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자연과 역사의 혼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자연의 진보(산업과 테크놀로지라는 새 자연)를 역사의 전진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란 엄밀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텍스트를 통해 그의 ‘역사’ 개념을 유추해보면 역사란 “프롤레타리아 혁명”(p93)을 통한 “생산관계의 차원에서 계급착취의 변동”(p113)과 같은 계급관계의 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먼지가 쌓여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진보 이데올로기와 물신주의의 환등성이 계급대립을 은폐하고 사회적 평등의 환상을 만들어내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상품자본주의에 복속시켜 혁명적 잠재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역사는 퇴보한 것이다. 결국 역사 진보의 신화는 역사 진보를 가로막고 퇴행시킨다.

벤야민은 역사의 진보를 말하는 맑스주의를 일견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결국 맑스주의와 대립하거나 모순적인 것으로 몰고 가지는 않는다. 사실 벤야민의 역사에 대한 정의 자체가 맑스에게서 온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의 진보(자본주의의 심화라고도 할 수 있을 산업/기술의 진보)를 노동자 계급진보로 보고 계급의식과 착취관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따귀를 때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작가의 역할(p40)을 자임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 진보의 신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역사의 이미지에서 진보와 발전의 흔적을 몰아버리고자 했던 벤야민은 기실 그 누구보다도 역사의 진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각과 혁명에 의해서만 진보할 수 있는 역사.

물신성 / 진보의 환등상

벤야민은 19세기 파리가 어떻게 역사진보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고착화하는지를 본다.
파리는 화려함과 사치를 두른 거울도시로 “사람들의 이미지를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 반영했으며, 그러면서 거울 이면에 존재하는 계급관계와 생산관계를 은폐”한다.
이곳 파리의 아케이드는 “상품자본주의의 원조 신전”이고, 만국박람회는 “향락산업”의 원조이지만 “미래의 세계 평화와 계급 화합과 풍요를 자체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신화적인 힘으로 제시”되고, “대중을 위한 혁명 없는 사회진보의 약속”을 속삭인다.
따라서 아케이드나 만국박람회, 도시계획과 같은 진보의 환등상의 원형식들은 역사 진보의 믿음을 생산하고 고착시키며 계급모순을 은폐시킨다.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적 교훈을 습득하지 못하고 “자기 계급이 생산했지만 소유할 능력이 없는 진기한 상품을 구경”하고, “자기 계급을 대체할 기계에 경탄”하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의 저항 이미지(Counter image)들은 저항적인가

먼지, 취약성, 유행, 불임, 죽음, 하계의 파리, 반복, 죄, 권태는 “근대성에 대한 환등적 이해를 야기하는 개념 성좌를 폭파하는 간과된 자잘한 모티브들”이자 진보담론의 대립항들이다.

역사에 먼지가 쌓여있다는 그의 알레고리는 노동계급에 쌓인 먼지도 날려줄 수 있는가?

새로운 유행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새로움은 해방적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그의 통찰은 해방적 해결책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 새로움의 시대, 물질적 풍요의 시대, 화려함의 시대가 천국이 아닌 지옥이라는 자각은 퇴보하는 역사에서 저항의 동력을 제공하는가?

저항 혹은 혁명의 전제조건이 노동자계급의 계급모순과 착취관계에 대한 자각이라고 본다면 벤야민이 저항 이미지들을 통해 진보가 신화에 불과함을 증명함으로서 역사를 현실화하고자 한 시도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것이다. 다만 그의 따귀를 맞고 깨어난 아이가 울음만을 터트릴 것인지(지옥 속에서의 비관?) 달리는 열차위에 뛰어들 것인지(저항 혹은 혁명?) 아직은 불확실해 보인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제2부
4. 신화적 역사 : 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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