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수잔 벅 모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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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역사’의 역설

“엄밀한 의미에서 신화와 역사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적 역사’라는 말은 형용모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역사가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신화로 기능하는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역사’라는 용어는 앞서 살펴본 ‘자연사’라는 용어 자체가 지닌 역설과도 같다.

역사를 예정된 어떤 것, 혹은 불가피한 운명과도 같은, 즉 신화와 같은 것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은 주술이나 종교가 맹위를 떨치던 중세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화와 같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신의 세계관에 대한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한 계몽주의 시대에 이러한 신화적 역사가 견고해 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또 하나의 역설이다. 테크놀로지는 “진보”에 대한 맹목적 신념을 조장하는 비과학을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은 역사를 신화하하는 진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진보 이념을 제거한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원칙은 진보가 아니라 현실화”로 보았다. 현실화는 역사에서의 진보라는 신화적 이미지를 벗겨내는 것, 즉 역사가 진보하지 않았음을 밝힌다는 의미이자 계급착취와 물신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진보(산업, 기술의 발전)와 역사의 진보는 동의어일 수 없고, 오히려 자연의 진보는 현실을 은폐함으로써 역사를 퇴보시켰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벤야민은 역사가 저절로 진보한다는 신화, 특히 사회진화론을 공격 대상으로 삼으며 줄곧 역사의 진보를 부정한다. 더욱이 인류역사를 발전과 진보의 역사로 보는 맑스의 시각 역시 비판하며, 노동계급 스스로 산업과 기술의 진보를 계급진보와 동일시하는 환상을 “어떻게 노동자의 것이 아닌 (공장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자연과 역사의 혼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자연의 진보(산업과 테크놀로지라는 새 자연)를 역사의 전진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란 엄밀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텍스트를 통해 그의 ‘역사’ 개념을 유추해보면 역사란 “프롤레타리아 혁명”(p93)을 통한 “생산관계의 차원에서 계급착취의 변동”(p113)과 같은 계급관계의 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먼지가 쌓여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진보 이데올로기와 물신주의의 환등성이 계급대립을 은폐하고 사회적 평등의 환상을 만들어내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상품자본주의에 복속시켜 혁명적 잠재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역사는 퇴보한 것이다. 결국 역사 진보의 신화는 역사 진보를 가로막고 퇴행시킨다.

벤야민은 역사의 진보를 말하는 맑스주의를 일견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결국 맑스주의와 대립하거나 모순적인 것으로 몰고 가지는 않는다. 사실 벤야민의 역사에 대한 정의 자체가 맑스에게서 온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의 진보(자본주의의 심화라고도 할 수 있을 산업/기술의 진보)를 노동자 계급진보로 보고 계급의식과 착취관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따귀를 때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작가의 역할(p40)을 자임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 진보의 신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역사의 이미지에서 진보와 발전의 흔적을 몰아버리고자 했던 벤야민은 기실 그 누구보다도 역사의 진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각과 혁명에 의해서만 진보할 수 있는 역사.

물신성 / 진보의 환등상

벤야민은 19세기 파리가 어떻게 역사진보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고착화하는지를 본다.
파리는 화려함과 사치를 두른 거울도시로 “사람들의 이미지를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 반영했으며, 그러면서 거울 이면에 존재하는 계급관계와 생산관계를 은폐”한다.
이곳 파리의 아케이드는 “상품자본주의의 원조 신전”이고, 만국박람회는 “향락산업”의 원조이지만 “미래의 세계 평화와 계급 화합과 풍요를 자체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신화적인 힘으로 제시”되고, “대중을 위한 혁명 없는 사회진보의 약속”을 속삭인다.
따라서 아케이드나 만국박람회, 도시계획과 같은 진보의 환등상의 원형식들은 역사 진보의 믿음을 생산하고 고착시키며 계급모순을 은폐시킨다.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적 교훈을 습득하지 못하고 “자기 계급이 생산했지만 소유할 능력이 없는 진기한 상품을 구경”하고, “자기 계급을 대체할 기계에 경탄”하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의 저항 이미지(Counter image)들은 저항적인가

먼지, 취약성, 유행, 불임, 죽음, 하계의 파리, 반복, 죄, 권태는 “근대성에 대한 환등적 이해를 야기하는 개념 성좌를 폭파하는 간과된 자잘한 모티브들”이자 진보담론의 대립항들이다.

역사에 먼지가 쌓여있다는 그의 알레고리는 노동계급에 쌓인 먼지도 날려줄 수 있는가?

새로운 유행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새로움은 해방적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그의 통찰은 해방적 해결책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 새로움의 시대, 물질적 풍요의 시대, 화려함의 시대가 천국이 아닌 지옥이라는 자각은 퇴보하는 역사에서 저항의 동력을 제공하는가?

저항 혹은 혁명의 전제조건이 노동자계급의 계급모순과 착취관계에 대한 자각이라고 본다면 벤야민이 저항 이미지들을 통해 진보가 신화에 불과함을 증명함으로서 역사를 현실화하고자 한 시도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것이다. 다만 그의 따귀를 맞고 깨어난 아이가 울음만을 터트릴 것인지(지옥 속에서의 비관?) 달리는 열차위에 뛰어들 것인지(저항 혹은 혁명?) 아직은 불확실해 보인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제2부
4. 신화적 역사 : 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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