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숫자가 아니랍니다

 이금희 방송인 (경향신문 2009.12.20)


수업시간이면 번호를 불러 학생에게 질문하던 선생님이 계셨다. “오늘이 17일이니까 7번이 대답해 봐라.” “다음 문제는 17번!” 그 선생님 수업 시간이면 날짜와 내 번호를 맞춰보고 안도하거나 걱정했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 선생님 성함은 잊었지만 수업 분위기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은 생각난다.

그때 일은 이즈음 겪는 것에 비하면 낭만적이었다. 은행에 가도, 병원에 가도, 극장에 가도 우리는 번호로 불린다. 부르는 것도 생략하고 ‘딩동’하는 호출음만 울린다. 작은 전광판에 번호가 뜨면 창구로 가서 표를 사거나 업무를 보면 된다. 기계적이고 사무적이고 의례적이다. 창구 직원의 미소마저 차가운 듯하다. 그들에게 나는 368번째 손님일 뿐, 짧은 순간이라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닌 듯싶어서다.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문제로 한바탕 설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청취자들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소개할 때면 “휴대전화 끝 번호 1234를 쓰시는 분께서 신청하신 곡입니다”라고 말하는 내 진행방식에 한 청취자가 와락 짜증을 냈다. “꼭 그렇게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들을 때마다 좀 거슬리네요. 다른 프로그램처럼 1234님이라고 하시면 간편하고 좋잖아요.”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그 내용 뒤에 이런 말을 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숫자로 사람을 부르는 것은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하는 방식입니다. 번호가 곧 그 사람은 아니니까 ‘1234님’이 아니라 ‘끝 번호 1234 쓰시는 분’이 맞는 거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자메시지로 의견을 보내주세요.”

그랬더니 평소에 비해 두 배나 많은 사연이 날아왔다.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렇게 읽을 때면 너무 답답해서 채널을 확 다른 데로 돌려버립니다”라는 의견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휴대전화 끝 번호 ○○○○ 쓰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3~4초를 못 견디겠다, 무조건 간단한 게 좋다는 사람들도 예상외로 꽤 많았던 셈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휴대전화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인터넷망이 전국 방방곡곡 누비고 다니면서였을까. 내 나이 또래가 대부분 그렇듯 나도 ‘라디오 키드’였다. 매일 밤 FM 방송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노래를 들었고, 그때 한창 유행이던 예쁜 엽서를 방송국에 보내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엽서가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의 느낌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내 이름 석 자를 불러주던 DJ의 음성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하고 솜사탕보다 더 부드러웠다.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 고유한 삶의 이력과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이룬 구체적인 개인이다. 결코 숫자로 호출될 수 없는. 그런데도 우리를 번호로 부르는 것은 쉽게 다루려고 그러는 것 아닐까. 편리하게 관리하거나, 통제 가능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마저 물건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게 아닐는지. 생산 조립 라인에서 만들어져 마트 매장에 진열되는 물건은 관리 대상일 뿐,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똑같이 머리 깎고 똑같이 옷 입힌 죄수들도 통제할 대상일 뿐, 애정의 대상은 아니지 않나.

진중권씨도 <미학 오디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를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렀을까? 우리를 관리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때로는 친구들을 번호로 부르곤 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과, 번호를 부르는 것은 다르다. 친구를 번호로 부를 때 우리는 그를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수인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실시되는 강의 평가에서 늘 최고 점수를 도맡다시피 하는 어느 여교수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단다. “뭐, 별 것 있겠어요.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죠. 강의실에서 만나든 캠퍼스에서 지나치든 항상 이름을 불러줘요. 그럼 아이들이 먼저 다가와서 웃으며 인사해요. 정말이지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는 공장에서 생산되어 트레일러에 실리는 물건이 아니다. 바코드가 찍혀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있다. 거기에는 그렇게 자라기를 바라는, 이름 지은 이의 염원이 담겨있다. 그런 이름을 두고 숫자로 부르고 번호로 취급해버리는 것은,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이름 부르기를 포기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꽃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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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죠.” ‘꿀벅지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스스로 ‘다리가 굵다’는 한 학생이 이런 대답을 해 강의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공감하는 다른 학생들도 꽤 많다. ‘말라비틀어진 것들’만 대접받던 세상에서 미의 기준이 다양화되는 것으로 환영할 만하단다. 성형 역시 미의 획일화가 아니라 미의 민주화라고 한다. 성상품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학생들은 같은 여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스스로가 성적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둔감할 수 있느냐며 울먹거릴 지경이다. 그러자 다른 한 학생이 냉소적으로 응수한다. “저는 그래서라도 팔렸으면 좋겠어요.”

성의 상품화에 대해 둔감해지고 있는 것만도, 성이 개방되고 여성도 성적 주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바닥에는 자신이 한번 팔릴 만한 상품이 되어보지도 못한 채 폐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해서 문제가 아니라 상품으로도 여기지 않는 것이 문제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이십대들에게 누군가가 자신을 새로운 상품적 가치가 있는 이름으로 불러주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모가 ‘보수-관리’해야 하는 스펙의 일종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뚱뚱한 것은 단지 비만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다. 면접을 보는 사람에게 뚱뚱한 응시자는 자기 관리에 실패한 나태하고 방만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이 어떻게 회사를 관리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말을 면전에서 듣고 퇴짜를 당한 선배의 생생한 경험담이 유령처럼 대학가를 떠돌아다닌다. 그러니 모두가 필사적으로 다이어트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혹독할 정도로 다이어트를 이어오고 있는 학생에게 자신의 몸은 저주의 대상이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믿기 때문이다. 식욕을 참지 못해 계획에 없는 간식이라도 먹으면 바로바로 토하는 것은 기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방학이면 다이어트를 위해 모든 친구와 연락을 끊기도 한다. 만나면 뭐든 먹어야 하고, 먹으면 그것이 모두 살로 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몸매 관리 최대의 적은 친구라고 입을 모은다. 자기 몸을 저주하고 욕망을 죄악시하며 친구도 끊어야 하는 것, 이것이 자기 관리 능력의 실체인 셈이다.

대학생들이 관리해야 하는 목록이 점점 더 늘어간다. 학점과 영어 시험에서 시작된 취업 스펙 3종 세트는 자격증과 해외 연수를 거쳐 5종 세트로 발전하였다. 이제 외모 관리와 성형이 포함된 7종 세트다. 그러나 이렇게 필사적으로 자기 관리를 한다고 시장이 이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애초부터 시장은 스펙에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스펙을 요구하는 것이 자기를 개발하는 능력을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턴만 하더라도 대다수는 복사기나 돌리는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전부다. 생생한 직업 체험이나 경력 관리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솔직히 말하자. 스펙은 이 잉여인간의 시대에 ‘자기 관리’라는 도깨비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 아닌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스펙의 실체다. 그러면서 공연히 대학생들의 패기와 눈높이만 타박을 한다. 이 바람에 대학생들의 가랑이만 찢어지고 있다. 당신들은 청년들에게 ‘미안하다’는 단 한마디 말고는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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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용서는 없다> 류승범 “늘 아마추어이고 싶다”

기사입력 : 2009.12.14 15:10조회수 : 8468    




  광 고
 
 


[맥스무비=김규한 기자] 본능적인 연기감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류승범이 30대의 첫 관문으로 영화 <용서는 없다>를 선택했다. 이번 영화에서 그가 맡은 '이성호'는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악역이다. 아무리 연기 잘 하기로 소문난 류승범도 이번 역할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연기를 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지난 12월 2일 <용서는 없다>의 제작보고회가 진행된 날 그를 만나 짧게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촬영까지 포함하여 30분도 안 되는 인터뷰 시간에 류승범의 전부를 알기란 불가능했지만 그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일부 질문에서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답변에 여러 번 놀랐다. 프로보다 성적이 좋은 아마추어로 남고 싶은 류승범은 아직도 꿈을 꾸는 현재진행형의 배우였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더 낫다

배우도 구미가 당기는 시나리오가 있다. 류승범에게 <용서는 없다> 시나리오가 바로 그랬다. 일반적인 스릴러 하고는 다른 느낌에 읽는 순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르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는 시나리오라서 선택하게 됐어요. 비중이 크지 않지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점도 작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요.”

류승범은 작품을 선택할 때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 특별한 기준 같은 것도 없다. 모든 작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대신 운명처럼 다가온 작품에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얼마 전만 해도 작품을 예민하게 고르는 편이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류승범은 자신의 선택에 있어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아쉬움은 찾아오길 마련인데 그런 마음은 최대한 갖지 않으려고 해요.”



모든 사람이 좋아해 줄 영화는 아니다



스릴러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악역이다, 류승범은 ‘이성호’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지르는 단순한 악역이었다면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극중 ‘이성호’라는 인물이 가지고 페이소스가 억지스럽지 않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어요. 굳이 예를 들자면 <세븐>에서 케빈 스페이스가 했던 악역 같은 느낌이었죠. 감정이입을 충분히 할 수 있었고, 관객들에게 그의 행동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류승범은 ‘이성호’라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역할 모델을 따로 두지 않았다. 좋아하는 영화는 수 십 번 넘게 보지만 굳이 챙겨서 보는 스타일은 아닌 그는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성호’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는 완전히 이성호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류승범이라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고 완전히 이야기 속에 묻어가고 싶었죠.”

류승범은 잘못 연기하면 단선적으로 비쳐질 수 있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현장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감독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 뒤 해결했다. “이번 영화에서 내가 보여준 연기에 점수를 매기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부분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장르영화 특성상 모든 사람이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용서는 없다>는 공감할 관객과 공감하지 못할 관객이 명확하게 나누어 질 영화에요. 하지만 이런 장르를 싫어하는 사람도 개인적 취향을 버리고 보면 분명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대중이 자신에게 바라는 이미지, 그리고 배우로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 사이에서 그는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배우가 재미없게 연기하면 그게 다 보이거든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내 안에 영화배우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요.” 자신에게 기회가 오면 하고, 자신에게 오지 않은 기회에 대해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는 그는 배우라는 일을 무척이나 즐기는 듯 보였다.



늘 아마추어이고 싶다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표현한 그는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늘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배우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려고 하죠.”라고 말했다. “연기가 좋기 때문에 끝까지 프로이고 싶지는 않아요. 아마추어인데 프로보다 성적이 더 좋은 경우가 있잖아요. 배우 류승범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류승범은 작품을 선택할 때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항상 긴장하면서 살고픈 그는 자신에게 편안함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 자신을 나태하게 만들기는 싫어요. 그래서 늘 긴장된 상태로 살려고 해요.”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고 공감하게 만드는 작품에 매력을 느끼는 그는 캐릭터를 만들어 갈 때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참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를 많이 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아닌 것 같아요. 흉내를 잘 내는 편인데, 다른 사람을 흉내 내게 될까봐 잘 안 봐요.”

하고 싶은 일은 해야지 적성이 풀리는 그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는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설계, 계획 같은 것은 믿지 않아요. 오히려 그런 것을 세우지 않을 때 좋은 결과를 얻는 편이었어요.”

외국에 진출한 한국 배우들이 자랑스러웠다

외국에 진출한 한국배우들을 보면서 류승범은 부러운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 내 일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어요. 내게도 기회가 온다면 하겠지만 억지로 준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뭐가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내 운명을 개척하는 게 맞는 건지 찾아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는 게 맞는 건지 고민 중이에요.”



류승범은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직도 낯선 그는 “운이 좋게 사랑을 많이 받는 편”이라고 말했다. “사랑을 주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가 않아요. 미생물 보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을 대해요.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내가 가진 것에 비해 주변 사람들이 너무 큰 사랑을 주어서 늘 고마울 따름이에요.” 사랑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는 돈과 명예, 사랑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주저 없이 ‘사랑’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있는 척 하려고 사랑을 택했어요. 하지만 돈, 명예보다 중요한 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달라졌죠.”




류승범도 예능프로에서 얼굴을 보기 힘든 배우 중 한 명이다. 예능프로에 잘 나기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19세 이상을 위한 예능프로가 있으면 나갈 생각이 있어요.”라고 웃으면서 답했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아무리 입담이 좋다고 해도 영화 현장에 가면 떨릴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 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단거리 선수가 장거리까지 잘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자신이 잘 하지도 못하는 곳에 가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아요.”

내일 죽더라도 쿨하게 죽고 싶다



즐기면서 일을 하는 사람을 당해낼 선수는 없다. 누구보다 잘 놀 자신이 있다고 말한 그는 배우라는 일도 놀이처럼 즐기면서 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평생 놀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돈을 버는 이유도 놀고 싶기 때문이고요. 저 같은 경우 내일 노는 것을 꿈꾸지 않고 지금 노는 편이에요.(웃음)" 미래보다 지금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류승범은 억지로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순간이 주는 행복함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그에게 미래의 보장된 행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류승범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감정지수가 높은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올해가 되면서 다시 원점이 되어 버렸어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수도 많아진 것 같고요.”

류승범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최종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는 “꿈을 정해두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목표 같은 것은 없어요. 다만 행복하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내일 죽더라고 아쉬움 없이 쿨하게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아직 운명적인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뮤지컬은 노래 실력이 없어서 도전해 볼 용기가 나지 않지만 류승범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연극은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도 똑바로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매체에 욕심이 가지고 싶지는 않아요. 기회가 오면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류승범에게 배우라는 일은 천직이기 이전에 하고 싶은 일이다. “배우 류승범보다 더 커지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거기로 가겠죠. 하지만 그런 순간이 오기까지는 배우 류승범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역사가 기억하고 있는 위대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잖아요. 내 인생을 바꿀만한 운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연기를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배우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운명적인 작품이 자신을 변화시켜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 자리에서 운명적인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아직도 배우라는 길을 걷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아요.” 류승범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생각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내 생각과 의지대로 되지 않더라도 재미있게 작업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도 많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아요.”


  • 사진: 권구현 기자

    국내최대 영화포털 맥스무비 www.max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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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대신 걱정 끼쳐 죄송…
    예능 대신 자꾸 시사프로 섭외 와요
    몸 아파 한의원 갔더니 화기 때문에 장 약해졌다고
    돌아가신 분께 예 표한 게 정치적이라면 할말 없어
    사회 중추적인 분들 사고가 그 정도라 생각 않고파
     
     
    한겨레 권복기 기자 김미영 기자 김명진 기자
     








     

     
       





    ‘KBS 하차’ 개그맨 김제동

    김제동(35)씨는 요즘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산을 좋아해 자주 가거든요. 예전에는 산길에서 저를 만나면 그냥 웃고 지나들 가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자꾸 먹을 것을 주세요. 시장에서는 상인분들이 물건을 더 주시고요.”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위로받는 현실이 조금은 당혹스럽다.

    2008년 2월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식전행사 때 마이크를 잡았다. 교회에 다니는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날 노제 무대에 섰다. 4개월여 뒤 그는 <한국방송>의 ‘스타골든벨’ 메인 엠시를 느닷없이 그만둬야 했다. 방송사의 설명은 석연치 않았다. 논란이 일었다. 국회에서까지 그의 ‘하차 배경’을 두고 여야 사이에 정치적 공방이 벌어졌다. 그는 침묵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뒤 그를 만났다. 그는 ‘퇴출’에 대해 “내 책임이 97%”라며 자기반성이 먼저라고 말했다. 노제 사회와 관련해 그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영결식과 같은 국가적 행사에 사회자로 서는 일을 “도리”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보는 “몰상식한 사회지도층의 존재”에 대해서는 믿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3%의 가능성은 남겨뒀다.

    웃음에는 좌우가 없다는 그. 살아 있는 한 웃음을 주는 일을 하겠단다. 방송 일도 더 하고 싶다. 하지만 “넘어진 김에 꽃 보고 간다”며 그는 방송 아닌 다른 공간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가슴 뛰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12월5일부터 한 달 동안 대학로 이랑씨어터에서 열리는 토크 콘서트 ‘노 브레이크’다. 2년 전부터 꿈꿔온 일이다.

    김제동씨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웃음을 줘야 할 사람이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그 ‘사건’에 대해 그동안 그 자신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몸이란 놈은 생각보다 고지식하다. 몸은 마음이 겪는 일을 꼭 드러낸다. 김씨는 얼마 전 장염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몸을 추스르려 찾은 한의원에서는 화기로 인해 장부가 약해졌다고 했다. 속이 상하긴 상했나 보다.


     

    » 스스로를 ‘웃음을 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김제동씨는 “좋아하던 분이 돌아가셔서 사회를 보는 게, 돌아가신 분에게 예를 표하는 게 정치적이라면 할 말이 없다.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고 한 게 정치적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정치적이다”라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스타골든벨 하차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됐습니다. 당시 심경은 어땠습니까?

    “4년 동안 해온 프로그램은 제 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다음주 월요일(녹화일)이 사실 힘들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다 ‘아, 오늘 녹화가 없지’라는 생각이 들어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산으로 갔습니다. 말들이 많았지만 제가 그 프로그램에 얼마나 열정을 쏟아부었는가를 반성하는 것이 진행자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부 요인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것이 맞든지 맞지 않든지 간에 2차적인 문제입니다. 또 적어도 이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 분들의 생각이 그 정도밖에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노제 사회와 같은 정치적인 활동으로 ‘엠시 하차’라는 불이익을 받았다고 여깁니다.

    “(방송인으로서) 정치적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에 100% 공감합니다. 하지만 맹세코 전 단 한 번도 정치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던 분이 돌아가셨는데 사회를 보는 것이, 돌아가신 분에게 예를 표하는 것(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에 조문한 뒤 방명록에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살겠습니다. 대통령님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중의 한 명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로 사랑에 보답하고 살겠습니다’라고 썼다)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 트위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이것이 좌나 우로 나눌 수 있는 개념이라면,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좋습니다. 저는 정치적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도 사회를 본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없었나요?

    “(대통령 취임식 사회는) 아주 영광스런 자리였습니다. 정당 행사나 어용적으로 동원된 행사가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에 사회를 보는 것을 정치적인 행위라고 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전화가 왔는데 매니저가 잘못 알아듣고 인순이 선생님이 취임한다고 하는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말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도 나네요.”

    그는 몰상식한 사회가 가장 웃기는 사회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사실과 진실이, 정권과 민족이 혼동되는 사회는 그에게 몰상식한 사회다. 물론 좋은 몰상식도 있다. “자꾸 한계를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상식이라고 규정되고,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져 있는 어떤 규제들, 생각의 틀들 이런 것들을 지워나가는 것은 좋은 몰상식입니다.”

    힘들 때 달래주는 세 친구는 이승엽, 술 그리고 산
    넘어진 김에 꽃 보듯 토크콘서트로 사람들 만날 것
    원래 꿈은 선생님...놀며 배우는 대안학교 만들고파

    -이번 일을 계기로 방송인이나 연예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숨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 사회활동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축구팀을 응원하는 것과 방송인이 특정 장소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요?

    “(발언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거나 영향을 준다면 신중해야 합니다. 미칠 파장을 떠나 제가 믿는 것을 옳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는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타골든벨을 그만둔 뒤 다른 방송이나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오지는 않습니까?

    “예능프로는 섭외가 안 오고 자꾸 시사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옵니다. (시사프로그램에는) 안 나가렵니다.(웃음)”

    -성공한 방송인치고는 이력이 특이합니다. 공채 아나운서나 탤런트 출신이 아니고 배우나 가수도 아니었는데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동일화되는 과정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크게 경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외모가 (방송에) 나오니까 ‘저렇게 생긴 사람들도 텔레비전에 나오는구나’라며 쉽게 동일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방송인으로 성공한 뒤 우울증이 생겼다. 아주 가끔은 약도 먹는다. “서민들과의 빠른 동일화 과정을 거쳐 서민에서 빨리 벗어난” 역설이 그를 힘들게 했다. 채무의식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거의 해마다 억대의 돈을 남을 돕는 데 쓰는 이유다. 그는 이를 갚아드린다고 표현했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착한 일이 아니라 제가 살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빚에 쪼들리면 힘들지 않습니까? (나눔은) 빚을 갚는 거니까요. 물질 이외의 것들로도 하려고 계획중입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될 수 있으면 많은 곳에 서있고 싶습니다.”

    그는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망은 물에 새기라는 말’을 실천하며 산다. 지금 소속된 기획사로 옮길 때는 계약금 한 푼 받지 않았다. 윤도현씨 등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이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벌어진 논란이 더욱 부담스럽다. 그는 “황금돼지가 아닌 고슴도치가 들어온 셈이죠”라며 소속된 기획사에 거듭 미안함을 표시했다.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주위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너무 튀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누나들이 가장 곱지 않게 봅니다. 우리 집 전세가 얼마인 줄 아느냐고요.(웃음)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모난 돌이 물론 정을 맞죠. 그러나 정으로 쪼아 놓은 조각품치고 자연의 바위보다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난 돌도 있어야죠. 그런데 저는 모난 돌 아닌 것 같은데….(웃음)”

    -방송인으로 당분간 정체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되지는 않나요?

    “제가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몇 년 전부터 느꼈습니다. 빠르게 진화하는 예능프로그램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몸개그를 하려고 집에서 넘어지는 연습까지 해봤어요. 안되더라고요. 적응하면 저를 잃어버릴 것 같고, 저를 계속 고집하면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청률이 잘 나오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제일 좋겠지만 심야시간대에 2~3% 시청률이 나와도 좋으니 저를 잃지 않는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얼마 전 문화방송(MBC)에서 시험 제작해 방영한 <오 마이 텐트>도 정규 편성 진입에는 실패했다. “흔한 일”이지만 2009년 겨울, 그의 가슴은 시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세 벗이 있다. 이승엽 선수가 첫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아는 사이”라고 한다. 이날도 인터뷰를 마친 뒤 “승엽이와 당구를 하기로 했다”며 떠났다. 다음은 술. 막걸리와 소주를 섞은 막소주를 즐기는 그는 “술을 먹은 뒤 솔직해지는 분위기가 좋다.”

    그의 또다른 위안처는 산이다. 그는 산을 탄다는 말 대신 업힌다고 표현한다. 산은 오르는 대상이 아니라 편안하게 그를 업어주는 할머니 같은 존재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지쳐 힘이 들 때면 그는 ‘할머니 산’에 업히러 간다.

    김제동은 어록을 가진 방송인이다.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죠. 우리는 네잎클로버를 따기 위해 수많은 세잎클로버들을 짓밟고 있어요. 그런데 세잎클로버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행복이랍니다. 우리는 수많은 행복 속에서 행운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랑은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댈 곳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책과 허영만의 만화를 제일 좋아한다는 그는 독서량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집에는 네 종류의 신문이 배달된다. ‘김제동 어록’은 그런 독서와 글읽기가 밑바탕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 정도 말을 할 수 있는데 저는 다만 마이크를 얻었기 때문에 좀 널리 알려졌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 김제동.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토크 콘서트를 준비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방송인으로서 그런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는 경우는 드문데요.

    “2년 전부터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근거리에서 아무런 장벽 없이 (사람들과)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아무런 편견 없이, 심지어는 마이크도 없이. 소주 토크도 해보고 싶습니다. 질문 한 번 받을 때마다 술 한 잔 먹고, 술 취해서 쓰러져서 횡설수설도 해보고, 환불해달라면 환불도 해주고. 물론 비밀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그는 공동체 운동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대안학교는 몇 해 전부터 그의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띠어가고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성공회대학교에 편입한 것도 이런 그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전문대 출신으로 사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만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력으로서의 학교가 아니라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성공회대를 선택한 이유는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더 좋은 학교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 꿈이 원래 선생님이었습니다. 성적이 안돼서 사범대를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진행하고 있는 <환상의 짝꿍>에 나온 8살 아이가 ‘꼭 미국 사람과 결혼할 거다”라고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는 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답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들고 싶은 학교는 15분 수업하고 45분 휴식하는 학교입니다. 컴퓨터와 게임기를 철저히 배제하고 45분간 사람하고만 노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 3개월 과정의 영어캠프를 준비중입니다. 아이들 10명이 조를 짜 원어민 강사 한 명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할 생각입니다. 3개월 뒤에 원어민 강사가 필기시험을 봅니다. 잘 가르친 아이에게는 상을 주려고 합니다. 원어민 강사들이 우리말을 잘 못하는 것 보면서 아이들이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방송인 아닌 김제동을 많이 만났다. 공사장 인부로 자신이 살던 집을 철거했던 가난한 청년, 늘 책을 끼고 다니는 늦깎이 대학생, 해마다 거액을 다른 이를 돕는 일에 쓰는 가슴 따뜻한 사람, 대안학교 설립에 관심이 많은 사회 운동가 등. 그럼에도 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웃음의 의미를 물었다. “웃음은 애정의 표시이자 공감과 인정의 표시입니다. 누구나 웃을 수 있고 누구나 웃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공평합니다. 웃음은 나누고 나눠도 모자라지 않는 무한한 에너지입니다.” 그는 앞으로도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 일이 편하고 재미있다. 무엇보다 좋다.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정리/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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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과 썩다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는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정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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