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숫자가 아니랍니다

 이금희 방송인 (경향신문 2009.12.20)


수업시간이면 번호를 불러 학생에게 질문하던 선생님이 계셨다. “오늘이 17일이니까 7번이 대답해 봐라.” “다음 문제는 17번!” 그 선생님 수업 시간이면 날짜와 내 번호를 맞춰보고 안도하거나 걱정했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 선생님 성함은 잊었지만 수업 분위기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은 생각난다.

그때 일은 이즈음 겪는 것에 비하면 낭만적이었다. 은행에 가도, 병원에 가도, 극장에 가도 우리는 번호로 불린다. 부르는 것도 생략하고 ‘딩동’하는 호출음만 울린다. 작은 전광판에 번호가 뜨면 창구로 가서 표를 사거나 업무를 보면 된다. 기계적이고 사무적이고 의례적이다. 창구 직원의 미소마저 차가운 듯하다. 그들에게 나는 368번째 손님일 뿐, 짧은 순간이라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닌 듯싶어서다.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문제로 한바탕 설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청취자들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소개할 때면 “휴대전화 끝 번호 1234를 쓰시는 분께서 신청하신 곡입니다”라고 말하는 내 진행방식에 한 청취자가 와락 짜증을 냈다. “꼭 그렇게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들을 때마다 좀 거슬리네요. 다른 프로그램처럼 1234님이라고 하시면 간편하고 좋잖아요.”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그 내용 뒤에 이런 말을 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숫자로 사람을 부르는 것은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하는 방식입니다. 번호가 곧 그 사람은 아니니까 ‘1234님’이 아니라 ‘끝 번호 1234 쓰시는 분’이 맞는 거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자메시지로 의견을 보내주세요.”

그랬더니 평소에 비해 두 배나 많은 사연이 날아왔다.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렇게 읽을 때면 너무 답답해서 채널을 확 다른 데로 돌려버립니다”라는 의견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휴대전화 끝 번호 ○○○○ 쓰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3~4초를 못 견디겠다, 무조건 간단한 게 좋다는 사람들도 예상외로 꽤 많았던 셈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휴대전화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인터넷망이 전국 방방곡곡 누비고 다니면서였을까. 내 나이 또래가 대부분 그렇듯 나도 ‘라디오 키드’였다. 매일 밤 FM 방송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노래를 들었고, 그때 한창 유행이던 예쁜 엽서를 방송국에 보내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엽서가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의 느낌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내 이름 석 자를 불러주던 DJ의 음성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하고 솜사탕보다 더 부드러웠다.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 고유한 삶의 이력과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이룬 구체적인 개인이다. 결코 숫자로 호출될 수 없는. 그런데도 우리를 번호로 부르는 것은 쉽게 다루려고 그러는 것 아닐까. 편리하게 관리하거나, 통제 가능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마저 물건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게 아닐는지. 생산 조립 라인에서 만들어져 마트 매장에 진열되는 물건은 관리 대상일 뿐,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똑같이 머리 깎고 똑같이 옷 입힌 죄수들도 통제할 대상일 뿐, 애정의 대상은 아니지 않나.

진중권씨도 <미학 오디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를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렀을까? 우리를 관리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때로는 친구들을 번호로 부르곤 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과, 번호를 부르는 것은 다르다. 친구를 번호로 부를 때 우리는 그를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수인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실시되는 강의 평가에서 늘 최고 점수를 도맡다시피 하는 어느 여교수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단다. “뭐, 별 것 있겠어요.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죠. 강의실에서 만나든 캠퍼스에서 지나치든 항상 이름을 불러줘요. 그럼 아이들이 먼저 다가와서 웃으며 인사해요. 정말이지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는 공장에서 생산되어 트레일러에 실리는 물건이 아니다. 바코드가 찍혀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있다. 거기에는 그렇게 자라기를 바라는, 이름 지은 이의 염원이 담겨있다. 그런 이름을 두고 숫자로 부르고 번호로 취급해버리는 것은,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이름 부르기를 포기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꽃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