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죠.” ‘꿀벅지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스스로 ‘다리가 굵다’는 한 학생이 이런 대답을 해 강의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공감하는 다른 학생들도 꽤 많다. ‘말라비틀어진 것들’만 대접받던 세상에서 미의 기준이 다양화되는 것으로 환영할 만하단다. 성형 역시 미의 획일화가 아니라 미의 민주화라고 한다. 성상품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학생들은 같은 여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스스로가 성적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둔감할 수 있느냐며 울먹거릴 지경이다. 그러자 다른 한 학생이 냉소적으로 응수한다. “저는 그래서라도 팔렸으면 좋겠어요.”
성의 상품화에 대해 둔감해지고 있는 것만도, 성이 개방되고 여성도 성적 주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바닥에는 자신이 한번 팔릴 만한 상품이 되어보지도 못한 채 폐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해서 문제가 아니라 상품으로도 여기지 않는 것이 문제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이십대들에게 누군가가 자신을 새로운 상품적 가치가 있는 이름으로 불러주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모가 ‘보수-관리’해야 하는 스펙의 일종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뚱뚱한 것은 단지 비만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다. 면접을 보는 사람에게 뚱뚱한 응시자는 자기 관리에 실패한 나태하고 방만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이 어떻게 회사를 관리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말을 면전에서 듣고 퇴짜를 당한 선배의 생생한 경험담이 유령처럼 대학가를 떠돌아다닌다. 그러니 모두가 필사적으로 다이어트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혹독할 정도로 다이어트를 이어오고 있는 학생에게 자신의 몸은 저주의 대상이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믿기 때문이다. 식욕을 참지 못해 계획에 없는 간식이라도 먹으면 바로바로 토하는 것은 기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방학이면 다이어트를 위해 모든 친구와 연락을 끊기도 한다. 만나면 뭐든 먹어야 하고, 먹으면 그것이 모두 살로 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몸매 관리 최대의 적은 친구라고 입을 모은다. 자기 몸을 저주하고 욕망을 죄악시하며 친구도 끊어야 하는 것, 이것이 자기 관리 능력의 실체인 셈이다.
대학생들이 관리해야 하는 목록이 점점 더 늘어간다. 학점과 영어 시험에서 시작된 취업 스펙 3종 세트는 자격증과 해외 연수를 거쳐 5종 세트로 발전하였다. 이제 외모 관리와 성형이 포함된 7종 세트다. 그러나 이렇게 필사적으로 자기 관리를 한다고 시장이 이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애초부터 시장은 스펙에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스펙을 요구하는 것이 자기를 개발하는 능력을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턴만 하더라도 대다수는 복사기나 돌리는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전부다. 생생한 직업 체험이나 경력 관리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솔직히 말하자. 스펙은 이 잉여인간의 시대에 ‘자기 관리’라는 도깨비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 아닌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스펙의 실체다. 그러면서 공연히 대학생들의 패기와 눈높이만 타박을 한다. 이 바람에 대학생들의 가랑이만 찢어지고 있다. 당신들은 청년들에게 ‘미안하다’는 단 한마디 말고는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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