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1 사계절 1318 문고 21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푸른 풀밭에서 토끼들이 지극히 토끼답게 뛰어노는 표지를 보고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제목처럼 정말로 '토끼'이야기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그다지 토끼란 동물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어쩐지 토끼가 주인공인 책이라면 유치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서점에 갈 때마다 자꾸 눈에 확 들어오길래, 어쩐지 궁금해져버려서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결과는, '토끼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다니..!!'라는 경악과 감탄이다.

서문에서 작가는 자신의 딸들에게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이 <워터십다운의 11마리 토끼>를 구상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정말 성공한 것이다. 일찍이 이렇게 토끼의 생태와 습성 등 현실성을 살린 위에서 기막힌 의인화를 이루어낸 소설은 달리 없으니까. 정말로 토끼라는 게 팍팍 느껴지긴 하는데, 또 토끼치곤 굉장히 인간답게 구는 탓에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종족'이 탄생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흰 토끼와도, 홍당무에 나오는 토끼와도 다른 토끼종족. 이들과 만나서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뭉클뭉클 피어오르지만, 나는 그들에겐 토끼어로 '엘릴(적)'이니까 불가능하다.

'엘릴'이니, '엘리어드'니, '루-'같은 토끼들만의 언어 [토끼어]가 간혹 등장하는데 이로인해 정말 '다른 세계'라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토끼가 쓰는 언어여서인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의 단어들인데, 외우기가 어렵다면 책과 분리된 [토끼어 사전]을 옆에 두고 참고하면 된다. 열 한 마리 토끼의 여정을 그린 터라 지도도 있는데, 토끼어사전과 지도는 책과 별도로 만들어두어 책을 읽으면서 편하게 단어나 지명을 찾아볼 수 있어 좋았다.

토끼 얘기 중에서 제일 웃긴 것은 그들 중에서도 '힘세고 몸집큰'토끼가 전사대를 구성하고 있으며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여우나 늑대, 인간같은 엘릴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할 거면서 말이다. 인간인 내 눈으로 보기엔 오십보 백보, 도토리 키재기지만 막상 토끼들 사이에선 그렇지가 않으니 이 아니 재밌을쏘냐!^^ 밤이 되면 굴 속에 들어가 몇 마리씩 붙어서 서로 체온을 나누며 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점이라든지, '앵초풀'이 제일 맛있다며 그 풀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점에서 정말 토끼답다~라는 생각이 들어 후후 웃고 말았다.

어째 동화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볼 수만도 없는 것이 일단 각 챕터의 처음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서양고전의 유명한 귀절이 인용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제 1챕터에서는 '카산드라'가 나오는데 그녀의 불길한 예언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무시되었던 것처럼, '파이버'의 예언도 샌들포드의 다른 토끼들에게 무시당한다. 이처럼 내용과 관련된 고전인문을 끼워넣어 보다 깊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데다, 토끼들이 서로 간에 겪는 인간적(?) 알력이라거나 친교는 일반소설과 비교해 깊이면에서 하등 뒤처지지 않는다. 작가서문에 따르면 처음에 여러 출판사에서 이 소설이 거부당한 이유가 '토끼얘기라서 어른이 보기엔 유치하고, 애들이 보기엔 어렵다'는 거였다고 한다. 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견해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 반대인데 말이다. 아기자기하고 스릴 만점인 토끼대장정이라 아이들에게도 어필하고, 토끼들이 복잡다단한 여러 일을 겪으며 개체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부분은 어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한가로운 오후에 곧잘 서점에 가곤 하는데, 쌀쌀한 초겨울 오후를 <워터십다운의 열 한마리 토끼>덕에 무척 훈훈하게 보냈다. '열이 올라서' 말이다. 어쩐지 토끼가 무척 키워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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