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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15
서정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시'라는 문학장르에 대해 호감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쪽이다. 초등학교 시절 수시로 개최된 백일장에 참가해서도 운문/산문 중 언제나 산문을 선택했을만큼 어린시절부터 내 이런 취향은 확고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소위 '엄선된 좋은 시'들은 물론 대체로 날 감탄하게 만들었다. 멋지다고 생각하거나 감동을 받은 적도 있다. 다만, 그 뿐으로, 나는 주변의 또래 소녀들처럼 <시집>을 산다거나 그 시를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베끼는 둥 강요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챙겨볼만큼은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강시간, 교내 서점을 갔다가 왜 빽빽하게 꽂힌 얇은 책들에 눈이 갔는지 모르겠다. <시>라는 팻말이 달랑대는 책장에 꽂힌 그것들에 여태 시선 한 번 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시리즈라서 동일한 규격인 한묶음의 책들 중에서 굳이 한 권에 손이 간 이유는 안다. <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이라는 제목이 판타지를 즐기는 내 구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하하, 난 정말 그 책이 동화틱한 판타지 시인줄 알았더랬다. 첫 장의 제목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파]. [파]라고? 설마 국거리나 김칫거리로 쓰이는 그 파? 아아, 그랬다. 그리고 시는, 파를 도마 위에서 써는 내용을 한 페이지 가득 늘어놓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쉼표(,)의 사용이 아주 절묘하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를 사용할 곳이 아닌 곳에서 사용되는 무수한 쉼표들은 작가가 읽어주기 바라는 방식으로 [파]를 읽게 만들었다. 그러자 쉼표없이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시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시로 탈바꿈해버렸다. 그 다음 시인 [동물원]도 [텔레비전]도 쉼표의 유희가 돋보이는 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나를 흥미진진한 긴장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단지 이것 뿐이었다면 곧 식상해져버렸으리라. 표제인 [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은 정말 표제가 될만큼 범상찮은 시였다. 하하..모험의 왕은 공주를 구하러 길을 떠난다. 모험길에는 원숭이 방해자가 나타나 코코넛을 던진다. 코코넛을 피하며 나무 위로 올라가 원숭이를 죽인다. 점수가 올라간다...이것이 무어란 말인가?! 처음, 모험적 서사시의 탈을 쓰고 시작된 이 시는 알고보니 비디에 게임을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절로 풋-파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유쾌했다. [핫도그맨]도 정말 걸작이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핫도그맨은 생년월일도 있고 마치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핫도그를 먹는다. [지구방위백서]는 지구를 지키는 울트라맨, 바이오맨, 독수리 오형제 등등을 총망라하며 그들의 아픔(?)과 진실을 알려주었다.
분위기가 천차만별인 여러 시들이 복합적으로 담겨있지만, 이 시집은 결코 어수선하지 않다. 진지함이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웃음을 주는 시가, 웃음에 지친다 싶으면 다시 어떤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가 이어진다. '호흡'이란 것을 잘 살린 그런 시집이다. 오후 2시, 공강을 이용해 들린 학교 서점에서 나는 서정학이란 시인이 창조한 이상야릇하고 즐거운 공간으로 들어갔었다. 그것은, '시'라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나라고 하는 하나의 경이를 내게 안겨주었다. 시에 대해 친숙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 책을 함께 하고 싶다. 또 하나의 세상이 넓혀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