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설날 때 외숙모가 선물로 준 이쁘고 얇은 책이 있어.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이국적이고 발음이 무진장 어려운 작가의 책이었지. 좀머씨 이야기라곤 하지만 사실 좀머씨 이야기는 얼마 안 됐어. 주인공 '나'라는 소년이 마을과 학교를 돌아다니다가 겪는 일이 대부분이고, 우연히 간간이 마주치는 '좀머씨'에 대한 이야기는 그 반의 반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그런데도 다 읽고 나면 소년보단 좀머씨가 더 기억에 남으니 신기한 노릇이지. 역시 제목의 힘인 것인가? 제목부터 세뇌당한 걸지도 몰라.

'이 책 속의 조연 '좀머씨'에게 초점을 맞춰 읽어라'라고 말이야. 아무튼 좀머씨는 등장한 거에 비해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야. 하도 하는 행동이 이상하고 기이해서 그럴거야, 아마. 그 사람은 늘상 걸어다녀. 굵은 나무 지팡이 하나를 짚고 배낭을 메고 목적없이 계속 계속 걷기만 하는 거야. 잠깐 쉬어서 밥을 먹을 때도 우걱우걱 대강 빵을 우겨넣고 주변을 힐끔힐끔거리면서 그야말로 '에너지 충전'을 위해 먹는 것에 다름 아니지. 그는 처음에는 어떤 무엇가를 위해 걸었을거야.

그런데 걷다보니 걷는 것이 그의 목적이 된 것이지. 너무너무 걷는 데 열중하다 보니 그는 자신이 왜 걸어야 하는지를 잊은거야. 전쟁은 끝났고 그래서 도망칠 필요가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잊어서 계속 걸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은 어쩌면 초능력자일지도 몰라! 무슨 소리냐구? 우박이 쏟아져 주인공 소년이 타고 있는 자동차 지붕이 우그러질 지경이었는데도 좀머씨는 얇은 모자만 쓰고 있었으면서도 멀쩔했거든.

설마 머리가 철판보다 단단할 리는 없었을테니 방어막(실드)라도 쳤던 걸까? 아니면 투철한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 앞에선 대자연의 방해물도 한낱 먼지만 못한 것이었을까? 아무튼 신기한 사람이야 정말. 그런데 걷고 걷고 또 걷다가 그가 결국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는..호수로 들어갔어!! 그래서 죽었냐구? 몰라. 주인공 소년도 흘낏 봤을 뿐이고 그 후로 그 마을에서 그를 본 사람은 없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지. 그는 장소를 옮겨 어딘가에서 또 그렇게 열심히 걷고 있는지도. 그런데 말야, 계속 땅만 딛던 그가 왜 물을 디뎠을까? 그 물컹하고 차가운 것을.

그는 어쩌면 디뎌지지 않는 액체인 물을 디딤으로써, 걸을 수 없는 곳을 걸음으로써 그의 길고 길었던 걸음을 멈추고 싶었는지도 몰라. 스스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었던 그 걸음을 차가운 물에 의탁해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이상해, 왜 이렇게 애잔할 걸까. 그냥 이상한 사람이잖아. 계속 걸어다니던 사람. 그런데 그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왜 나는 지금 눈시울이 화끈댈까. 좀머씨, 당신은 지금 어딘가에서 또다시 걷고 있나요, 아니면 물 속에서 비로소 편히 누워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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