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셨어요.


지난번에 바늘땀 어떻게 읽었냐고 물어보셔서 대답하고 싶었어요. 소용돌이쳤던 감정을 잘 정리해 이야기드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러다 메일이 늦어졌네요. 이해해주시겠죠ㅎㅎ 내내 감탄하면서 읽었지만 저에게는 어떻게 읽었다고 말하기가, 말을 꺼내기가 힘든 책이네요. 이번엔 꼭 읽어보자고, 진작에 사둔 책을 손에 집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처음 폈을 땐 보다가 좀 덮어둬야 했고 지난 후에 다시 읽었어요. 읽으면서 역시 고통스러웠습니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여러가지 공포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피해자 본인이 다시 가해자가 되어버리게 될 것 같다는 자기저주가 아닐까요. 다음으로는, 그 기억이 내 예상보다 훨씬 생생하다는 점. 불쑥, 그리고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는 사실이에요. 트리거 워닝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것들이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하게 된 제 삶을 많이 힘들게 하는 요소였어요. 트라우마를 해소하지 못한 채 (제가 자처한) 고립무원에서 육아한다는 것, 양육 파트너의 의식과 균형감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무리였다는 걸, 느리게 깨달아야 했던 몇년이었습니다. 


정희진 선생님의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폭력은 개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다. 폭력당한 사람은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고통(trauma)의 생존자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는 것을 경험한다. 남편의 폭력을 기억하고 있는 여성의 몸은 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223, <아주 친밀한 폭력>


가끔 경악할 만할 범죄 기사나 뉴스를 보고 그런 반응들 하잖아요. “어떻게 그런 일을, 도대체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어떤 사람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겠는 그런 짓이 일어나는 세계가 분명히 있는데, 사실은 거기 발을 들이면 가해자든 피해자든, 정작 그들이야말로 이전 상황(인두겁의 세계)으로는 도무지 돌아갈 방도가 없는 것이겠지요. 특히 살아남은 피해자가 트라우마에 압사당하지 않으려면 그걸 이고지고 살아갈 방편을 모색해야 하고요. 데이비드 스몰의 이 책이 그 지난한 모색의 결과물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몸에 가해진 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다른 종류의 고통과 다르게 대상이 없는 공포(objectless fear)다. 남편의 폭력, 그로 인한 고통과 공포가 몸의 내부(body in pain)에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 욕망,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와 같은 고통은 ‘무엇 무엇에 대한 고통’으로서 고통의 대상이 몸 밖에 있다. 즉, 고통의 원인이 되는 고통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으로 인한 공포는 대상이 없다. 제거할 수 없는 몸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인 것이다.
몸이 고통의 기억 속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탈출하더라도 공포는 지속된다. 두려움에는 시간의 제약이 없다.”225, 같은 책


쓰다 보니 바늘땀이 완벽한 제목이네요. objectless pain에서 body in pain으로, 수술이 끝나고 병은 치료가 되어도 스티치는 계속 남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소름끼치면서도 섬세하게 수술자국을 구현했을까요. 그걸 그리려고 거울도 자세히 봤을까요. 다른 이미지에서 참고도, 연습도, 많이 했겠죠. 그렇게 많이 보고 그리다(매달리다) 보면 처음의 강렬한 감정을 스스로 좀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걸까요. 저는 그런 단계에 가지 못했지만 그 집요함만은 진정으로 이해해요. 

데이비드 스몰은 종결을 맺더군요. 거창하게 들리지만 제게는 영웅서사예요. 악몽을 자세히 그려내며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힘주어 얘기했던 마지막 부분이 그래서 크게 다가오고 한편으로는 생존보고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간 봤던 어떤 이야기보다 해피엔딩이고요. 부러웠어요. 


보셨겠지만 스몰이 그린 작가 유년시절의 어른들 얼굴에 다 그림자가 져 있는 거예요. 웃는 표정이든 무서운 표정이든 얼굴 가운데가 어두워요. 조명은 위에 있고, 이 어린이는 키가 작은데다(때로는 누워 있고), 어른들은 그 공간의 빛을 등지고 이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말하니까요. 당연히 음영이 지겠죠. 아이에게 화낼 때, 화나는 감정을 누르더라도 아이를 보는 내 얼굴이 얼마나 굳어있을까, 무서워 보일까, 그전부터 자책해왔는데 말이죠. 하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바늘땀을 결국 그려낸 스몰처럼 언젠가는 저도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할 그 순간을 상상하겠습니다.


오늘 메일이 너무 무거운 내용이었을까 걱정이 돼요. 다음에는 제가 좋아했던 여행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거대하고 말없는 돌들 앞에서 편안했던 기억. 가끔 무섭기도 했지만 내가 인간이라는 게, 작고 나약하다는 게, 내 시간도 공간도 결국 아주 조금뿐이라는 것에 안도할 수 있었던 날들에 대해서요. 그동안 안녕히 지내고 계세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4-07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09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