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연약함을 품고 강해진다는 것. 후자가 내 목적이 아닌지라 방점은 전자에 찍는다. 얼마전에 읽은 책에서 배운 것처럼 살아남으려면 망각의 힘에 기대야 할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길 정도로 잊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회고들이 있다.

차별을 이해하기 몇년 전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개척이란 공격이고 침략이며, 학교에서 배운 대로 옛날 옛적에 오래된 배를 타고 착한 백인 아저씨들이 지구 곳곳에 세련된 개념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훨씬 전의 일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토착민 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저항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사실에 완전히 무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고, 나의 무지가어디로 향했는지도 이해한다.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또한 이 문제의 일부임을 인정하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 결여된 열살짜리 머리로 1988년을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조화와 화평 속에 살고 있다고믿기가 쉬웠던 이유는 내 피부 색깔 때문이었다. 나는 백인이고, 이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의미를 갖는다. 나는 거기에 관해두번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각을 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언니가 떠난 그날 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이 꾸러기를 생각했고 그러다 문득 그 발은 원래 언니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도 언니도 모두 완전히 신뢰했기에, 이층 침대가 사라지고 나란히 놓인 두 침대가 들어선 일과 발꾸러기가 갑작스레 자취를감춘 일을 서로 연관 짓지 못했던 거다. 방 안에 앉아 불확실한 미래를 떠올렸다. 불안이 엄습했다. 그 마법의 발이 내가 생각하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이리도 오래 걸렸다면 앞으로 어떤 희망을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눈물은 안 났지만 숨을 헐떡였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듯했다. 몸을 움직일수도 없었다. 결국 호흡이 곤란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나의 존재가 나의 공포와 결합하지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날 밤으로 돌아가서 내 옆에 앉을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할 말은 없다. 그저 아빠가 1년 전에 했던 대로 나의 작은 등을 쓰다듬어줄 것이다. 무릎 재건 수술을 하고 퇴원해 집에 막 돌아왔을 때다른 식구들은 다들 나가 크리켓을 하며 놀고 있었다. 너무너무
무엇일까? 그 일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사건 자체를 숙고하거나해석하는 건 사치였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자신에게 정신적·육체적 외상을 일으킨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 트라우마 사건을 공식적인 버전의 자기 자신과 통합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게 된다. 한순간도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거기에 언어를 갖다붙이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단 거다. 언어가 없으면 공유를 할 수가 없다. 공유할 수 없으면 다시 안전해질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이 모든 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의 깊고 어두운 수치심에 묻혀버린다. - P156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장작 사이에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어린 나에게 차 한잔을 타면서 다정하게말을 걸고 싶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된 인생의 지혜 따위를 전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가벼운 이야기,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건넨 것이다. 어른이 된다 해도 혼잣말하는 습관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어린 내가 그 습관과 싸우기 위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진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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