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당연히 책을 살 생각으로 서점 여러 군데를 다니긴 했으나 여행지니까 작은 책을 고르리,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두 손바닥 크기의 하드커버 책을 골랐다. 집어 들었을 때 눈맞춤하게 된 문장들이 있어 첫마음 따위, 순순히 접고 들어갔다.


"이 책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만화책과 그래픽 노블을 읽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위에 있는 것은 배트... 그다음은 공... 그다음은 깨진 창문. 내가 부분부분을 보여주면 독자들은 그것들을 조합한다. 누군가가 공을 배트로 때려서 공이 창문을 뚫고 들어간 것이라고! 보다시피, 이 세 칸의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림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바로 그 사이가 독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리고 독자들 각각은 공이 창문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을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으로 마음속에 그릴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말들 사이의 틈새. 순간들 사이의 공백. 없어져 버린 듯한 것들. 바로 그곳이 우리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경우에도 정말로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그 없어져버린 것들이었다."127


옮긴이의 말에서처럼, 작가는 그래픽 노블(옮긴이는 픽션이 아니라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그래픽 노블이 아니라 '그래픽 내러티브'라고 짚는다)이 품고 있는 칸 사이의 공백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혼합형 치매에 걸린 본인 엄마의 기억상실에 기가 막히게 비유해서 서사 안으로 들여온다. 이건 그림 없이텍스트를 옮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게 느껴지지만 가져와 보면,


"기억 속의 틈새를 메우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엄마는 더욱더 광적으로 안달하게 되었고, 공백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팔다리나 장기 하나를 잃었을 때 일어나는 문제는 물리적이고 납득이 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에 적응하게 된다.

기억상실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것은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갈 대 사용하는 바로 그 메커니즘을 상실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말이다."117




치매에 걸린 엄마(아빠도 있겠지? 딱히 기억이 안남)를 돌보거나 죽음을 앞둔 노부모를 여성작가가 돌봄/관찰한 책, 영화는 몇몇 생각나지만 남성 작가의 수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남성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것보다 내가 이 기록을 더 '특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읽다가 한번씩 생각해보기도 했다. 여동생 있는 성인 남자가 엄마의 주보호자가 되어 병수발을 든다? 알고보니 빚 뿐인 자산을 떠안아 관리하면서 동시에 복지수급을 위한 행정업무에 시달린다? 공황장애도 겪고.. 나 스스로가 그려보지 않은 미래도 아니고 애처롭지 않을 수 없지..

부모세대의 노화와 죽음을 제도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떻게 견뎌낼지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고 이걸 읽음으로 해서 결국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좋았다. 물로 비유하는 것 기똥차고.. 책 시종일관 나오는 캐릭터들의 기운빠진 냉소들도 내 취향이고.. 그냥 책이 좋아서 좋아하는 것으로 결론냄..

쇠퇴한 산업도시의 명암, 트라우마, 공공의료체계, 돌봄, 공동체 역할, 유년과 자아 등의 굵고 찐하고 급한;;; 여러가지 화두를 너무 잘 녹였다. 찾아보니 작가가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 후보인 일러스트레이터지만 이 책은 영국에서 독립출판된 걸 편집자가 픽해온 거라던데(서점 주인분 말씀) 오.. 안목.. 게다가 하드커버와 겉싸개가 한국판으로 들어오면서 이렇게 만들어진 것 같은데 책 다 읽고 겉싸개(더스트자켓 애호가) 입혔다가 벗겨보면 그 자체가 품은 메시지에 또 감탄하게 됨..


<언다잉> 앤 보이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위에 구구절절 쓴 것을 한 문장으로.. 가능하구나 ㅜㅜ

"자기 자신만을 다루는 글쓰기는 죽음에 관한 글쓰기일 수도 있지만, 죽음에 관한 글쓰기는 만인에 관한 글쓰기다.'(출처 리시올 트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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