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말 -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이어령의 말 1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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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뛰어든다.'

이어령 선생의 말이다.

'말'은 어떻게나 할 수 있다. 그렇게 꾸며 낼 수 있고 없던 일도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창세기'의 시작이 '말'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있어라'하면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고, '없어라'하면 없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소설가의 '말'인 '글'은 없는 인물과 세계를 만들어내고 정치가의 '말'은 '정의'를 만들어낸다. 다만 그것은 '말' 속에서 '존재'가 증명될 뿐이다.

'손'에 뜨거운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뜨겁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때에 따라서 그것을 '차갑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말을 믿거나 직접 만져 보는 수 밖에 없다.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다. 말을 의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말'을 넘어서는 '진리'가 보여질 때가 있다. '쥐고 있는 뜨거운 것'을 화들짝 놀라며 떨어뜨리는 행위가 그렇다. 보통의 진실은 그렇게 '말'이 아니라 '행위'에서 나온다.

누구나 운동도 하고 건강한 것도 먹으며 규칙적인 삶을 살고 싶다. 정신 건강에 좋은 책도 많이 읽고 건강한 인관관계를 쌓으며 살기를 원한다. 그런 바람에 항상 따라 붙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데, 행동이 쉽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은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책도 읽고 싶은데...'하면서 정작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정작 하고 싶은 것은 '독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만 정작 속지 못한다.

사람의 진심을 보기 위해서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말'이란 '정직'의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 상대의 말에 '정직'이라는 '재료'가 쓰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실'을 증명해내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사용하고 살아간다.

행동, 즉 삶은 그 증명이 너무나 어렵다. 혹은 너무 오래 걸린다. 고로 쉽게 창조해 낼 수 있는 '말'이야 말로 '진실'을 은폐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

고로 사람의 말이 진실을 담았었는지는 '행동'과 '삶'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어령이라는 인물은 어떤가. 이어령이라는 인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시대를 건넜던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말이 진실을 담았다는 증거가 됐다. 그는 많은 말과 글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많은 '침묵'과 '행동'을 남겼다.

그의 인생은 문장처럼 가지런하지 않고 단어처럼 명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흐르고 흔들리며 때로는 부서지곤 했다. 그 증거가 말에 힘을 싣는다. 스는 말의 사람이었지만 말에 속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글의 장인이었지만 글을 의심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항상 경계했다. 자신이 말이 그럴듯한 허구가 되지 않도록 그냥 그 강물로 들어간 사람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과 글이 모두 거짓으로 의심받지 않기 위해 꾸준하게 행동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렇게 그가 보여준 것은 단 하나다. 진실은 말보다 늦다는 것. 그리고 진실은 늘 삶의 모양을 하고 온다는 것. 아무리 유려해도 그 문장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말이란 결국 삶을 부를 수 있는 단초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령이라는 이름은 그 말이 어떻세 삶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오랫도록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이제 우리에게도 비슷한 숙제가 주어졌다. 그처럼 '말'의 시대에 살면서, '말'에 속지 않는일, '말'로 속이지 않는일.

'강물을 사랑한다면, 말로 형용할 것이 아니라 바로 뛰어드는 일'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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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소통 명상수업 - 마음근력 향상을 위한 명상 가이드
김주환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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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아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 입니까?"

"남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성별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ㅇㅇㅇ 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한국사람입니다."

"국적을 바꾸면 당신도 바뀝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제가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의 결정체 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씩 잃어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을 지우고, 직업을 지우고, 관계를 지우고, 기억가지 지워도 남는, 그 끝에 남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다. 명상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출발한다. 만약 당신이 화가 난다면 '당신'이 화가 났는가. 아니다. 당신은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다. '당신'이 기쁘다면 정말 '당신'이 기쁜가. 아니다. 당신은 '기쁘다'라는 사실을 깨다는 이다.

우리는 '관찰자'다. 감정을 인식하는 자다. 생각 자체가 아니다. 그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지켜보는 자다. 명상이란 이 사실을 훈련하는 것이다. 김주환 작가는 '내면소통 명상수업'에서 반복한다. '그 감정은 당신입니까' 우리는 쉽게 감정에 휘둘린다. 불안하면 내가 불안이고, 화가나면 내가 분노 그 자체가 된다. 다만 관찰자는 다르다.

'감정'이라는 것의 '생물학적 원리'를 쫓다보면 그 핵심에는 '편도체'가 있다. '편도체'는 원시시대부터 이어져온 경고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과거 우리를 생존하도록 진화해온 뇌의 경보장치다.

인류의 역사를 100이라고 잡을 때, 우리가 농사를 짓고, 도시를 세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봐야 5 정도 된다. 넉넉히 봐도 10이다. 나머지 90에서 95정도는 산과 강을 옮겨 다니며 짐승에게 쫓기고 쫓던 수렵 채집의 시대였다. 인류 역사 100 중에 약 90~95는 수렵 채집 시절이다. '현대인'을 기준하면 더 짧아진다. 지금의 우리가 '현대 사회'를 기준으로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 명백하다. 현대 사회는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무엇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는가. '뇌'는 생존을 위해 진화됐다. '포식자'의 위협에 반응하도록 설계됐다. 재빨리 위기를 파악하고 이를 '신체'로 '반응'했다. 소리를 듣자마자 뛰고, 그림자를 보자마자 도망치고, 낯선 소리와 냄새를 맡으면 긴장했다. 이 모든 것이 '생존가능성'을 높였다. 여기에는 '판단'이 아니라 '반사'가 필요해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움츠려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과거 우리의 생존력을 높였던 '편도체'의 역할 덕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느릿한 진화와 반대로 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현대사회에 사자는 없다. 창 밖에 맹수도 없다. 다만 회의실 문을 열면 진땀이 나고, 시험지를 받으면 고통스럽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의 눈빛에 온몸이 굳기도 한다.

위협없는 현대 사회에서도 편도체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이게 우리가 매일 감정에 휘둘리는 이유다. 어떤 환경은 뇌의 깊은 곳에서 '위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논리'가 아니라 '반응'이다. 그것이 감정이다. 문제는 그 '위험'이 '실체'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뇌는 '상상'만으로도 반응한다. 기억만으로도 편도체는 활성화된다. 사자가 눈 앞에 있던, 진상 고객이 눈 앞에 있던 뇌는 똑같이 위협으로 여긴다.

이 즈음에서 'Why Zebras Don't Get Ulcers'라는 책의 이야기가 나온다. Ulcers는 '위궤양'이라는 뜻으로. 왜 얼룩말은 인간과 다르게 스트레스에 노출되어도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로버트 사폴스키는 말했다. 얼룩말은 '사자'가 눈앞에 있을 때만 도망간다. 즉 위협이 일시적이라는 의미다. 얼룩말이 처한 상황은 일회성으로 끝난다. 얼룩말은 사자의 위협에서 먹히거나 살아 남는다. 그리고 위협이 살아지면 다시 편하게 초원에서 풀을 뜯는다. 즉 지속 가능하지 않은 스트레스라는 의미다. 단 인간은 사자가 없어도 사자를 만들어낸다. 불안을 되새기고 후회를 곱씹고, 상상의 위협을 끝까지 키운다. 편도체는 실재와 허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고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지만 인간은 위궤양에 걸린다. 사라지지 않는 감정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김주환 작가는 감정을 없애려고 하지말고, 억누르거나 쫓아내지 말고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내면소통'이다. 즉 우리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는 주체다. 그 사실을 인지하면 된다.

이렇게 우리가 감정을 인식하는 주체가 되면 실제로 뇌는 변화가 일어난다. UCLA의 리버맨 박사는 감정 라벨링 실험을 통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반응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이런 습관은 전전두엽을 활성화 시킨다. 단지 '화가 났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말로 표현한 것만으로도 뇌는 차분해진다. 그러니 명상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훈련이자 생리학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훈련의 최적 시간대가 있다. 바로 잠들기 전이다. 신경가소성이라는 말이 있다. 뇌의 변형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의미다. 뇌는 새로운 회로를 만들어낸다. 이 작용은 깨어 있을 때보다는 자고 있는 동안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 하루 동안의 감정과 기억, 경험이 재정리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 그 직전에 연결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적전 상태'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잠에 드는지는 뇌의 설계를 바꾼다.

김주환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잠들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에게 좋은 말을 건내라'고 말한다. 어쩌면 마법과 같은 결과가 꽤 뇌과학적인 이유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도 잘 견뎠다'

'실수했지만 괜찮다'

'나는 충분히 나아지고 있다'

뇌는 그 말을 기덕한다. 그 기억은 새로운 회로가 된다. 또한 그것이 반복되면 습관이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며, 성격은 삶의 형태가 된다. 그것이 '운명'을 결정한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당신의 성격이 아니다. 당신이 살아온 흔적도 아니다. 기질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다. 감정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존재. 그 흐름을 지켜보는 존재이다. 그것이 진짜 자아다.

'내면소통 명상수업'은 이 자아를 되찾는 훈련이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장 마지막에 남는 그 정체성. 그것이 '진짜, 참나'이다.

'모든 이름을 다 지웠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는 그것.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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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 이경규 에세이
이경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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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가 가까워지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이렇다.

'나는 누구지'

아직 10대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의 최대 관심사가 '밖'이라면 한집에 살고 있는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안'이다. 도대체 '나'라는 것은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하던 중 'MBTI'라는 유형분석이 유행했다.

옆에서 한번 해보기를 권장하던 상대는 문항에 대한 나의 선택을 갸우뚱거렸다. 그 행동이 충분하게 이해될 만큼 나 스스로도 일반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나왔다.

'INFJ'라고 한다. 전체의 1%정되되는 굉장히 희귀한 유형이란다. 주변에서는 이 유형을 처음봤단다. 내가 희귀한 유형이라는 사실은 그닥 놀랍지 않았다. 내가 놀란 사실은 나 같은 유형이 1%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전체에서 고립된 '유일한 하나'에서 그래도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 유형으로 살았다.

그러다 어떤 날은 주변에서 F가 아니라 T성향 같아 보인다 한다. 그자리에서 다시 검사를 했더니 INTJ가 나온다 T와 F과 49와 51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그런 성향인 듯했다.

'이제 나는 뭔가 조금더 일반적인 유형으로 올라왔을까' 했더니 INTJ도 INFJ만큼이나 희귀한 유형이란다.

'보통'이 되고 싶은 그런 소망을 접어두고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찾아봤더니, 제일 먼저 나오는 인물이 '이경규'라는 인물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동질감이 든다. 스스로 INFJ라고 생각할 때, 비슷한 인물을 보면 묘한 돌질감을 갖곤 했다. 다시 INTJ가 되어서 보니 그들에게 알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이 들었다.

'저 사람도 참 힘들게 살고 있겠구나'

그 이후로 일부 인물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그렇게 '이경규'라는 인물의 '에세이'를 읽게 됐다. 이사람은 단언컨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 확신은 스스로를 돌아 볼 때 알 수 있다.

그의 수필은 짧고 간결했지만 묵직했다. 그의 말 중 일부는 꽤 인상 깊다.

'열심히 벌고, 죽기 전에 더 써야 한다. 한 푼도 남기지 말고, 집도 팔고, 전세로 살다가, 여한 없이 쓰다 가야 한다.'

그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해 본 적이 없단다. 그 철학이 때로는 미련할 수 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삶의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 전체적인 모습을 보자면 50억짜리 건물이 100억이 됐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 건물의 가치가 올라가는 동안 인생의 가치도 함께 올라가고 있는가를 살폈는가다.

어떤 가치는 외부적인 변수로 가치가 올라간다. 다만 내부적 가치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올릴 수 있다. 변동폭도 작고 손실 위험도 없다. 그의 철학에 크게 공감했다. 나 또한 '파이어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인물들은 일약 스타가 된 뒤에 은퇴하다 시피 한다. 말 그대로 벌만큼 벌었으니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 각자의 가치관이 있겠지만 이는 내 가치관에 크게 어긋난다. 대충 통장에 20억, 30억만 있으면 누구나 은퇴 할 수 있다. 대략 3%이자만으로도 1억에 가까운 불노소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성장은 30억 수준에서 멈춰져야 한다. 그 이후의 성장은 '욕심' 많은 이들의 몫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사회란 '은퇴' 목적에 두는 삶이 아니다. 의사는 사람을 고쳐서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장사꾼은 좋은 물건을 들여와 저렴하게 팔아 사람들을 이롭게 하며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

그 '홍익인간 정신'이 아마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고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붇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한방으로 인생 역전하여 은퇴를 선언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스스로 돈을 버는 행위는 굉장히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인 행위다. '이경규'의 철학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그는 남을 웃게 하며 직업적으로 돈을 번다. 이 얼마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인가. 가만히 50억짜리 건물을 사서 100억에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부'가 아니라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부'를 진심으로 얻고 싶다.

같은 MBTI를 공유하는 인물의 책을 읽으면서 '아, 이것!'했던 순간이 있다. 나의 첫 책에는 이런 철학을 적었던 적이 있다. 바로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쌓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떠올릴 추억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철학이다.

예전 할머니는 무릎이 안 좋으셨다. 꽤 오랜기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고 TV를 보거나 창밖을 바라보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어느 나이가 되면 돈이고 뭐고 중요한 게 아니다. 분명 사회 생활도 힘들고 눈도 침침해지고 다리도 아프기 시작하면 나 또한 가만히 침상에 누워 천장에 있는 벽지 무늬나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과연 무엇을 떠올리며 하루를 보내게 될까.

그것은 내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였다.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하게 됐다.

'그렇지... 뭐든 진지해 질수록 재미가 없어진다. 삶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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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아츠 - 부처의 지혜로 배우는 제대로 화내는 기법
구사나기 류슌 지음, 박수현 옮김 / 한가한오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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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쓰면 이루어진다'에서 말한 적 있다. 어떤 감정에 휩싸였을 때, 그 감정이나 상황을 그냥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놀랄만큼 편안해질 수 있다. 예컨데 직장에서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는다고 해보자. 대부분은 그 상황에 휩쓸린다. 말의 뉘앙스 하나, 표정의 결 하나에 따라 마음이 동요된다. 다만 그때 그 상황과 감정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하기로 해보자.

사무실의 온도는 어떤지, 조명의 밝기는 어떻고, 상사의 목소리 톤은 어떤지, 그가 반복해서 말하는 요점은 무엇인지.

소설에서 작가가 상황을 묘사하듯. 혹은 화가가 붓을 들고 무심히 풍경을 그려나가듯. 그 감정과 분위기를 제3자의 시선으로 서술해 나간다. 감정이 '주어'가 아니라 '대상'이 되는 순간, 사람은 '감정' 속에 있는 존재에서 '감정을 바라보는 사람'을 번환된다.

'설명, 묘사, 서술' 이것은 표현이 아니라 감정과의 거리 확보다. 구사나기 류슌은 '멘탈아츠'에서 이 감정 거리 확보를 '기술'이라고 불렀다.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나'를 인식하는 기술이다,.

그는 말한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이라고.

이것은 단순환 관점 전환이 아니다. 실제로 증명된 실험이 있다. 뇌과학 실험에서 뇌 영상 장비로 확인한 결과, 감정에 대한 언어화가 전두엽을 활성화시키고, 감정의 폭주를 조절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 당황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뇌는 그 감정을 '대상화'하고 반응의 속도를 늦춘다. 거기서 여유가 생긴다. 그 안에는 '선택'이라는 것이 들어간다.

'감정'은 영문법으로 '수동태'로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의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부여 받는 통제불능의 그것을 '통제권'에 두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방식이다.

'멘탈'은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두드리고 때려서 단련할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유연하게 흔들릴 수 있다. 우리가 할 것은 그것을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조련'하는 것이다. 감정에 빠졌다는 걸 인지하고, 그 감정을 서술하고, 그 다음에 나를 다시 중심으로 끌고 오는 힘. 그게 진짜 멘탈관리다.

과거 한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의 '멘탈'을 강화한다고 '폭언'을 퍼붓는 관경을 본 적 있다. 강한 멘탈을 기르기 위해 '강한 자극'을 준다는 의미다. 단연코 멘탈은 그렇게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흥분한 말과 닮았다. 갑자기 튀어오른다. 눈이 뒤집히고, 말굽이 날뛴다. 처음에는 작았다. 단어 하나, 표정 하나, 시선 한 줄기. 그러나 어느새 감정은 쏜살같이 달린다. 그 말 위에 내가 올라타야 한다고 해보자. 속도는 붙고 방향은 없어진다. 그게 감정의 폭주다.

이것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억지로 붙잡으려 한다. 채찍을 들고, 힘으로 눌러서 조용히 시키고자 한다. 다만 이는 결국 말을 더 거칠게 튀게 한다. 더 위험하게 움직인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억누르고자 할 수록 더 강하진다. 감정은 힘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말처럼 감정도 조련이 필요하다.

좋은 기수는 말을 두들겨 패지 않는다. 옆구리를 살짝 지르고 고개를 틀어주는 것만으로도 방향을 바꾼다. 흥분한 말의 속도에 같이 흥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단호하게, 작은 신호로 통제한다. 감정도 그렇다. 감정이 튀어 오를때는 내가 더 빠르고 크게 반응하면 모든 것이 망가진다. 다만 한 발 물러서서, 그 감정을 바라보고, 이름을 붙이고, 묘사하기 시작하면 감정은 점차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점차 말을 듣기 시작한다.

구사나기 류슌은 '멘탈아츠'에서 감정은 억제의대상이 아니라 조율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감정에 끌려가지 말고, 감정을 관찰하라고 화가 나는 순간 '나는 지금 화가 났다고 느낀다'하고 말하ㅐ보는 것이다. 그 말이 한 줄의 고삐가 된다. 순간 감정이라는 말은 더이상 날뛰지 않는다. 멈추지 않더라도 조절은 가능하다.

감정은 생물이다. 마구간에 갇힌 기계가 아니다. 두드려서 조용해지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길들여야 한다. 말과 잘지내기 위해서는 말을 부스려 하지 않아야 하고, 감정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이를 억제해서도 안된다. 감정과 함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말위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것. 감정이 속도를 내도, 그 위에서 내 호흡을 유지하는 것, 중심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감정은 흘러가고 나는 그 위에 있다. 그게 조련이고 그게 기술이다. 멘탈은 그런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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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리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12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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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기억은 정말 '사실'일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언가를 기억하고 다시 잊느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의 총량이 아니라 그 기억을 얼마나 왜곡 없이 저장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한 순간도, 단 하나의 이미지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의 주인공 '에이모스 데커'가 그렇다.

'완벽한 기억력'이라는 소재는 이미 다른 장르에서 사용되는 소재다. 다만 작가 '빌디치'는 그 능력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뒤바꾼다. 에이모스 데커는 미식 축구 선수 출신 형사다. 다만 경기 중 뇌를 다친다. 그는 하이퍼타이메시아에 시넥스 테지아를 동시에 겪는다. 말은 어렵지만 어쨌건 기억이 영상처럼 저장되며 정보가 잊히지 않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가족이 살해 당하던 그날의 냄새, 빛, 소리, 공기. 잊혀지지 않는다. 그 끔찍한 장면이 매일 밤 되살아난다.

실제 하이퍼타이메시아는 존재하는 증상이다. 2006년 UCLA 신경과학자 제임스 맥거 박사가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을 통해 이 개념을 발표했었다. 그녀는 30년 전의 특정 날짜를 말하면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무엇을 입었는지까지 기억해 냈다. 다만 그녀는 그 능력을 고통이라고 말하곤 했다. 지우고 싶은 과거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빌디치는 이 고통의 본질을 소설에 담았다.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뇌'라는 곳을 '저장의 감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데커는 가족을 잃고 경찰마저 그만둔다. 그의 삶은 바닥까지 추락한다. 그는 거리에서 살아가고 매일 악몽을 꾼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이 이걱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현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데커는 그 사건에 자신이 연류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 직업이었던 '형사'의 특성을 살려 수사하고 범인을 찾고자한다. 단순히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이 기억하는 '진실'이 과연 '진짜'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쯤 질문이 생긴다.

과연 기억은 '사실'인가. 기억은 '객관적'인가. 심리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2014년 존스홉킨스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피 실험자들에게 가짜 사건을 주입한 결과 30%이상이 그것을 '실제'라고 기억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기억은 감정이나 관점, 환경에 따라 쉽게 변형된다. 다만 데커는 그렇지 않다. 그의 기억은 변형되지 않는다. 모든 장면은 편집없이 저장된다. 그리고 그 문제로 '잊을 수 없는 고통'을 갖게 된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은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꽤 과거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아주 과거의 '나'는 일부의 고통을 서서히 세월에 편집해가며 미화시켰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온통 왜곡 투성이로 어떤 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지금 역시 나에게는 '고통'의 기억이 있다. 그 일부는 서서히 세월에 의해 다듬어지고 깎여 나간다. 잊혀져야 하는 것들은 잊혀져야 한다. 그 본질을 현 세계는 흔들어낸다.

과거 유명인들이 발언이나 행동이 현재에 와서 재조명되는 경우가 있다. 알고리즘을 타고 이미 몇년이나 지난 이야기가 다시 회자되며 사람들은 그 사람의 본질을 흔든다.

한 사람이 다른 시간에 말한 두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여 '모순 덩어리'로 만든 것도 너무 쉽다. 본래 기억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단백질 고깃덩이에 화학작용으로 만들어내는 '환영'과 같다. 현대 우리는 어떤가. 그것을 '디지털화'하고 '클라우드'에 저장한다. 흔히 '흑역사'라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영원히 '박제'되는 시기에...

이 소설은 현대 우리의 삶을 되돌려 보도록 했다. 지금도 수 백개씩 올라가는 수많은 영상과 사진, 글들은 시간이 지나면 세월에 철학이 달라지고, 삶의 가치관도 달라지고, 외모와 말투 등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쩌면 일부는 이미 죽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앞으로도 살아간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고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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