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돈은 몽땅 써라 - 먹고 놀고 마시는 데 목숨 걸어라, 다시 살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라
호리에 다카후미 지음, 윤지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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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꽤 일리있다. 가진 돈을 몽땅 써야 한다. 일부 이 말에 공감한다. 예전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 배운 바 있다. 친구에게 스타크래프트를 배운적 있다. 게임은 단순하다. 광물을 캐고 자원으로 유닛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면 된다. 현실 전쟁과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있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광물자원'과 같은 경제력이다. 게임은 시작과 동시에 4명의 일꾼을 준다. 일꾼들이 일을 시작하면 '광물자원'의 숫자가 올라간다.

이때 필승의 전략은 이렇다. 쌓이는 광물자원을 최대한 0으로 만들어야 한다. 50원이 모이면 또다른 일꾼을 생산하고 100원이 모이면 건물을 짓고 다시 50원이 모이면 일꾼을 생산한다. 돈이 쌓이도록 놔두는 것은 기회비용을 날리는 행위다. 어리석게도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절약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꾼이 생산하는 50원을 아껴 큰 건물을 생산하려는 시도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게임을 아는 이들은 안다. 가진 돈을 몽땅 쓰다보면 나중에는 잠시 전투를 하는 도중에도 엄청난 돈이 쌓이게 마련이다. 결국은 아껴쓰는 것보다 몽땅 회전 시키는 편이 이득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누구보다 빠르게'다.

게임에서 가장 비싼 건물 중 하나는 '커맨드센터'다. 대략 500원 미네랄 정도 된다. 초기에는 꽤 목돈에 해당된다.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맨드센터를 짓고 확장하지 않으면 한정된 자원은 결국 남에게 빼앗긴다. 한정자원을 나눠 갖는 현실 구조와 똑같다.

저축은 은행의 채권을 사는 투자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많은 투자 방법 중에서 기대 수익이 가장 보잘 것 없으며 자신의 기회비용을 채권을 구매하여 묵혀두는 일이다. '저축'이 최대 '선'이라면 은행은 어째서 사람들이 저축한 돈을 '저축'하지 않고 '기업'에 대출해주겠는가. 그리고 기업들은 어째서 그것을 대출받고 운용하겠는가.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저축'이 '이윤' 추구의 최대 선이라면 기업은 '대출'이 아니라 '저축'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은 적당한 인플레이션에 걸맞는 성장을 하고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고 결국 개인을 고용한다. 빌린자가 빌려준 자를 고용하는 이상한 구조가 형성된다.

돈은 '기회비용'의 다른 말이다.

가령, 욕구가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욕구를 해결할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은 그럴 능력이 없다. 이 욕구를 '교육'에 비교해보자. 어떤 이는 교육에 지출할 경제적 능력이 있고, 어떤 이는 없다. 둘이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등가교환에 의해 돈을 지불하는 행위는 무언가를 얻는 행위와 같다.

반드시 물품일 필요는 없다. 경험이나 인맥, 능력 때로는 기회일수도 있다. 돈을 지불하면 그에 합당한 댓가가 돌아온다. 물론 아무 의미없는 소비성 지출을 늘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튜브든 글쓰기든 요리든, 모르는 부분이 있거나 경험한 적 없는 세계가 있다면 과감하게 지불하여 새롭게 배우고 시도하는 것이 좋다.

인류가 저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인류는 대략 1만년 전 정착을 시작했는데 '농업혁명'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인간에게 '잉여생산물'을 선사했다. 그전까지 인간에게 저축은 존재하지 않았다. 쓸만큼 쓰고 필요없으면 버렸다. 농업혁명은 분명 '부'를 만들어낸 혁명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는 계급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사상 농민이 지배계층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농민은 언제나 피지배계층이었다. 이들은 착취 당하거나 세금을 징수 당하는 존재들이었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계층은 대개 외부에서 무기를 들고 침략한 '침략자'이거나, 과거 토지를 획득한 '정복자'의 후손이다.

유럽축구리그를 보면 스폰서들을 익숙하게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스포서의 상당수는 '보험회사'라는 점이다. 현재의 보험사들은 '보험업무'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잉여자금을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투자회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경제력있는 회사는 '보험회사'인가. 보험의 기원은 '도박'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보험회사는 영국의 '런던로이즈'이다. 런던로이즈는 본래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원들이 찾는 카페였다. 그러다 17세기 말 카페를 다니던 손님들 사이에 선박이 무사히 항구로 돌아올지 내기를 시작했다. 카페는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농민들이 잉여수확물을 저축한 이유는 그들이 풍요로운 생산능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졌다. 농사는 꽤 예측가능성이 높은 사업이다. 계절에 따라 반복되는 날씨와 기온이 있고 이에 맞는 수확시기가 정해져 있다. 다만 이 안정적인 패턴 중 예외상황이 발생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잉여 생산물'을 저축해야 한다. 다시말해 미래지향적인 사고는 불필요한 불안을 낳고 행동을 제한한다.

계산된 예측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불안이다. 이 불안은 '소유'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한 살인 아이는 불안함이 없다. 7살인 아이에게도 불안함은 없다. 불안은 꽤 안정적인 경제력을 가질만한 나이부터 갖게 시작하는데 아이러니하다.

현대인 대부분의 소비는 '필요'보다 '과잉'하다. 다시말해 '소비력' 자체가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고로 소유는 특히 물건을 살 기회와 이를 뒷받침할 경제력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수단이다. 비록 집은 없지만 '고급승용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 실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필요없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눈이 두 개가 있는데, 누군가 눈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이라 답변하겠는가. 아마 상대할 가치를 못느낄 것이다. 자신의 자존감이 완전하게 형성된 이들에게 지위를 설득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사람에게는 일생간 소득주기와 소비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무지막지하게 소비하고 생후 20년 동안 생산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즉 소비력과 생산능력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소비가 죄라면 인간의 삶에서 '죄'를 짓지 않는 기간은 생각보다 크다.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추는 것에 몰두하다 보면, 당연히 출산률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에는 '소비'가 발생한다. 이것을 완전히 절저한다는 것은 '생산'만이 '선'이라는 좋지 못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생산력'을 넘어서는 '무절제한 소비'는 분명 옳지 못하지만 자신의 생산력 내에서 충분히 소비하고 즐기는 것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돈이 모든 것에 '선'은 아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도 옳다는 것이다. 그 또한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아이들과 함께 외식할 수 있는 기회비용,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쌓다가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한 비용, 다양한 취미를 가진 이들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다가 갖게 될 고급 정보들에 대한 기회비용.

그런 기회비용들이 통장잔고에 쌓여, 연 3%도 안되는 성장률로 잠들어져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그 잠든 잔고를 깨워 더 빠르고 신속하게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돈이 돈다는 것이 맞을까. 멈춰져 있는 것이 맞을까,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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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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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의 소설을 몇 편 읽어 본 적은 있다. 그때 왜 더 찾아 읽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아주 취향 저격이다. 기본적으로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 다만 공장에서 찍어 낸듯한 추리 소설에 실증이 난 편이기도 하다. 기욤 뮈소의 소설을 몇 권 소유하고 있다. '브루클린의 소녀'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입소문이 있는 듯하다.

'브루클린의 소녀'는 아주 가벼운 분위기로 소설이 시작한다. 정말 일상적이고 가볍다. 사랑하는 연인과 있을 수 있는 가벼운 언쟁으로 사건은 비화된다. 점점 이야기는 거대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주인공 라파엘은 성공한 작가다. 그의 삶은 무난했다. 전업 작가로써 성공했고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도 있다. 그러다 그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다. 자신의 커리어를 더 우선시 하는 아내를 만났고 이런 이유로 어린 아들을 혼자 양육하는 조건으로 이혼한다. 이후 커다란 방황을 한다. 소설 중간에 난데없이 '육아 일기'가 등장한다. 이 대목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정신없이 육아하며 '추리'하는 맛이 꽤 현실적이다.

소설의 진행 방식을 보니 내 과거 기억도 중첩됐다.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에 있으며 역시 한 눈을 팔면 방 전체가 뒤집어지는 육아 전쟁에서 일과 글쓰기를 병행했다. 소설 속 주인공에 흠뻑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내 개인사와 과거가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그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약혼녀 '안나'를 만난다. 안나와 미래를 약속하며 '라파엘'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진다. 그는 집요하게 그녀의 과거를 캐묻는다. 이 과정에서 '안나'는 '라파엘'에게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도저히 일반적일 수 없는 사진.

그 사진을 본 '라파엘'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뜨겁게 타오른 감성이 차가운 이성에 식었다. 비워둔 자리를 후회한다. 그리고 다시 '안나'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안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극적을 돌변한다. 마주하는 모든 정황은 하나도 일관성이 없으며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파변 덩어리들만 무수하게 생겨난다.

'작가가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나'

걱정이 드는 즈음, 소설은 벌여려놓은 이야기를 하나씩 밀봉하고, 다른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몇 번이나 과정이 반복되니, 몰입하던 상황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훨씬 넘어 섰다.

소설의 형식을 보면 대략 '미국드라마'를 닮았다. 미국 드라마를 자주 보다보면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한다. 작은 사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확대된다. 확대된 이야기에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온다. 각 등장인물마다 사연과 히스토리가 있고 인물의 상황과 내면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따로 전개해 나간다. 이 소설도 그렇다. 소설을 보다보면 '미국드라마' 프리즌브레이크가 떠오른다. 하나의 사건에 얽혀 있는 다양한 사람의 이해관계가 개인에서 점차 사회로 확장된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다보면 모든 플롯 뒤에 숨은 반전을 예측 할 수는 없지만 대략 어떤 부분에 반전이 숨겨져 있을지는 예측할 수는 있다. '브루클린의 소녀' 역시 어느 정도의 반전을 짐작할 수 있긴 하다. 과정을 풀어가는 일이 워낙 자연스럽고 긴박하여 빠져들어 읽다보면 반전 내용과 상관없이 흥미롭다.

소설은 워낙 쉽게 읽히고 빠르게 이해가 된다. 소설의 장마다 각 장에 맞는 '명언'이 한 마디씩 적혀 있다. 단순히 소설에 해당하는 명언이지만 적잖게 여러면에서 자극이 되는 좋은 글들이 많았다. '기욤 뮈소'의 다른 소설도 기대가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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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자서전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지음, 김명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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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으로 눈멀고 귀먹어 말조차 못하지만 그녀는 낙관주의자였다. 1968년, 여든 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정싱인보다 더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서전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적었다.

눈 뜨고 감사함 없이 사는 우리에게 생각할 꺼리를 준다. 그녀는 눈이 보이는 친구들을 시험해 보곤한다. 숲속을 오래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 묻는다. 친구는 '별거 없었어'라고 답한다. 눈이 멀쩡한 사람도 보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보는 것에 전부인 사람들에게 본다는 것은 그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점자로 글을 읽었으나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문학을 읽고 철학서를 읽었으며 더 많은 간접 경험을 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고 가보지 못한 세상을 봤다. 과연 누가 눈을 감고, 누가 귀를 닫고 있는가.

철학에서 보는 건 그림자고 아는 것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은 진리를 파악하고 우주를 그대로 포착한다. 그림자는 실재다. 즉, 실재라 믿는 것은 대체로 그림자다.

인간은 굉장히 희한한 포유류다. 포유류는 다양한 색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호랑이가 빨간 이유다. 무슨 말일까. 원래 호랑이는 은폐를 위해 보호색을 가져야 한다. 녹지에 숨기 위해 호랑이는 초록색 털을 가져야 한다. 초록은 보호색이 되며 다른 동물들에게 잘 보이지 않도록 감춰준다. 그러나 호랑이는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이렇다. 유전적으로 '초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빨강'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또한 호랑이가 사냥하는 대부분의 동물이 '적록색맹'이다. 우리 눈에는 붉은색으로 보이는 호랑이가 대부분의 초식동물에게는 녹색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조류'는 육안으로 비가시광선을 본다. 자외선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먹이를 찾거나 방향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육안'을 사용한다. 직접 두 눈으로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하여 방향을 찾아간다.

그 말은 세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가시광선'이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동물은 가시광선을 훨씬 뛰어넘는 빛을 본다. 고로 그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히 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아주 극일부다.

우리 조상은 채집 생활을 했다. 과일을 먹는 생활 습관 덕분에 조상들은 붉은 원추 세포를 부활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붉은색을 볼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말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가시광선을 넘어 볼 수 있는 감각, 그것은 아마다 '글을 해석하는 감각'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통해, 타인과 과거, 미래, 철학을 모두 볼 수 있다면 과연 '헬렌켈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책을 읽으며 세상을 봤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책에서 본 것인지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어하는 상황까지 온다. 독서는 간접경험이다. 다만 대부분의 직접경험도 차츰 퇴색되면 간접경험과 비슷한 형태로 기억이 저장된다. 그녀는 실제로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표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한다. 시각이 퇴화한 동물이 후각에서 뛰어난 감각을 나타내거나, 그마저 퇴화한 동물이 청각에서 뛰어난 것 처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더 많이 보게 한다. 그녀는 남들이 보는 것을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부분부터의 본질을 살핀다. 그녀는 머그컵에 담긴 물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애를 먹었다. '머그컵'은 물을 담는 그릇이고 '물'은 그 안에 담겼다. 설리반 선생이 머그컵의 물을 '물'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가르킨 것이 '머그컵'인지 물인지 몰랐다. 그녀는 그것을 머그컵이라고 이해했다. 이 둘은 이것으로 고군분투한다. 가르킨 것이 '물'인지 '머그컵'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설리번'은 얼마나 '물'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했을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볼 수 있게 됐다. 출애굽기 19장에는 '아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요, 빛이요, 비전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아는 것은 사랑이고 빛이고 비전이다.

이렇게 본질을 탐구한 그녀에게서 '삶'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아 어둡고, 들리지 않아 적막하고, 말하지 못해 답답한 그녀에게 '삶'은 밝고, 경쾌하며 넓게 펼쳐진 것이었다. 주어진 것에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생긴 새로운 것에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녀는 최고의 '낙천주의자' 였다. 삶은 오르막길 뒤에 내리막길 같은 것이며, 내리막길 뒤에 오르막길 같은 것이 었다. 모두가 그녀의 삶이 내리막길이라고 정의할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오르막길이라고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왕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노예가 있을 수 있고, 노예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왕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라고 정의하는 것은 과연 '우리'인가. 혹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를 정의하기에 앞서, 혹은 그 훨씬 뒤에도 우리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으며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낙천주의'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삶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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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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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짓다보면 나무 모양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똑같은 토양, 기온, 강수인데도 그렇다. 같은 종자인데도 그렇다. 종자 내에 DNA 설계 때문일까. 농부의 손이 다르게 닿아서 그럴까.

같은 씨앗이라도 크기와 모양 때로는 색깔이 다르다. 이유는 생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동종 내에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부모 사이에서도 다른 형제가 태어난다. 하나의 세포에서 분열된 일란성 쌍둥이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우주 내에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돌연변이'가 생기는 이유다. 다만 사피엔스 종인 비슷한 것에 '보통명사'를 붙였다. 완전히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한 것들끼리 '가르기와 모으기'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화한다. 우리가 대상을 일반화하는 이유는 독립적으로 기억하기에 우리 지성이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호한 것에 일반화하고 같은 것이라 인지한다. 앞집에 있는 돌이나 뒷산에 있는 돌이나 우리는 그것을 '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같지 않다. 이름만 같을 뿐, 질량도 부피도, 모양과 색깔, 심지어 성분도 다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예로 들어보자.

두 국가의 국경은 분명 존재한다. 과연 그럴까. 국경은 관념에만 존재할 뿐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계는 지구적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미시적 관점에서 아주 모호하다. 국경선 근처에 놓인 모래 분자가 원자 단위로 쪼개질 때, 원자핵 주변에 전자는 독일의 것인지, 프랑스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의 존재는 정의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지성 범주로 대상을 일반화하는 것은 왜곡을 필연적으로 불러 일으킨다. 비슷한 것에 '명사'를 만들어 부르는 것은 우주 만물을 우리 멋대로 이름 지은 것에 불과하다. 인간과 숯은 모두 '탄소' 덩어리이고 그 함유량과 불순물로 그것의 이름을 구별하는 것처럼 정의는 그저 관념의 약속일 뿐이다.

1789년 프랑스는 혁명 중 인권선언을 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그 권리는 불가침하다.'

평등에 대한 명시적인 선언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이 선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또한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고로 누군가가 개인은 자신의 역량만큼의 성과를 얻어간다.

'능력주의'의 탄생이다. 능력주의는 말한다.

'모두는 같다. 누구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시대가 흐르며 '신분'으로 존재하던 우열이 사라졌다. '능력'으로 '우열'이 결정된다. 그것은 열등감을 만들었다.

과거에 '우열'의 존재는 '태생'부터 정의됐다.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천자'가 되고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노비'가 된다.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신'이 정해준다. 고로 자신의 위치는 '신의 계획'이지,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고로 이 시대에는 태어나면서 부여되는 '불안'이 적었다. 열등의 근원은 '자신'에게 없다. 달이 달이고, 태양이 태양인 것 처럼, 노비가 노비인 이유는 그냥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는 다르다. 빈곤한 자가 빈곤한 이유는 철저하게 자신 때문이다. 심지어 '신'은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음에도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되도록 했다. 이 사회는 필연저긍로 '열등감'을 만들어 냈다.

지구 반대편에서 '빌 게이츠' 자산이 수십조가 늘어나는 것보다 함께 하는 '동료'가 월 100만원 더 버는 것에는 조바심 난다. 열등감이란 비슷한 수준에서 뒤쳐질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사회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평등하고 비슷하다. 고로 우리가 뒤처진 이유는 우리가 열등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칭송의 대상이 된다. 비교대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사회적 존경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얻게 한다. 단순히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뛰어남을 증명한 결과물이다. 전략적 사고, 근면함, 뛰어난 지적 능력 혹은 인간성과 인관관계 등 어떤 부분에서 남들보다 우월함을 보장한다.

반대로 '빈'이란 '게으름', '우둔함', '고립', '빈곤한 지적능력'을 대변한다. 즉 지금의 위치와 자리는 모두 '스스로의 탓'이 된다. 현대 사회의 발전은 '정보의 속도'를 향상 시켰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우리는 알 필요가 없는 정보를 알게 됐으며 동네에서 뛰어난 이를 만나는 일로 벅찬 개인은 '세계적으로 우월한 이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낀다.

'사회'는 태생적으로 '상하좌우'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자원과 위치는 원래 '한정적'이다. 그것을 나눠가져가는 '제로섬 게임'에서 모두가 많이 가져가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나누는가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둘 이상이 되는 순간, '비교대상'이 생기며 '주관적 잣대'는 만들어진다. 인간 사회는 완전한 '평등'이 불가능하다. 고로 승자와 패자의 싸움에서 과거에는 존재감이 약한 '열등감'과 '불안'이라는 감정이 상대적 다수에게 퍼져 나간다.

원래 사람은 각자 차이가 존재한다. '사람'이라고 정의했으나 모든 이들은 신체적 능력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며, 성장배경과 인지능력, 인종과 언어가 다르다. 이 모든 것을 두고 '같다'고 정의한 순간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에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비문명인으로 정의한다. 이런 사회에서 낙오되는 자는 '자책'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을 받게 된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열면 학창시절 나보다 덜 떨어졌다고 여겼던 이들이 더 행복해 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으며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뒤쳐졌다는 불안은 증폭되고 사회적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레버리지'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무언가를 자랑삼아 올린다.

불안은 이런 능력주의 사회에 게임 참여자로 발을 들이는 순간 시작한다. 그렇다면 불안은 개인의 탓인가. 사회의 탓인가. 누구의 탓이라는 것을 탓하기 전에,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고,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가 어떻게 할 수 없다면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도 몰아 붙이지 않은 경쟁의 게임에 한 발 벗어나 관전을 하게 되면 결국 뒤쳐짐과 앞섬은 결국 하나의 오락이 되기도 한다.

불안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생각할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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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산책시키기 - 당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10가지 방법
벤 알드리지 지음, 김지연 옮김 / 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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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어린 시절 고생은 사서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연습'이 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면 좋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될 수 있다면 어릴 때 만나봐야 한다. 뭐든 그렇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두 번 부터는 쉽다.

바나나를 산책 시켜보자.

바나나를 산책시키는 것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다. 여기에 산책하는 바나나를 쓰다듬어 보라고 주변인에게 요구까지 해보자. 더할 나위없이 이상한 의미다. 사람들은 거절하거나 피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절 당하거나 실패해 보는 일은 일부러 많이 겪어본다. 겪으면 겪을 수록 담담해진다.

실패에 담담해 질수록 나아갈 수 있다.

실패는 성공을 향하는 카페트 같은 것이다. 즈려 밟고 나아가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밟지 않고 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

네모난 피자를 요구하거나 낯선이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이런 행동은 '거절'을 당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고로 거절을 당하면 좋다. 실패하면 성공하는 꽤 승패 없는 목적이다. 무언가를 해도 달성한다. '승낙'을 받아도 좋다. '승낙'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네모난 피자'를 얻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며, 실제 네모난 피자를 먹을 수 있게 된다.

20대 초반 수첩에 적어 두었던 글이 있다.

'평소에 다니지 않는 길로 다녀본다.'

인생이 새로워지는 방법 중 하나다. 너무 당연해서 일고의 가치도 없던 것에 '예외'를 두어 보는 것이다.

'자동차'를 처분했다. 가장 좋은 것은 '평소'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아이가 말했다. 빨리 갈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한걸음 한걸음 꼭꼭 아이의 머릿속에 추억을 심어 놓을 수 있었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손으로 양치질을 하거나,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렇다. 나이를 쌓아가면 새로운 것들이 사라진다. 실제 새로운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습관처럼 엄청나게 내리는 많은 선택들로 단순해지는 것이다. 행동에 온통 무의식적 흔적이 생긴다. 삶을 무의식에게 맡기고 나니, 의식이라는 녀석은 잡생각을 하느라 고통스러워진다.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구름 모양을 관찰하곤 했다. 바닥에 타일 무늬를 세밀하게 살펴 본 적 있다. 성인이 되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것은 아무 자극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할 때, 패달과 핸들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숟가락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온 신경을 집중했던 기억이 있다. 인생 초보 시절이다. 지금은 아니다. 모두 무의식의 역할이다. 시간이 지나면 노래를 부르거나 라디오도 들으며 운전 할 수 있다.

잡생각이 일상에 끼어들 여지가 많아진다. 습관적으로 밥을 먹고 무의식적으로 샤워를 하며, 생각없이 운전을 한다. 무의식에게 일을 밑기니, 자아는 과거나 미래를 혼자 떠나고 망상을 만들어 걱정을 안고 산다. 얼마 전,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 어리버리 했다. 경험 없는 일을 하는 나의 서투름이 어색했다. 나이가 많으면 점차 스스로 익숙한 것들로 채워 나간다. 결국 벗어나지 않는다. 고로 고립된다. 나또한 그렇지 않은가.

난데없이 '새빨간 소지품'을 사거나, 황당하게도 생전 배달주문 해 본 적 없는 샐러드보울을 주문하는 것도 그렇다. 한번의 일탈로 인생은 '무' 경험자에서 '유' 경험자로 엄청난 정체성을 획득한다. 고로 그것이 싫었던 이유를 재확인하거나 그것을 다시 좋아 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넓어진다. 삶이 다채로워진다.

세네카의 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당신의 패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일주일 동안 가장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생활해보라.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당신이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인지 자문해 보라. 상황이 좋을 때 앞으로 닥쳐올 나쁜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행운의 여신이 상냥하게 구는 동안 우리 영혼은 그녀가 돌변할 때를 대비해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이 망하더라도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았다고 하던 '일론 머스크'의 일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자기계발서나 철학서에서 많은 배움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정보로 흘러가버릴지 삶이 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지 마라. 몸으로 살아 내라."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최근 손웅정 작가의 글을 보고 삶으로 철학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것인지를 배웠다.

가끔 혼자 적막한 시간이 올때면 가끔 불평과 불만이 쌓일 때가 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상념에 젖어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긍정'을 권유하며 나는 그렇지 못할 순간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의 마음에 와닿는다.

"소리 내어 불평하지 말라... 혼자 있을 때도 하지 말라"

조용히 스스로 자신을 다잡고 천천히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무의식에 쌓여 생으로 나오고 그것은 삶이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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