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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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짓다보면 나무 모양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똑같은 토양, 기온, 강수인데도 그렇다. 같은 종자인데도 그렇다. 종자 내에 DNA 설계 때문일까. 농부의 손이 다르게 닿아서 그럴까.

같은 씨앗이라도 크기와 모양 때로는 색깔이 다르다. 이유는 생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동종 내에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부모 사이에서도 다른 형제가 태어난다. 하나의 세포에서 분열된 일란성 쌍둥이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우주 내에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돌연변이'가 생기는 이유다. 다만 사피엔스 종인 비슷한 것에 '보통명사'를 붙였다. 완전히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한 것들끼리 '가르기와 모으기'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화한다. 우리가 대상을 일반화하는 이유는 독립적으로 기억하기에 우리 지성이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호한 것에 일반화하고 같은 것이라 인지한다. 앞집에 있는 돌이나 뒷산에 있는 돌이나 우리는 그것을 '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같지 않다. 이름만 같을 뿐, 질량도 부피도, 모양과 색깔, 심지어 성분도 다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예로 들어보자.

두 국가의 국경은 분명 존재한다. 과연 그럴까. 국경은 관념에만 존재할 뿐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계는 지구적 관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미시적 관점에서 아주 모호하다. 국경선 근처에 놓인 모래 분자가 원자 단위로 쪼개질 때, 원자핵 주변에 전자는 독일의 것인지, 프랑스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의 존재는 정의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지성 범주로 대상을 일반화하는 것은 왜곡을 필연적으로 불러 일으킨다. 비슷한 것에 '명사'를 만들어 부르는 것은 우주 만물을 우리 멋대로 이름 지은 것에 불과하다. 인간과 숯은 모두 '탄소' 덩어리이고 그 함유량과 불순물로 그것의 이름을 구별하는 것처럼 정의는 그저 관념의 약속일 뿐이다.

1789년 프랑스는 혁명 중 인권선언을 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그 권리는 불가침하다.'

평등에 대한 명시적인 선언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이 선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또한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고로 누군가가 개인은 자신의 역량만큼의 성과를 얻어간다.

'능력주의'의 탄생이다. 능력주의는 말한다.

'모두는 같다. 누구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시대가 흐르며 '신분'으로 존재하던 우열이 사라졌다. '능력'으로 '우열'이 결정된다. 그것은 열등감을 만들었다.

과거에 '우열'의 존재는 '태생'부터 정의됐다.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천자'가 되고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노비'가 된다.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신'이 정해준다. 고로 자신의 위치는 '신의 계획'이지,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고로 이 시대에는 태어나면서 부여되는 '불안'이 적었다. 열등의 근원은 '자신'에게 없다. 달이 달이고, 태양이 태양인 것 처럼, 노비가 노비인 이유는 그냥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는 다르다. 빈곤한 자가 빈곤한 이유는 철저하게 자신 때문이다. 심지어 '신'은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음에도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되도록 했다. 이 사회는 필연저긍로 '열등감'을 만들어 냈다.

지구 반대편에서 '빌 게이츠' 자산이 수십조가 늘어나는 것보다 함께 하는 '동료'가 월 100만원 더 버는 것에는 조바심 난다. 열등감이란 비슷한 수준에서 뒤쳐질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사회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평등하고 비슷하다. 고로 우리가 뒤처진 이유는 우리가 열등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칭송의 대상이 된다. 비교대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사회적 존경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얻게 한다. 단순히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뛰어남을 증명한 결과물이다. 전략적 사고, 근면함, 뛰어난 지적 능력 혹은 인간성과 인관관계 등 어떤 부분에서 남들보다 우월함을 보장한다.

반대로 '빈'이란 '게으름', '우둔함', '고립', '빈곤한 지적능력'을 대변한다. 즉 지금의 위치와 자리는 모두 '스스로의 탓'이 된다. 현대 사회의 발전은 '정보의 속도'를 향상 시켰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우리는 알 필요가 없는 정보를 알게 됐으며 동네에서 뛰어난 이를 만나는 일로 벅찬 개인은 '세계적으로 우월한 이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낀다.

'사회'는 태생적으로 '상하좌우'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자원과 위치는 원래 '한정적'이다. 그것을 나눠가져가는 '제로섬 게임'에서 모두가 많이 가져가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나누는가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둘 이상이 되는 순간, '비교대상'이 생기며 '주관적 잣대'는 만들어진다. 인간 사회는 완전한 '평등'이 불가능하다. 고로 승자와 패자의 싸움에서 과거에는 존재감이 약한 '열등감'과 '불안'이라는 감정이 상대적 다수에게 퍼져 나간다.

원래 사람은 각자 차이가 존재한다. '사람'이라고 정의했으나 모든 이들은 신체적 능력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며, 성장배경과 인지능력, 인종과 언어가 다르다. 이 모든 것을 두고 '같다'고 정의한 순간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에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비문명인으로 정의한다. 이런 사회에서 낙오되는 자는 '자책'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을 받게 된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열면 학창시절 나보다 덜 떨어졌다고 여겼던 이들이 더 행복해 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으며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뒤쳐졌다는 불안은 증폭되고 사회적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레버리지'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무언가를 자랑삼아 올린다.

불안은 이런 능력주의 사회에 게임 참여자로 발을 들이는 순간 시작한다. 그렇다면 불안은 개인의 탓인가. 사회의 탓인가. 누구의 탓이라는 것을 탓하기 전에,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고,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가 어떻게 할 수 없다면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도 몰아 붙이지 않은 경쟁의 게임에 한 발 벗어나 관전을 하게 되면 결국 뒤쳐짐과 앞섬은 결국 하나의 오락이 되기도 한다.

불안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생각할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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