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자서전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지음, 김명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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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으로 눈멀고 귀먹어 말조차 못하지만 그녀는 낙관주의자였다. 1968년, 여든 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정싱인보다 더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서전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적었다.

눈 뜨고 감사함 없이 사는 우리에게 생각할 꺼리를 준다. 그녀는 눈이 보이는 친구들을 시험해 보곤한다. 숲속을 오래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 묻는다. 친구는 '별거 없었어'라고 답한다. 눈이 멀쩡한 사람도 보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보는 것에 전부인 사람들에게 본다는 것은 그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점자로 글을 읽었으나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문학을 읽고 철학서를 읽었으며 더 많은 간접 경험을 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고 가보지 못한 세상을 봤다. 과연 누가 눈을 감고, 누가 귀를 닫고 있는가.

철학에서 보는 건 그림자고 아는 것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은 진리를 파악하고 우주를 그대로 포착한다. 그림자는 실재다. 즉, 실재라 믿는 것은 대체로 그림자다.

인간은 굉장히 희한한 포유류다. 포유류는 다양한 색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호랑이가 빨간 이유다. 무슨 말일까. 원래 호랑이는 은폐를 위해 보호색을 가져야 한다. 녹지에 숨기 위해 호랑이는 초록색 털을 가져야 한다. 초록은 보호색이 되며 다른 동물들에게 잘 보이지 않도록 감춰준다. 그러나 호랑이는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이렇다. 유전적으로 '초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빨강'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또한 호랑이가 사냥하는 대부분의 동물이 '적록색맹'이다. 우리 눈에는 붉은색으로 보이는 호랑이가 대부분의 초식동물에게는 녹색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조류'는 육안으로 비가시광선을 본다. 자외선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먹이를 찾거나 방향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육안'을 사용한다. 직접 두 눈으로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하여 방향을 찾아간다.

그 말은 세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가시광선'이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동물은 가시광선을 훨씬 뛰어넘는 빛을 본다. 고로 그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히 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아주 극일부다.

우리 조상은 채집 생활을 했다. 과일을 먹는 생활 습관 덕분에 조상들은 붉은 원추 세포를 부활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붉은색을 볼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말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가시광선을 넘어 볼 수 있는 감각, 그것은 아마다 '글을 해석하는 감각'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통해, 타인과 과거, 미래, 철학을 모두 볼 수 있다면 과연 '헬렌켈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책을 읽으며 세상을 봤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책에서 본 것인지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어하는 상황까지 온다. 독서는 간접경험이다. 다만 대부분의 직접경험도 차츰 퇴색되면 간접경험과 비슷한 형태로 기억이 저장된다. 그녀는 실제로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표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한다. 시각이 퇴화한 동물이 후각에서 뛰어난 감각을 나타내거나, 그마저 퇴화한 동물이 청각에서 뛰어난 것 처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더 많이 보게 한다. 그녀는 남들이 보는 것을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부분부터의 본질을 살핀다. 그녀는 머그컵에 담긴 물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애를 먹었다. '머그컵'은 물을 담는 그릇이고 '물'은 그 안에 담겼다. 설리반 선생이 머그컵의 물을 '물'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가르킨 것이 '머그컵'인지 물인지 몰랐다. 그녀는 그것을 머그컵이라고 이해했다. 이 둘은 이것으로 고군분투한다. 가르킨 것이 '물'인지 '머그컵'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설리번'은 얼마나 '물'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했을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볼 수 있게 됐다. 출애굽기 19장에는 '아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요, 빛이요, 비전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아는 것은 사랑이고 빛이고 비전이다.

이렇게 본질을 탐구한 그녀에게서 '삶'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아 어둡고, 들리지 않아 적막하고, 말하지 못해 답답한 그녀에게 '삶'은 밝고, 경쾌하며 넓게 펼쳐진 것이었다. 주어진 것에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생긴 새로운 것에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녀는 최고의 '낙천주의자' 였다. 삶은 오르막길 뒤에 내리막길 같은 것이며, 내리막길 뒤에 오르막길 같은 것이 었다. 모두가 그녀의 삶이 내리막길이라고 정의할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오르막길이라고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왕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노예가 있을 수 있고, 노예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왕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라고 정의하는 것은 과연 '우리'인가. 혹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를 정의하기에 앞서, 혹은 그 훨씬 뒤에도 우리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으며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낙천주의'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삶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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