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뇌 살인
혼다 데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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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현실성있게 잔인해야지...'

라고 했다가,

'어? 이게 실화였어?'

라고 했다가,

'뭐? 오히려 수위를 낮춘 거라고?'

했다.

소설은 '기타큐슈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기타큐슈 살인 사건'은 사건 자체가 자극적이다. 사건의 배경지식이 전혀 없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나'로써는 애당초 설정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쓰면 당연히 소설은 재미가 있지.'

재밌게 쓰기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가져왔다고 생각한 터였다. 그것이 실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실상 소설에 더 깊게 몰입했다.

'세뇌살인'은 '짐승의 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출간됐던 소설이다. 잔인하다면 항상 언급되는 소설, '살육에 이르는 병'처럼 아주 잔인하다. 다만 '살육에 이르는 병'과는 결이 다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잔인함'을 넘어선다. 잔인하기 위해 잔인한 글이 아니라,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비현실'을 '납득해 보고자'하는 탐구(?)도 함께 벌어진다.

물론 '이런 당연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지 않은가. 과연 어떻게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을 계속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의 초반에는 일본 소설 특유의 쉽고 직관적인 문체로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살인'과 '식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살육에 이르는 병'과 비견된다는 이야기가 무색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다 독자에게 배경과 설정, 흐름에 대한 설득이 어느정도 끝난 이후에는 그 잔혹함이 몰아친다. '피와 살'이 난무하고 흔적과 과정에 대한 묘사가 역겨울 정도다.

이런 소설을 볼 때는 '시간'이 중요하다. 모두가 잠든 시간 조명을 최대한 어둡게 하고, 책을 읽기 전에 '심심함'이라는 감정을 한스푼 넣기 위해 정적인 시간을 5분정도 갖는다. 그리고 책장을 '딱' 넘긴다.

'후딱, 후딱, 후딱' 착장을 넘기며, 한참을 몰입하여 읽고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아빠, 무서운 거 봐?'

화들짝 놀라 페이지를 덥었다. 다시 아이를 재우고 몰래 거실로 나와 책장을 폈다. 한참 몰입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시 소리가 난다.

'아빠, 세뇌가 뭔데?'

'어허! 어서자!'

아이가 도서관에서 '무서운 책'을 빌려 올 때면 '그거 많이 보면 밤에 무서운 꿈꾼다.'라고 일러주는데, 그날은 아이가 아빠에게 한 소리를 했다.

'아빠, 무서운거 보면 밤에 무서운 꿈꾼다!'

'그래 그래'

하고 다시 침실에 누워 자는 척하다가 다시 읽는다.

몰입감이 얼마나 강한지, 거실에서 책을 읽다가 '택배발송'으로 갑자기 켜지는 '인터폰 화면'에 깜짝 놀란다.

'스포'가 될까봐 말하지 못했던 대략의 이야기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사건 가해자는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다. 피해자 또한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소설의 핵심은 인간이 어떻게 서서히 세뇌되고 비인간적이게 되는가이다.

사체를 훼손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떻게 사람을 고문하고 과정에서 생긴 대소변을 먹이고 혹은 사체를 처리하는지, 간혹 뉴스에서 보게 되는 알고 싶지 않은 어떤 것들도 떠오르게 한다.

가해자는 피해자들의 정신을 점차 장악하고 조종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가족을 피해자로 만드는 가해자가 되고,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심리적 지배를 통해 '살인'까지, 심지어 부모, 부부까지 죽일 수 있도록 하는 그 비인간적인 사건이 실제 사건이라는 것을 보며 '살인'이란 과연 '행위'로만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꽤 많은 유명인들 또한 다양한 '댓글'에 고통을 받다가 생을 달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지배하고자 하는 일은 '살인'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현실'은 간혹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현실'이 있다는 것이다.

참 재밌네, 하고 보면 실화인 경우가 참 많은데... 이 경우에는 참 씁쓸하고 안타까운 케이스라고 보여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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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뇌 - 초등 읽기/쓰기의 힘
김영훈 지음 / 스마트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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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재능은 50%만 유전되고, 읽기와 쓰기 같은 학업 능력은 20%만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 즉, 언어 발달은 '유전자'보다는 '경험'과 '학습'이 더 큰 원인이다.

'미국인 부모'라고 해서 영어를 잘하게 되는 유전자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미국인이라도 자란 환경이 '한국'이라면 '한국어'가 유창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영어를 잘하는 부모를 가졌다고 해서 영어 단어가 저절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공부'의 정의를 보자. '공부'는 대체로 '연구'와 그 어원을 공유하며, '학문'이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학문'이나 '기술'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바로 '이름짓기'다.

인간의 학문은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대상을 관찰하고, 이를 분류하여 특정 개념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 바로 '학문'이다.

생물학을 예로 들어보자. 생물은 동물과 식물로 나눌 수 있다. 동물은 움직이며 먹이를 찾고, 식물은 고정된 채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얻는다.

이제 동물이라는 범주를 더 나눠 보자. 동물은 척추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뉜다. 척추가 있으면 척추동물, 척추가 없으면 무척추동물이다. 무척추동물에는 곤충, 달팽이, 해파리 같은 생물이 포함되고, 척추동물에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이 있다. 척추동물에는 젖을 먹여 새끼를 기르는 포유류가 있다. 고양이, 개, 사자, 인간 등이 그 예다. 이처럼 생물학은 동물과 식물에서 시작해 점점 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분류를 통해 생물들의 체계를 정립하고 이름을 붙인다.

모든 학문은 이런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예를 들어,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그 현상에 '만유인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만유인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결국 학문은 모두 '분류학'이다. 학자들은 체계와 현상을 찾아 명명하고, 학생들은 이러한 체계를 익히는 것이다.

중학교 수학에서는 수, 무리수, 유리수, 소수 등의 분류가 있고, 피타고라스의 정리, 근의 공식, 지수 법칙 등 여러 가지 법칙들이 존재한다. 이 법칙들도 모두 이름을 붙이고 그 의미를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수학에서는 그 이름이 왜 붙었는지, 그 법칙과 공식의 유도 과정과 정의가 가장 중요하다.

사회 교과서에는 '헌법과 국가기관'이라는 목차가 있다. 사회라는 과목은 인권과 헌법으로 나뉘고, 헌법에서 국가기관으로 분류되며, 그 안에서 국회, 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등으로 다시 세분화된다.

대부분의 시험은 이러한 명명된 체계들을 묻는다. 혹은 그 명명된 이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묻는다. 국어, 역사, 사회, 과학 모두 그렇다.

이러한 명명된 것들을 익히고, 익힌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시험'이다. 그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이 '공부'다. 그런데 공부가 '유전자'일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어떤 과목이든 상관없이 '체계화하고 언어화'하는 데 익숙한 뇌가 결국 '우수한 학습능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독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은 '개인의 성공을 위해 습관이 중요하다'는 주제를 다룬다. 책의 구성은 목차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목차는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가?

  1. 개인적 승리

    • 주도적이 되어라

    • 목표를 명확히 하라

    • 소중한 것부터 하라

  2. 대인관계 승리

    • 상호 이익을 모색하라

    • 먼저 이해하고 이해시켜라

    • 시너지를 만들어라

  3. 지속적인 성장

    • 끊임없이 쇄신하라

이 책은 '개인의 성공을 위해 습관이 중요하다'는 주제를 가지고, '개인적 승리', '대인관계의 승리', '지속적 성장'이라는 세 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의 명명에 대해 세부 사항을 정의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체계를 잡고, 세부적인 사항을 분류하며 명명한다.

이렇게 분류하고 체계를 잡고 명명하는 모든 과정은 인간의 학문을 익히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체계화하고 명명하는 데 익숙한 뇌의 학습 능력은 어떨까? 당연히 우수할 것이다.

또한 글은 '문단'마다 들여쓰기를 통해 구분하고 그 '각 문단'은 소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 소주제들은 다시 모여 하나의 주제를 만들고 그 주제가 하나의 꼭지를 달성한다.

즉, 좋은 글을 읽는 것은 '체계잡힌 사고'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일이다.

학문이 아니더라도, 목표를 달성하고자 할 때는 비슷한 과정이 필요하다. 최초의 목적이 필요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하며, 그 체계에 맞는 명명이 필요하다.

비록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질 수 있다. 마치 노래를 배우지 않았어도 그냥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영어에 노출되면 영어 어휘가 늘어나고, 한국어에 노출되면 한국어 어휘가 늘어나는 것처럼 단순한 방식으로 향상될 수 있다.

다만, '인지능력'이나 '집중력', '인내력' 등의 다양한 변수가 필요하지만, 독서가 습관이 되면 이러한 능력들도 쉽게 훈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가 학업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체계적인 사고방식, 즉 프로세스를 갖추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에 맞는 여러 명사를 익히는 것이 두 번째다.

결국 '독서'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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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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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언어다. 서양 철학과 문학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언어다. 다만 희랍어는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되었기에, 그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의미만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며 목소리를 잃는 주인공을 닮았다. 소리는 잃지만 의미만은 남아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때로 우리는 백년도 안 된 '한글 소설'을 읽고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천년도 넘은 '한문 소설'을 읽으며 의미를 알 수 있는 바와 같다. 어떤 문자는 '소리'를 담고, 어떤 문자는 '의미'를 담으며, 어떤 것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소리'보다 '의미'가 '의미'있는 경우도 있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사상을 탐구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과 '플라톤'의 말은 '의미 문자'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제 한강 작가 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희랍어의 시간을 다시 읽었다. 그 순간 이 책이 나에게 전하는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소리를 잃으면 의미를 얻는다. '시소'라는 단어에는 분명 'ㅅ'이 두 번 들어 가지만, 첫번째 시옷과 두번째 시옷을 발음 할 때, 혀의 위치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게 된다. 이미 익숙해져 문자로만 존재하던 '소리'가 그 모양을 들추고 나온다. 그러한 깨달음은 과연 '소리'에만 집중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의미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잊고, 소리에 집중하느라 의미를 잃는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만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는 희랍어를 연구하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그 문자 처럼 말이다. 다만 '소리'를 잃은 침묵한 문자인 '희랍어'를 통해 여자는 잃어가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내면을 마주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며 세상의 빛을 잃으며 어둠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발견한다.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리'를 통해 소통한다. '의미'를 상실한 '소리'가 말과 글로 전달되며 진실하게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치 않는다. 이 책을 덮으며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여운은, 결국 우리 모두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들을 마주하며 가진 것에 대한 깊은 탐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짧다. 선 없이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처럼 문장과 문장이 구분없이 전체 화풍을 완성한다. 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언어다. 서양 철학과 문학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언어다. 다만 희랍어는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되었기에, 그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의미만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며 목소리를 잃는 주인공을 닮았다. 소리는 잃지만 의미만은 남아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때로 우리는 백년도 안 된 '한글 소설'을 읽고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천년도 넘은 '한문 소설'을 읽으며 의미를 알 수 있는 바와 같다. 어떤 문자는 '소리'를 담고, 어떤 문자는 '의미'를 담으며, 어떤 것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소리'보다 '의미'가 '의미'있는 경우도 있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사상을 탐구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과 '플라톤'의 말은 '의미 문자'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제 한강 작가 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희랍어의 시간을 다시 읽었다. 그 순간 이 책이 나에게 전하는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소리를 잃으면 의미를 얻는다. '시소'라는 단어에는 분명 'ㅅ'이 두 번 들어 가지만, 첫번째 시옷과 두번째 시옷을 발음 할 때, 혀의 위치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게 된다. 이미 익숙해져 문자로만 존재하던 '소리'가 그 모양을 들추고 나온다. 그러한 깨달음은 과연 '소리'에만 집중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의미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잊고, 소리에 집중하느라 의미를 잃는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만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는 희랍어를 연구하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그 문자 처럼 말이다. 다만 '소리'를 잃은 침묵한 문자인 '희랍어'를 통해 여자는 잃어가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내면을 마주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며 세상의 빛을 잃으며 어둠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발견한다.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리'를 통해 소통한다. '의미'를 상실한 '소리'가 말과 글로 전달되며 진실하게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치 않는다. 이 책을 덮으며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여운은, 결국 우리 모두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들을 마주하며 가진 것에 대한 깊은 탐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짧다. 선 없이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처럼 문장과 문장이 구분없이 전체 화풍을 완성한다.

말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와 여자는 점차 의미를 분명히 한다. '소리'와 '형상'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말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와 여자는 점차 의미를 분명히 한다. '소리'와 '형상'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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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리커버)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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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어플리케이션에 들어가면 항상 이 '소설'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몇 번을 모르쇠하다가 선택했다. 모르쇠했던 이유는 '표지' 때문인데 어쩐지 '좀비'와 '로맨스' 적절히 섞인 소재가 아닐까 해서다.

소설이 단편집이었다는 사실은 첫 단편이 끝나고 조금 지나서 알았다. 단편소설인지, 장편의 한 챕터가 끝났는지 모르고 두 번째 소설을 읽었다. 내용은 연결되지 않았다. 단편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짧게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책을 읽을 때는 나만의 방식이 있는데, 장편 소설은 짧게 끊어 읽지 않는다. 소설을 읽어야 할 시간을 정하고 자세히 읽는다. 규칙을 정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다보니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이들은 '다독'하다보면 빠르게 플롯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소설을 읽다보면 특히 '외국 소설'의 경우에는 이름이 다 비슷비슷하기도 하고 관계가 얽혀 있다보면 누가 누군지 자꾸 헷갈린다. 그런 경우에는 누군가가 정리해 둔 관계표를 검색해 놓고 보면서 읽거나 직접 관계표를 작성하며 읽기도 한다.

단편의 경우에는 관계라고 할 것이 없다. 캐릭터 등장이 적고 에피소드도 복잡하지 않다. 간단히 짧게 몇 분 씩 끊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좀비, 러브'는 이 단편집에 나오는 한 소설이 이름이다. 아버지가 좀비가 되는 괴기한 내용의 소설인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밌는 소설은 아니였다.

소설에는 부모의 불행을 막기 위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단편은 '소포'없이 봐야하기에 자세히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소설을 읽으며 조금더 내용을 풀어서 장편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물'과 '숲'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오컬트적인 소설도 흥미롭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구의 증명'이 떠올랐다. 글의 문체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다 느껴지기도 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다만 이 소설집을 읽으며 '작가'의 문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기에 그렇다고 보여진다. 소설은 모두 각자 다른 사람이 쓴 글처럼 개성있다.

소설은 '짧고 가벼워' 짜투리 시간에 읽기 좋았다. 다만 소설에 '아버지'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아서... 현 '아버지' 역을 맡은 1인으로써.. 조금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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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 브라더스 -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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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겪어봄직한 사소한 이야기다. 작가를 잊고 있다가 다시 확인하니,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의 글이다. '작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잊혀질 만큼 누군가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예전 친구와 '영화'나 '소설'의 관전 포인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대체로 재미있다는 평을 받은 작품은 모두에게 비슷한 재미를 줄 것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네이버 평점'이 나의 견해와 다른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대체로 그 작품에 대한 가늠이 가능하기도 했다.

다만 친구와 내가 느끼는 '재미있는 작품'의 기준은 꽤 달랐다. 친구의 경우, '해피앤딩' 작품을 좋아한다. 모든 갈등이 시원하게 해결되며 영화가 끝나는 작품을 선호한다고 했다. 실제 어떤 작품은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꼬와두었던 모든 갈등을 너무 싱겁게 해결해 버리며 마무리 해 버린다.

그런 작품에 나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우리 삶에서 그처럼 어떤 시점으로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나는 그런 '해피앤딩'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것 보다 더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친구의 주장은 이랬다. 현실을 표현하려면 '현실'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비현실을 '대리만족'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도 그렇다. 나의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지나치게 '선과 악'이 구분된 경우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분명하지 않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 '살인자'라는 인물에 대해 '악'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어떤 범죄를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선을 행하고 살아간다. 어떤 행위이던 거기에 당위성이 스스로에게 부여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동하지 않는다. 고로 어떤 의미에서 모든 행동은 '선'을 동반한다. 악이 왜 악이 됐는지, 행위자의 선은 어떻게 '악'으로 비춰지는지, 그것을 관찰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포인트는 '관계'에 관한 포인트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는 '허준'이다. 허준을 볼 때도 여러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관계'다. 완전히 외지에서 온 '허준'이라는 인물이 '유의태', '유도지', '임오근', '구일서', '안광익'이라는 인물과 꾸준하게 인연을 맺어간다. 이 과정에서 서로서로가 '잘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렇게 인물이 얽히며 인연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프리즌브레이크'나 '포레스트 검프'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은 이렇게 인연이 얽혀지는 관전 포인트를 담고 있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이런 의미에서 굉장히 취향저격한 소설이다. 모든 일이 각본처럼 목표를 향해 흘러가지도 않고 적당히 비극과 희극이 섞여 있으며 관계가 얽혀진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이 소설이 지극히 작가 경험담이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진실을 넘어서는 허구는 존재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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