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그래요, 그건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이해해요. 하지만 다른 건 너무 비겁한 짓이었어요. 특히 아이들까지 희생시킨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그런 일만 없었다면 지금도 어엿한 성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 아니에요.
너무 잔인한 짓이었어요. 그것도 자기 배로 낳은 아이들을어머니가 죽이다니! 물론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자발적인 죽음은 간혹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죄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이들을 죽인 건 전쟁 자체만큼이나 큰 범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모든 일을 야기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도망을 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건 내가 보기엔 너무 비겁해요. 그 인간들은 약을 먹고 죽었어요. 괴링도 음독자살을했고요.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했어요.
진짜 책임자는 저 위에 있는데도요. 히틀러죠! - P186

물론 어리석었다는 면에서는 책임이 있어요. 하지만 원래 어리석게 행동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을 약속했고, 처음 몇 년 동안은 실제로 그리될 것도 같았어요. 전쟁에 패배한 뒤 도저히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배상 협정에 묶여 있던 낙담한 국민들에게 민족의 부흥을 약속하는데 누가 마음이 동하지 않겠어요?
나치의 잔학한 행동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람은 주로 그런 시설이나 감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랬다가는 처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게 두려웠던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부 당원은 아니었어요. 그중 상당수는 그냥 평범하고 소박하고, 어쩌면 약간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이었죠.
나는 동조자가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더 많은 것을 알고있어야 했겠죠. 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간 그 미련한 당에 별 생각 없이 경솔하게 끌려 들어간 것뿐이에요. - P189

나는 인간들이 똑같은 것에 다시 한번 속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일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대중이라고 생각해요. 숙고하고 비판하는 일에는 좀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배만 부르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정치판에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의 걱정을 일부라도 해결해 주면 만족해해요. 그러지 못하면요? 그다음은 아무도 모르죠!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사회적 문제들에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보이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린 그러지 못했어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죠. 내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성숙해요. 그건 백번 인정해요. 나는 우리도 그런 교육을 받고 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우리 때는 무조건 복종해야 했어요. 복종하지 않으면 아주 호되게 야단을 맞거나 따끔한 벌을 받았죠. 그러다 보니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흘러갔고, 질서도 잘잡혔어요. 그게 바람직한 일인지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 P210

에바 같은 경우는 많았을 거예요. 유대인을 돕던 독일인친구 중에는 그 일로 위험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었어요.
나중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말이에요.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몰라요. 당시에 우리가 탄압받던 그 불쌍한 유대인들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고 말이에요. 물론 선의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 사람들도 막상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로는 온 나라가 거대한 수용소 같았어요. 자유라고는 없이 모두가 감시 속에서 살았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로는 모든 것이 이미 너무 늦었어요. 다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유대인탄압도 그중 하나였지만, 그 밖에 다른 일도 많았어요. 거기다 전쟁에 나간 가족들에 대한 걱정도 늘 달고 살았죠. 사죄할 일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P215

완전히 잘못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호도한 나치 자신들,
즉 나치 지도부만 빼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었어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계층만의 무관심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에도 늘 반복해서 볼수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무관심을 말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끔찍한 일들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어요. 또 수백 명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다 죽는 것도 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방송이 끝나면 금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즐겁게 저녁을 보내죠. 그런 걸 본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지도 않아요. 그런 게 인생이겠죠. 모든 게 그렇게 섞여 있는 게 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 P216

브룬힐데 폼젤은 나치 정권의 다른 어떤 산증인들보다더 솔직하게 자신의 기회주의를 인정한다. 그녀가 정치에대한 자신의 무관심과 훗날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전면에 내세운 것은 청소년기의 이기심과 개인적인 욕망이다. 가난의 경험, 사회적 추락에대한 공포, 부와 출세에 대한 동경, 이것이 그녀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기까지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폼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적 출세였다. 그랬기에 상사인 요제프 괴벨스의 행위들을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서 뭔가 개인적인 출구를 모색한 것이 아니라그냥 손쉽게 외면하는 쪽을 택하고 말았다. - P223

브룬힐데 폼젤의 이야기는 독재 체제의 출현을 간과하다가 나중에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즉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기회를우리에게 제공한다. 또한 오늘날의 포퓰리스트들이 서구적 색채의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것을 팔짱만 끼고 지켜보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우리가 현재 백여섯 살의 브룬힐데 폼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녀의 노골적인 <비겁함>과 비정치적인 태도속에서 현재에도 오래전부터 다시 번성하기 시작한 무언가를 뚜렷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범하게 퍼져 있는정치적 무관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이하자면 난민들의 운명,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타오르는 증오, 그리고 민주주의와 유럽의 통합에 강력한 투쟁을 예고한 우익 포퓰리즘의 새로운 비상에 대한 정치적 태만과 무감각이다.
브룬힐데 폼젤의 노골적인 이기심, 나중에 방송국 기자가 된 불프 블라이의 매력적인 이직 제안, 출세욕과 상류층에 끼고 싶은 욕망, 이것들이 그녀가 나치당에 가입하고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게 된 주된 동기였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나치 핵심부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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