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라고? 개나 줘 버리라지. 경험이 풍부한 생물학자일수록 생물계의복잡한 구조와 연결 고리를 더욱 오래, 그리고 더욱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그 과정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장하며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서로를 원조하고 돕는다는 직감 또한 점점 강렬해진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서로 헌신하면서, 자신이 상대에게 효율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경쟁 체계가 존재한다면그것은 지엽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균형이 깨졌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나뭇가지들이 빛을 향해 서로 밀치며 자라나고, 뿌리들이 샘에 닿기 위해 경쟁을 벌이며, 동물끼리 서로를 잡아먹긴 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인간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두려울 정도의 조화와 일치가 깔려 있다. 우리 모두는 거대한 하나의 몸체로 이루어진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내전에 불과하다. 살아 있다(이것 말고 대체 어떤 어휘를 사용할수 있겠는가.)는 것은 100만 가지의 특성과 자질을 아우르고 있다는 뜻이며, 삶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류나 잘못 또한 없다. 죄를 저지른 자도, 무고한 자도 없고, 공이나 과도 없으며, 선과 악도 없다. 이러한 개념을 만든 당사자는 인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 P432

그 시절, 6월의 밤을 그녀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기억은 천천히 홀로그램의 심연을 열기 시작한다.
어떤 날들은 아주 손쉽게 끄집어낼 수 있다. 또 어떤 날들은 시와분까지도 명확히 떠오른다. 고정된 이미지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같은 순간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마치 모래밭에서 고대의 해골을 발굴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뼈 한 개만 보이지만, 솔질을 계속 하다 보면 점차 다른 부위가 나타난다. 그러다 마침내 복잡한 인체가 구조를 드러내게 된다. 관절과 마디들, 그리고 육신의 시간 그동안 지탱해 왔던 구조물이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 P436

"지속적인 고통과 점진적인 마비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는 그런상태를 한번 상상해 봐. 그래도 뭐, 어떻게든 고통을 참을 수는 있었을 거야.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날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지금겪는 이 고통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며 앞으로도 이 고통에 대해아무런 보상도 없으리라는 생각, 매 시각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질것이며 그렇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는생각, 열 개의 통증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환각으로 지어진 지옥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지옥의 여정 속에서 인도해 주는 안내자가 한 사람도 없고 손잡아 줄 이 또한 아무도 없다는 생각, 아무도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건 실은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어떤 형벌도 포상도 없으리라는 그런 생각 말이야." - P437

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중년 여인이 되면 타인의 눈에 절대 띄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비단 남자들뿐 아니라, 직장에서 그녀를 더는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는 다른 여자들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과 뺨, 코를 훑어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미끄러져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상당히 새롭고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관통했다. 아마도 그들은 투명한 그녀의 육체 너머에 있는 광고판과 풍경, 열차 시간표까지 보았으리라. 그렇다. 그녀는 투명 인간이 된 게 틀림없었다. 다시 말해 이제 막 사용법을 익히기 시작한, 무궁무진한 능력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여기서 어떤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리라. 증인들은 이렇게 증언할 것이다. "어떤 여자였는데••••••." 또는 "누군가가 여기에 서 있었는데••••••." 귀걸이 따위를 주목하는 여자들과 비교해 보면 남자들은 훨씬 더무례하다. 그녀가 귀걸이를 걸고 있었다 해도 그들은 단 1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을 테니까. 어린아이들만 이따금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그리고 무심하게 응시하다가 미래를 향해 얼굴을 돌려 버린다. - P450

그가 전화로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괜찮은거야?"
쿠니츠키가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지만 그는 알았다. 그들이지금 마지막 대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부엌은 결투장이 될 테고, 거기서 그들은 각자 공격 태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식탁 근처에 자리를 잡을 테고, 그녀는 창문을 등지고 설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리고 그는 알았다. 이 중요한 순간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왜냐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정말 마지막이자 유일한 순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진실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는 또한 알았다. 자신이 지금 지뢰밭을 밟고 있음을. 모든 질문은 폭탄이 될 것이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시도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자 그는 자신이 마치 옷 속에 폭탄을 감춘 테러리스트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폭탄은 그들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터질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리라. - P537

불을 피울 만한 땔감도 없었다. 눅눅하고 차가운 이끼와 불길조차 집어삼키려 하지 않는 희귀한 덤불뿐이었다. 그들은 이끼덮인 바위틈에서 침낭에 들어가 그날 밤을 보냈다. 먹구름이 사라지고 얼어붙은 하늘에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자 그들은 용암 덩어리가 얼굴의 형상을 취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속삭임과 중얼거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지의 따뜻한 온기를느끼기 위해 이끼 아래, 돌 밑에다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미세한 진동과 움직임, 그리고 호흡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의심의 여지가없었다. 대지는 살아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통해 그날 밤 별일 없이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를 깨우쳤다. 그들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있으면, 대지는 기꺼이 자신의 따뜻한 젖꼭지를 내어준다고 아이슬란드인들은 말했다. 그러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젖꼭지를 빨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모유를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그 모유는 아마도 수산화마그네슘 같은 맛이리라. 위산 과다증이나 속 쓰림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약국에서 판매하는 바로 그 약품 말이다. - P545

나는 펠로폰네소스 해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양이라고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손이 아닌, 위대한 어머니의 손 모양을닮았다. 자식을 씻길 목욕물의 온도가 적당한지 확인하기 위해 물속에 담근 어머니의 손. - P552

그러나 교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의 강물이 흘러넘쳐 붉은대양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닷물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범람했다. 먼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유럽의 한 평원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다리,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어렵게 지은 댐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갈대숲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집 문턱까지 침범했고, 과감하게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돌바닥에깔린 붉은 양탄자와 토요일마다 문질러 닦던 부엌의 나무 바닥을 휩쓸더니, 마지막으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고 찬장과 테이블까지 덮쳤다. 그다음으로는 기차역과 공항,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교수가 고향을 떠난 바로 그곳을 집어삼켜 버렸다. 또한 그가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과 거리들이 전부 물에 잠겼다. 그가 임대해서 지내던 방, 싸구려 호텔,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점도 모조리 사라졌다. 붉게 빛나는 그 수면은 그가 너무도 사랑하던 도서관의 첫 번째 서가를 공격했다. 책장들이 물에 젖어 퉁퉁 불었다. 표지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혓바닥이 문자들을 핥았고 검게 인쇄된 활자를 지워 없앴다.
자녀들이 졸업장을 받은 학교의 계단과 마룻바닥도, 교수 임명을 받기 위해 자랑스럽게 달려가던 도로도 전부 붉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와 카렌이 함께 누워 늙고 노쇠한 육신을 처음으로결합했던 침대 시트도 붉게 물들었다. 붉은빛의 그 끈끈한 점성액체는 그가 자신의 신용 카드와 비행기 표, 손자들의 사진을 넣어둔 지갑의 칸막이도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물살은 기차역과 철로, 공항과 활주로를 모조리 덮쳤고, 이제는 그 어떤 비행기도, 그 어떤 기차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수면은 끈질기게 상승했고, 말과 개념과 추억을 모두 집어삼켰다. 가로등 불빛이 모조리 꺼지고 전구들이 터져 버렸다. 전선은 끊어지고 네트워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죽은 거미줄이되어 버렸으며 전화기는 먹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느리고 무한한 대양이 마침내 병원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아테네 전체가 핏물에 잠겼다. 신전들, 성스러운 길과 수풀들, 이 시각엔 늘 비어있는 아고라, 여신의 빛나는 조각상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올리브나무까지 모두.
그녀는 계속 그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불필요한 장치를 그에게서 떼기로 결정하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리스 간호사가 단 한 번의 능숙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얼굴을 시트로 덮는 순간까지. 시신은 화장했다. 유골은 그의 자식들과 함께 에게해에 뿌렸다. 이런 식의 장례를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고 믿으면서. - P587

누가 이것을 읽을 것인가?
곧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승무원들이 게이트 앞에 서서 승객을 맞을 준비를 끝내자 지금껏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승객들이벌떡 일어나서 기내 수화물을 챙긴다. 탑승권을 뒤적거리고, 채읽지 못한 신문을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각자 머릿속에서 말없이 양심의 성찰을 한다. 여권과 표, 서류 등등을 모두 챙겼는지, 환전은 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그리고 그곳에 가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제대로된 방향을 선택했는지.
천사처럼 아름다운 승무원들이 우리의 여행 적합도를 확인하고 난 뒤, 호의적인 손짓으로 우리를 들여보낸다. 폭신한 카펫이 깔리고 둥근 벽이 에워싼 터널 속으로, 이 터널을 통과하여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차가운 공중 도로를 날아서 새로운 세계로 향할 것이다.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미소에는 일종의 약속이 담겨 있다. 그 미소가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 P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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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 ㅡ 차별을 차별로 인식하는 것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 차별을 경험하더라도, 정리된 언어로 해석하고 주위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하면 스쳐 지나가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 경험들을 내가 대항하고 싸워야 할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계속 넘어가게 된다.
김승섭 ㅡ 어떤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차별이 어디 있냐?"라고 묻기도 한다. 소수자가 차별 경험을 말하려면 "내가 동성애자다", "HIV 감염인이다"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야 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그 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워 차별을 당하고도 참게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당시와 마찬가지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한국 사회에 등장하는 차별 경험의 숫자는 급증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부당한 경험을 말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사회 구석구석에서 혼란이 생겨날 거다. 그 혼란은 차별당하고도 말하지 못했던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국 사회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혼란이다. 그 억눌렸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새로운 무게중심을 찾아야 한다. - P223

김승섭 ㅡ 많은 사람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만을 금지하는 법이 아니다. 성소수자는 차별금지법이 보호하는 수많은 집단 중 하나이고, 차별금지법은 혐오 표현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주요영역(고용, 교육, 행정서비스, 재화·용역의 공급과 이용)에서 혐오의 근간이 되는 차별 행위를 막기 위한 법이다. 차별은 무인도에서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만나 생겨나는 일이 아니다. 이 법이 중요한 이유는 차별을 개인 간의 갈등이 아니라, 한 사회의 불평등한 역사와 구조가 만든 권력관계의 자장 위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 P225

김승섭 ㅡ 미투가 보여주는 건 개인이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넘어서 실제 어떤 조직에서 이런 일이 만연하다는 증거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폭로에서 조직문화의 문제점을 바라보지 않고 초점을 피해자에게 두고서 그 개인이 어떤 사람인지만 계속 물어요. 성폭력이 진공상태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잖아요.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역사와 권력과 문화가 있는 건데, 이런 걸 놔두고서 개인에게 자꾸 짐을 지우고 있지요.
서지현 ㅡ 왜 아직까지 한국은 개인이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할까요.
왜 나의 모든 걸 내던질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걸까요. 저 역시 더 이상 검사는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더 나아가 변호사도 할 수 없을 거고요. 검찰 출신 변호사가 검찰에 밉보이면 변호사로 일하기도 쉽지않아요. 모두 내던지지 않고서는, 앞으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각오 없이는 입을 열 수 없었어요. - P255

하이젤든 박사가 신생아 볼린저가 죽도록 허락한 것을 두고 삶의 신성함에대한 여러 논쟁이 진행 중이다. 박사의 결정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삶‘에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삶은 단순히 숨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물론 그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런 삶에 가치가 없다는 점은 인정할 것이다. 삶을 신성하게 만드는것은 행복과 지성과 능력의 존재 가능성이다. 열등하고, 기형이며, 마비되고, 생각할 수 없는 생명체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헬렌 켈러는 이 글에서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으로 인간의 경계를 나눈다. 기형이고 마비된, 특히 지능이 낮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생명체는 존엄한 인간의 경계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판단은 누가 어떻게해야 하는가?

정신적 결함을 가진 사람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누군가가 천치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의사 배심원들이 고려하는 증거들은 정확하고 과학적일 것이다. 그들이 확인한 내용은 편견이 없고, 훈련되지 않은사람들의 관찰에서 생기는 부정확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울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진정으로 천치인 경우,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경우에만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그 판단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훈련받은 전문가이자 과학자인 의사가 해야 한다. 이런 사안은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들도 다른 전문가들처럼 자신의 지식을 남용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아기가 사망하기 전에 그 판단의 근거를 대중에 공개한다면, 실수나 남용의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의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우리는 하이젤든 박사가 보여준 뛰어난 인간애와 비겁한 감상주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 P277

당황스러운 글이다. 장애인 당사자였던 헬렌 켈러는 장애인권 운동에 참여하며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체제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 1944년 헬렌 켈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농인과 맹인에게서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주 정부의 예산 집행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초라한 건물의 학교들을 방문했다. 그들은빈곤 속에서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적절한 교육과 의료서비스를찾을 수 없었고, 사람들은 차별 때문에 구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 이 부유한 나라에서, 다른 인종[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과 여성이 그처럼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는데 국가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막강한 방해물을 넘어서 맹인인 유색인종들이 자신들의 존엄과 용기를 지킬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장애의 역사248~249쪽) - P279

마지막으로, 헬렌 켈러는 신체적 손상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장애가 된다고 보는 현대 장애학의 관점, 몸의 차이를긍정하고 장애를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여기는 장애 인권 운동의 감수성을 접할 수 없는 시대를 살다 갔다.
더구나 1887년 헬렌 켈러를 퍼킨스 맹인학교와 연결시켜준 인물은 다름 아닌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o]었다. 전화기 발명에 기여한 과학자이자 농인 교육 이론가였던 벨은 수어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확고한 구어주의자였다. 그는 수어를 언어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사용이 농인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벨은 독순술과 결합된 구화법이 "가장 위대한 길"이라고 말했고, 평생 동안 벨을 따르고 의지했던 헬렌 켈러는 이러한 구어주의를 "19세기의 가장 신성한 기적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수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어 사용을 주장하는 농인 공동체의 주장에 반대했다.
킴 닐슨은 「헬렌 켈러의 급진적 삶에서 앤 설리번을 포함해 헬렌 켈러와 가까이 지냈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녀가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녀 스스로도 농인 단체나 다른 장애인 단체의 연설 요구를 반복적으로거절했다고 서술한다. 그것은 헬렌 켈러를 ‘기적의 존재‘가 아닌 장애인 중 한 명으로, 그 집단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헬렌 켈러는 농과 맹을 가진 개인이었지만, 스스로를 억압된 소수자 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성참정권, 인종 불평등, 전쟁, 자본주의에 대해 냉철하게 정치적 분석을 하던 헬렌 켈러는 장애를 두고서는 비슷한수준의 분석을 하지 않았다. 혹은 하지 못했다. 맹인의 교육과인권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지만, 비장애중심주의·장애차별주의의 구조와 모순을 파고들어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개인의 적응과 노력에 초점을 맞춘 대안을 찾았다. 헬렌 켈러가 ‘선택한‘ 이러한 전략은 결과적으로 당대의 인권운동가들이 장애의 정치적 함의를 논하고 장애 인권을 주장하는 데 방해물이되기도 했다.
당대의 시간을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냈던 헬렌 켈러의 삶에는 많은 사람이 경이롭게 생각하는 성과만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함께 새겨져 있다.  - P284

타인의 고통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러면 조금 침묵하고 기다릴 수 있잖아요. 판단을 유보하고 배워가야지요. 우리가 그만큼알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함부로 말하면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몇몇 정치인은 그 저열함에 기대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요. 하지만 나에게 편견과 고집이 있다고 해서 공공장소에서, 사람들 앞에서 마구마구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타인의 삶에 대해 판단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조심스러움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한국 사회에서 그 조심스러움이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던 것 같고요.
어쩌다 보니 제가 천안함과 세월호 연구를 모두 했던 유일한 사람이에요. 제가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세월호 참사 생존자 곁에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이긴 하니까, ‘천안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세월호 참사를 모욕하지 않으면서, 두 사건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상처를 비교해서 어느 한쪽을 덧나게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 P298

김승섭 ㅡ 이런 사건에 덤벼들 수 있는 건 제가 공부하는 사람이어서예요. 저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 빚지고 있어요. 수많은 희로애락과 온갖 일을 겪으면서 기록하고 표현하고 또 이해하려고 애썼던 역사를 저는 아주 일부분이지만 읽고 습득했고, 그 토대위에서 세상을 보고 있으니까요.
예민한 사건들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감각을 곤두세우기 위해 내 몸을 사건 속에 던져놓는 씨줄과 논문과 책을 읽는 공부를 하면서 사건을 바라볼 통찰을 찾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을 계속 찾는 과정이에요. 그 둘이 만나는 지점을 최대한 넓히고, 그 안에서 글을 쓰려고 해요. 공부만 되고 마음이 안 나가는 글은 논리적일지 모르지만, 딱딱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어렵고요. 학술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데 감정적인 글은 투정을 부리는 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교집합을 찾는 게 내내 어려운 점이에요. 그 과정을, 나의 감정과 나의 관계 속에서 계속 출렁이듯이 헤매면서 버티는 것 같아요.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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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거대한 논란을 일으킵니다. 많은 사람이 프로그램의 효과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법적으로 금지된 마약을 사용하라고 돕는 일에 세금을 쓰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런다고 HIV감염이 줄어들 리 없다‘라는 생각이었지요. 논쟁 속에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사회는 ‘과연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이 HIV 신규감염을 줄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마약사용이 증가하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논쟁 속에서 1996년 역사적인 논문이 학술지「랜싯』에 발표됩니다. 돈 잘레이스Don Jarlais 교수 연구팀은 「뉴욕의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과 마약 사용자 집단에서의 HIV발병률」이라는 논문에서 뉴욕 지역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의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마약사용자들은 연간 100명당 1.56명이나 1.38명이 HIV에 감염되지만, 그렇지 않은 마약 사용자들은 연간 100명당 5.26명이나6.23명이 감염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주삿바늘 무상 교환프로그램이 HIV 신규 감염을 3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결과입니다. 이 논문은 그 논쟁적인 프로그램의 효과를 증명한 최초의 연구입니다. - P181

분노나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를 실제로바꾸는 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불법인 마약 사용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주삿바늘로 전파되는 HIV 감염 역시 함께 막을 방법이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정책을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뉴욕시 보건담당 부서는 실현 가능하면서도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HIV/AIDS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정책을 고안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P182

이렇게 말하면 HIV는 당뇨나 고혈압 같은 다른 만성질환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 바이러스의 전파를 바라보는 시각도 획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성관계 시 콘돔을 사용하면 바이러스 전파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놀라운 연구 결과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7년 9월 27일 미국질병관리본부 웹사이트에 공지된 서한을 통해 공식적으로세상에 알려진 내용입니다. 미국질병관리본부 HIV/AIDS 분과 책임자인 유진 매크레이 Eugene McCray는 이 서한에서 HIV 감염인이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아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일정 수준이하로 내려가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도 동성 간이나 이성간 모든 성관계에서 파트너에게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 - P183

HIV 감염인은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HIV 감염인을 PL, 즉 ‘HIV 감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People Living with HIV infection‘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당뇨병 환자Diabetic patient를 ‘당뇨병을 가진 환자 Patient with diabetes‘ 라고, 조현병 환자 Schizophrenic patient를 ‘조현병을 가진 환자 Patient with schizophrenia‘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동의를 얻기 시작한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질병 이상의 존재이고, 질병을가지고 살아가는 시간 역시 잘라낼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기때문이지요.
혐오는 쉽습니다. 가장 약하고, 아픈 당사자들을 욕하면되니까요. 어떤 이들은 HIV 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라고 함부로 손가락질합니다.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혐오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증가시키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한국 사회의 HIV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첫걸음은 혐오와사회적 낙인을 거두고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수십 년간 과학 연구를통해 인류가 알게 된, HIV 감염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 P188

김도현 ㅡ 제가 얼마 전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OECD 회원국의 평균 장애인구 비율이 24.5%더군요. 한국은 5분의 1 수준인 5%에 불과하고요. 장애인으로 인정되는 인구가 늘어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한 낙인이 접점 줄어드는 과정과 함께 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PL분들이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을 장애라고 이야기할수 있다는 건, 장애인 운동의 성과 속에서 장애에 대한 낙인이 일정 부분 감소되고 장애가 좀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구 비율과 관련해서 조금 더 주목해 볼 만한 국가들이 존재하는데요. 바로 한국의 장애인 운동이 탈시설지원법을 성안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입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2000년대 중반 탈시설을 완수해서 장애인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인 동시에, OECD 회원국 중 정부에서 공식적인 장애인구 통계를 국제기구에 제출하지 않는 유이한국가들이기도 합니다. 이는 두 나라 정부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적장애 모델에 입각해 장애를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즉, 장애란 어떤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특질(손상) 자체가 아니라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므로,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장애인구를 산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두 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기 나라의 인구 중 장애인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서비스 지원 과정에서 꼭 장애라는 개념을 거치지 않더라도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고, 차별 금지의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종의 신청주의에 입각해 사례별로 판단하면 되니까요. - P200

김승섭 ㅡ 기득권의 언어는 논리적으로 깔끔하고 잘 정리된 것처럼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명확한 언어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을 말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이는 사회적 약자가 ‘언어의 부재‘로 고통받는 이유이기도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미 고착화된 세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말하며 그 강고한 장벽에 몸을 부딪치면서 만들어 내는 균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제 여건이 마땅치 않아 기고 요청에 많이 망설였는데, 김도현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비마이너』에 글을 써달라는 김지영 선생님의 말씀은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쉬운 답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동년배 활동가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두 분 오늘 감사했습니다. - P204

김승섭 ㅡ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조차 동성애자 집단에서 HIV 감염 유병률이 높다는 이유로 동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질병의 유병률이 높다고 그 집단을 병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또한 예방차원에서 병의 원인은 변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질병은 나이가 들면 발생 위험이 늘어난다. 그러나 나이 듦이 원인이니 나이를 줄이자고 제안할 수도 없고, 제안해서도 안 된다. 나이는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 같은 성적지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인정해야 할 존재의 일부이지, 바꿀 이유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오페라리오 ㅡ 동의한다. HIV 감염의 위험 요인 중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성적 지향이 아니라, 사회적 낙인과 배제이다. 더 인도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HIV 감염을 바라봐야 한다.
한편 미시적 수준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이다.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성매매 등으로 HIV 감염이 많이 퍼진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는 이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할 건가? 어떤 사회에서는 대다수 여성의 HIV 감염 경로가 부부 간 성관계이다. 그곳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원인인가? 모든 사회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이다. - P210

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예민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오갔습니다. "동성애에 대해 교육하면 결국 동성 간 섹스에대해서도 직접 말하게 될 텐데 괜찮을까요?" 제 건너편에 앉은 한 어머니가 던진 질문에 5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답했습니다. "물론 그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있겠지요. 그때마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안전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답을 했어요. 지금까지 아이들은 제 답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교에서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이유였습니다. 성적 지향만이 아니라 인종, 성별, 출신 국가, 경제적 상황 등에 따라 다양한 소수자가 학교에 있는데, 이 사건을 방치한다면 다른 소수자들이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P214

한국의 한 거대 정당은 선거 때마다 ‘동성애 반대‘를 구호로 내겁니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세계적 흐름에서 낙오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수십 년을 정치인으로 살아온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진심으로성소수자를 혐오하거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혐오는 저열한만큼 편리하니까요. 전자라면 노예제 찬성론자나 여성차별론자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맞고, 후자라면 자신이 소수자 혐오를 통해서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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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 P108

해고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갑자기 ‘산자‘와 ‘죽은 자‘로 나뉘어 어제까지형, 동생 관계였던 ‘산자들이 "나라 망치는 빨갱이"라고 욕하는것을 경험하며 생겨난 트라우마가 큰 상처였다. 그런데 해고 노동자의 아내들도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어제까지 같은 아파트에서 언니, 동생 하며 함께 다니던 이들이 남편의 ‘생존‘ 여부가 갈리자 길에서 마주쳐도 눈맞춤을 피했던 것이다. 그 인간적 배신감이 때로는 남편의 정리해고 자체보다 더 아팠다.
남편들이 투쟁하는 동안 집안을 감정적·경제적으로 돌보는 것은 아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정리해고와 그 이후 투쟁과정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돌보며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시댁에서는 "너라도 남편 마음 편안하게 해줘야 되지 않겠냐?"라며 격려 아닌 격려를 했고, 친한 친구들은 "그렇게 힘들면 남편과 이혼을 하든지 해라"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상처는 안에서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들에게 "당신은 괜찮은가요?"라고 묻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P112

일하고 살아가는 공간에 나를 위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화장실이 있더라도 그걸 이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그 공간이 나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사회가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당신을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가학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수자들이 사회 곳곳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합리적인‘ 근거가되어,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화장실의 부재는 일터와 대학과 국회를 비롯한 공공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근거로 작동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트랜스젠더나 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 P125

야간 교대 노동이 발암 요인이라는 근거는 학술적으로도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2007년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교대제 근무shift work"를 납과 같은 등급인 유력한 발암물질 IARC 2A(Probable Carcinogens)로 분류했습니다. 전 세계 노동인구 중 20% 정도가 야간 노동이 수반되는 교대제근무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결정이었지요. 2019년 7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제암연구소에서 주최한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 27명은 2007년의 분류결정 이후 출판된 논문을 재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이들은 교대제 근무를 여전히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며,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발암물질의 이름을 "야간 교대제 근무night shift work"로 바꿉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뿐, 야간 교대제 근무는 유력한 발암물질입니다. - P134

같은 인간이지만 경쟁하는 무대 자체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코끼리가 전쟁으로 동료와 부모가 무참히 죽어나가던 고롱고사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코끼리는 안전한 국립공원에서 보호받으며 지내는 것처럼요.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2011년 『지역보건과 역학』에 발표된 이화여자대학교 정최경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사망 불평등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1995~2000년에 태어난 어린이를 기준으로 1~4세 영유아는 아버지가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경우,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경우와 비교해 사망률이 2.5배 높았습니다. 5~9세의 경우 이 수치는 2.8배로 증가합니다. 이러한 사망률 차이의 가장 큰 원인은 교통사고를 비롯한 사고성재해입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위험한 지역에서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대개 사고를 당했을 때 즉시 필요한 응급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 환경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더 자주 다치지만 더 늦게 치료받습니다.
진화의 힘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하지요.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목숨이 계속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인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롱고사‘는 어디인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지, 이 부조리한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밀렵꾼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 P136

2022년 8월 8일, 폭우가 내리는 동안 서울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졌다. 46세 홍 모 씨는 갑자기 쏟아진 빗물에잠겨 발달장애를 가진 언니, 자신의 10대 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물이 들이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해 며칠을 서성였다. 참사 이틀 뒤, 서울시에서는 ‘지하· 반지하‘를 주거 목적으로 짓는 것을 전면 불허하고, 향후 20년 안에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안전대책‘ 발표 다음 날, 숨진 홍 씨가 2018년에 내가 책임연구원으로 진행했던「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 연구」의 참여자였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세월호 참사가 떠올랐다. 가라앉는 배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했던 304명처럼, 반지하방에 살던 세 가족은 물에 잠겨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2014년, 살릴 수 있었던사람을 살리지 못했던 참사를 두고 당시 대통령이 내놓았던 대책은 ‘해경 폐지‘였다. 구조 과정에서 무책임했던 해경을 처벌하는 일은 필요했지만, 해상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기관을 성급히 폐지하는 것이 미래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대책일 수는 없었다. 두 사건 사이의 8년을 돌이켜 보면 질문이 남는다. 해경폐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대책‘이었을까.
서울시의 대책은 얼마나 다를까. 장기적으로 반지하방 거주자가 줄어야 한다는 데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반지하를 좋아해서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반지하방은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햇빛이 들지 않는 자리까지 찾아간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반지하방이 없어지면 그들은 더 안전한 곳을 선택해 살 수 있을까. 정책 결정 과정에 지하와 반지하에서 살고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반영됐는가. 그 복잡한 맥락을 헤아릴 시간도 가지지 않은 채 반지하방 주거 금지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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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우리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는 데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이 시대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께서 (부디 제 신랄함을 용서해 주시길.) 시계의 태엽을 감는 사람 즉 시계 제조 장인이거나 인간의 모습이 아닌 매우 모호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정령‘과 같은 존재라면, ‘영혼‘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불편하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지배자가 이런 덧없고 순간적이고 애매한 것을 다스리려고 하겠습니까? 실험실에서 그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것들을 향해 권력을 휘두르고싶어 하는 계몽군주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폐하, 인간의 진정한 권력은 인간의 육신에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가가 만들어지고 국가 간에 국경선이 수립되었다는 것은 결국 명확히 규정된 공간에만 인간의 육체를 머물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자와 여권이 만들어졌다는 건, 이동과 움직임의 자연적인 필요성을 제한하고 조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금을 부과하는 통치자는 자신의 국민에게 어떤 것을 먹이고 어디서 잠을 재울지, 비단옷을 입힐지 마직 옷을 입힐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 P396

마찬가지로 폐하께서도 어떤 시신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결정하십니다. 모유가 가득 찬 어머니의 가슴이 모든 아이에게 고른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언덕에 자리한 궁궐에 사는 아기가 싫증 날 때까지 젖을 빠는 동안, 계곡의 작은 마을에 사는 아기는 얼마 남지 않은 젖에 만족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 수천 명의 육체를 피바다로 밀어넣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다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왕이 되시는 것이며, 그것은 가장 큰 나라의 황제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저는 당신, 삶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폭군, 압제자에게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저는 간청하지 않고, 저만의 방식대로 당당히 요구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을 수 있도록 제게 돌려주십시오. 폐하, 저는 당신을 끝까지 따라다닐것입니다. 어둠 속의 은밀한 음성처럼, 저는 죽어서도 결코 당신에게 평화를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속삭임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요제피네 졸리만 폰 포이히터슬레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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