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순신 개인사에 있어서 3대 대첩을 꼽는다면 한산도대첩(1592.7.8)과 명량대첩 (1597.9.16) 그리고 노량해전(1598.11.19)이다.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쟁 향방을 바꿨다. 명량해전 역시 기적 같은 승리였고 정유재란의 전쟁 양상을 바꿨다. 그러나 노량해전은 승패 여부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어차피 끝나게 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침략 전쟁에서 실패하고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이순신이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길을 막고 벌인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또한 노량해전은 전투 규모만 따지자면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합친 것보다도 규모가 컸다. 임진왜란사를 뛰어넘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꼼꼼하고 객관적인 기록을 남겼다. 수하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기록하는 한편 이름 없는 노비 출신이 공을 세워도 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순신이 싸워왔던 전투들은 이순신이 조선 조정에 올려 보낸 장계와 <난중일기> 등을 통해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노량해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기지 못했다. - P348
분명히 노량해전은 기존에 이순신이 싸워온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명량해전 이전의 이순신은 전투 중에도 철저한 아웃복싱을 선호했고, 지형을 이용한 장거리 함포 사격을 통해 대부분 우위를 가져왔다. 다만 명량해전에서는 겁을 먹고 물리서는 아군들에게 보란 듯이 1척의 판옥선으로 수십 척의 일본의 전함들과 맞서서 오전 내내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는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전투의 승리가목적이 아닌 우리 강토를 침략했다가 돌아가는 외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게 목적인 전투였기에, 애초에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작전 따위는 성립되지 않았다. 조선군들 눈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일본군도그것을 느꼈을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다. 일본군 역시 지금껏 이순신 함대를 보기만 하면 도망다니던 때와는 달랐다. 함대 수가 무려 500척에 달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이곳에서 물러서면 고니시의 1만5천군이 전멸당할 상황이었고, 이 전투에서 이겨야만 자신들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다 위에 생사를건 처절한 싸움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각자 분명했다. - P359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전사‘
‘대장선이 멀쩡한데 어찌 사령관이 전사했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전염성이 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판옥선의 갑판에서 엎드려 울었고 갯벌에서 무릎을 꿇은채 울었다. 7년간 조선인들을 몸서리치게 했던 지옥 같은 전쟁이 비로소 끝났는데, 그는 죽어버렸다. 나라를 구했고 백성을 살려놓은 이가 죽어버린 것이다. 묘한 감정에 북받쳐 울었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고금도를 비롯한 인근 완도의 여러 섬 주민들은 대성통곡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근방의 강진과 해남, 진도의 주민들까지 하늘을 원망하며 울었다. 진린 역시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땅바닥을 뒹굴며 곡을 하였다.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명나라 군사들도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
이순신의 시신은 판옥선에서 내려졌다. 진린이나 이순신의 측근 제장들은 시신으로 누워 있는 이순신의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건 상식이다. 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웠을 것이기에, 그리고 역사에남을 영웅의 마지막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순신의 영구는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고금도에 묻혔다. 이순신의 사망 소식에 남도 백성들은 모두들 흰옷을 입었고 입에 고기를 대지 않았다.
이순신의 시신은 20여일 후 가족들이 있는 아산으로 옮겨졌다. 전라도 완도의 고금도에서 충청도 아산에 이르기까지 운구 행렬이 움직이는곳마다 백성들의 통곡이 이어졌고, 수많은 백성들이 수레를 붙잡고 울어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 P365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징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많이 나와 울었으니,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동정을 얻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덕형의 장계> - P367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 아들 히데요리를 받들었던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던 동군이 일본의 패권을 두고 싸웠던 세키가하라전투(1600)가 한창이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면서 에도막부가 들어서게 된다.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서군이 패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고니시와시마즈군의 세력 약화였다. 가장 용맹하다는 시마즈군의 병력 중 겨우2,000명만 가담할 정도로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역할이 미미했다. 이순신과 노량에서 격돌하며 엄청난 병력 손실을 당했으니 도리가 없었다. 소수의 시마즈군 병력이 다수의 동군을 돌파해 자신들의 근거지인 규슈서남부의 사쓰마번까지 후퇴한 시마즈의 퇴각은 지금도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다룬다. 에도막부가 시마즈를 끝까지 공격했지만 시마즈는 끝내 그 공격을 버텼고, 에도막부도 시마즈 가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당시 반침략 세력이었음을 내세우며 조선과 통상을 원했다. 조선은 일본의 에도 막부가 원할 때 통신사를 파견하였고, 광해군은 기유약조(1609)를 체결해주어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하고일본과의 통교를 허락하였다. 이렇게 조선과 일본은 전쟁의 상흔을 서로간에 씻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연계하여 에도막부를 타도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내었고, 그들이 정한론(한반도 정벌과 대륙 진출)의 선두주자가되어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며 조선을 또다시 침략했던 중심 세력이 되었으니, 역사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있겠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일본 내 가장 극우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 P386
또한 이순신에 대한 그 어떤 평가나 기록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다짐이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P3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