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프로그램은 거대한 논란을 일으킵니다. 많은 사람이 프로그램의 효과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법적으로 금지된 마약을 사용하라고 돕는 일에 세금을 쓰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런다고 HIV감염이 줄어들 리 없다‘라는 생각이었지요. 논쟁 속에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사회는 ‘과연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이 HIV 신규감염을 줄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마약사용이 증가하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논쟁 속에서 1996년 역사적인 논문이 학술지「랜싯』에 발표됩니다. 돈 잘레이스Don Jarlais 교수 연구팀은 「뉴욕의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과 마약 사용자 집단에서의 HIV발병률」이라는 논문에서 뉴욕 지역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의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마약사용자들은 연간 100명당 1.56명이나 1.38명이 HIV에 감염되지만, 그렇지 않은 마약 사용자들은 연간 100명당 5.26명이나6.23명이 감염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주삿바늘 무상 교환프로그램이 HIV 신규 감염을 3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결과입니다. 이 논문은 그 논쟁적인 프로그램의 효과를 증명한 최초의 연구입니다. - P181

분노나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를 실제로바꾸는 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불법인 마약 사용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주삿바늘로 전파되는 HIV 감염 역시 함께 막을 방법이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정책을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뉴욕시 보건담당 부서는 실현 가능하면서도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HIV/AIDS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정책을 고안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P182

이렇게 말하면 HIV는 당뇨나 고혈압 같은 다른 만성질환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 바이러스의 전파를 바라보는 시각도 획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성관계 시 콘돔을 사용하면 바이러스 전파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놀라운 연구 결과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7년 9월 27일 미국질병관리본부 웹사이트에 공지된 서한을 통해 공식적으로세상에 알려진 내용입니다. 미국질병관리본부 HIV/AIDS 분과 책임자인 유진 매크레이 Eugene McCray는 이 서한에서 HIV 감염인이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아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일정 수준이하로 내려가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도 동성 간이나 이성간 모든 성관계에서 파트너에게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 - P183

HIV 감염인은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HIV 감염인을 PL, 즉 ‘HIV 감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People Living with HIV infection‘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당뇨병 환자Diabetic patient를 ‘당뇨병을 가진 환자 Patient with diabetes‘ 라고, 조현병 환자 Schizophrenic patient를 ‘조현병을 가진 환자 Patient with schizophrenia‘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동의를 얻기 시작한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질병 이상의 존재이고, 질병을가지고 살아가는 시간 역시 잘라낼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기때문이지요.
혐오는 쉽습니다. 가장 약하고, 아픈 당사자들을 욕하면되니까요. 어떤 이들은 HIV 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라고 함부로 손가락질합니다.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혐오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증가시키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한국 사회의 HIV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첫걸음은 혐오와사회적 낙인을 거두고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수십 년간 과학 연구를통해 인류가 알게 된, HIV 감염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 P188

김도현 ㅡ 제가 얼마 전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OECD 회원국의 평균 장애인구 비율이 24.5%더군요. 한국은 5분의 1 수준인 5%에 불과하고요. 장애인으로 인정되는 인구가 늘어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한 낙인이 접점 줄어드는 과정과 함께 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PL분들이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을 장애라고 이야기할수 있다는 건, 장애인 운동의 성과 속에서 장애에 대한 낙인이 일정 부분 감소되고 장애가 좀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구 비율과 관련해서 조금 더 주목해 볼 만한 국가들이 존재하는데요. 바로 한국의 장애인 운동이 탈시설지원법을 성안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입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2000년대 중반 탈시설을 완수해서 장애인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인 동시에, OECD 회원국 중 정부에서 공식적인 장애인구 통계를 국제기구에 제출하지 않는 유이한국가들이기도 합니다. 이는 두 나라 정부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적장애 모델에 입각해 장애를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즉, 장애란 어떤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특질(손상) 자체가 아니라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므로,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장애인구를 산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두 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기 나라의 인구 중 장애인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서비스 지원 과정에서 꼭 장애라는 개념을 거치지 않더라도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고, 차별 금지의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종의 신청주의에 입각해 사례별로 판단하면 되니까요. - P200

김승섭 ㅡ 기득권의 언어는 논리적으로 깔끔하고 잘 정리된 것처럼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명확한 언어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을 말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이는 사회적 약자가 ‘언어의 부재‘로 고통받는 이유이기도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미 고착화된 세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말하며 그 강고한 장벽에 몸을 부딪치면서 만들어 내는 균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제 여건이 마땅치 않아 기고 요청에 많이 망설였는데, 김도현 선생님이 대표로 있는 『비마이너』에 글을 써달라는 김지영 선생님의 말씀은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쉬운 답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동년배 활동가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두 분 오늘 감사했습니다. - P204

김승섭 ㅡ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조차 동성애자 집단에서 HIV 감염 유병률이 높다는 이유로 동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질병의 유병률이 높다고 그 집단을 병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또한 예방차원에서 병의 원인은 변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질병은 나이가 들면 발생 위험이 늘어난다. 그러나 나이 듦이 원인이니 나이를 줄이자고 제안할 수도 없고, 제안해서도 안 된다. 나이는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 같은 성적지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인정해야 할 존재의 일부이지, 바꿀 이유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오페라리오 ㅡ 동의한다. HIV 감염의 위험 요인 중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성적 지향이 아니라, 사회적 낙인과 배제이다. 더 인도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HIV 감염을 바라봐야 한다.
한편 미시적 수준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이다.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성매매 등으로 HIV 감염이 많이 퍼진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는 이성애가 HIV 감염의 원인이라고 할 건가? 어떤 사회에서는 대다수 여성의 HIV 감염 경로가 부부 간 성관계이다. 그곳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원인인가? 모든 사회에서 HIV 감염의 원인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이다. - P210

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예민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오갔습니다. "동성애에 대해 교육하면 결국 동성 간 섹스에대해서도 직접 말하게 될 텐데 괜찮을까요?" 제 건너편에 앉은 한 어머니가 던진 질문에 5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답했습니다. "물론 그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있겠지요. 그때마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안전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답을 했어요. 지금까지 아이들은 제 답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교에서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이유였습니다. 성적 지향만이 아니라 인종, 성별, 출신 국가, 경제적 상황 등에 따라 다양한 소수자가 학교에 있는데, 이 사건을 방치한다면 다른 소수자들이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P214

한국의 한 거대 정당은 선거 때마다 ‘동성애 반대‘를 구호로 내겁니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세계적 흐름에서 낙오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수십 년을 정치인으로 살아온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진심으로성소수자를 혐오하거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혐오는 저열한만큼 편리하니까요. 전자라면 노예제 찬성론자나 여성차별론자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맞고, 후자라면 자신이 소수자 혐오를 통해서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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