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라고? 개나 줘 버리라지. 경험이 풍부한 생물학자일수록 생물계의복잡한 구조와 연결 고리를 더욱 오래, 그리고 더욱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그 과정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장하며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서로를 원조하고 돕는다는 직감 또한 점점 강렬해진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서로 헌신하면서, 자신이 상대에게 효율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경쟁 체계가 존재한다면그것은 지엽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균형이 깨졌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나뭇가지들이 빛을 향해 서로 밀치며 자라나고, 뿌리들이 샘에 닿기 위해 경쟁을 벌이며, 동물끼리 서로를 잡아먹긴 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인간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두려울 정도의 조화와 일치가 깔려 있다. 우리 모두는 거대한 하나의 몸체로 이루어진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내전에 불과하다. 살아 있다(이것 말고 대체 어떤 어휘를 사용할수 있겠는가.)는 것은 100만 가지의 특성과 자질을 아우르고 있다는 뜻이며, 삶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류나 잘못 또한 없다. 죄를 저지른 자도, 무고한 자도 없고, 공이나 과도 없으며, 선과 악도 없다. 이러한 개념을 만든 당사자는 인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 P432

그 시절, 6월의 밤을 그녀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기억은 천천히 홀로그램의 심연을 열기 시작한다.
어떤 날들은 아주 손쉽게 끄집어낼 수 있다. 또 어떤 날들은 시와분까지도 명확히 떠오른다. 고정된 이미지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같은 순간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마치 모래밭에서 고대의 해골을 발굴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뼈 한 개만 보이지만, 솔질을 계속 하다 보면 점차 다른 부위가 나타난다. 그러다 마침내 복잡한 인체가 구조를 드러내게 된다. 관절과 마디들, 그리고 육신의 시간 그동안 지탱해 왔던 구조물이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 P436

"지속적인 고통과 점진적인 마비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는 그런상태를 한번 상상해 봐. 그래도 뭐, 어떻게든 고통을 참을 수는 있었을 거야.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날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지금겪는 이 고통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며 앞으로도 이 고통에 대해아무런 보상도 없으리라는 생각, 매 시각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질것이며 그렇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는생각, 열 개의 통증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환각으로 지어진 지옥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지옥의 여정 속에서 인도해 주는 안내자가 한 사람도 없고 손잡아 줄 이 또한 아무도 없다는 생각, 아무도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건 실은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어떤 형벌도 포상도 없으리라는 그런 생각 말이야." - P437

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중년 여인이 되면 타인의 눈에 절대 띄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비단 남자들뿐 아니라, 직장에서 그녀를 더는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는 다른 여자들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과 뺨, 코를 훑어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미끄러져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상당히 새롭고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관통했다. 아마도 그들은 투명한 그녀의 육체 너머에 있는 광고판과 풍경, 열차 시간표까지 보았으리라. 그렇다. 그녀는 투명 인간이 된 게 틀림없었다. 다시 말해 이제 막 사용법을 익히기 시작한, 무궁무진한 능력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여기서 어떤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리라. 증인들은 이렇게 증언할 것이다. "어떤 여자였는데••••••." 또는 "누군가가 여기에 서 있었는데••••••." 귀걸이 따위를 주목하는 여자들과 비교해 보면 남자들은 훨씬 더무례하다. 그녀가 귀걸이를 걸고 있었다 해도 그들은 단 1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을 테니까. 어린아이들만 이따금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그리고 무심하게 응시하다가 미래를 향해 얼굴을 돌려 버린다. - P450

그가 전화로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괜찮은거야?"
쿠니츠키가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지만 그는 알았다. 그들이지금 마지막 대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부엌은 결투장이 될 테고, 거기서 그들은 각자 공격 태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식탁 근처에 자리를 잡을 테고, 그녀는 창문을 등지고 설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리고 그는 알았다. 이 중요한 순간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왜냐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정말 마지막이자 유일한 순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진실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는 또한 알았다. 자신이 지금 지뢰밭을 밟고 있음을. 모든 질문은 폭탄이 될 것이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시도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자 그는 자신이 마치 옷 속에 폭탄을 감춘 테러리스트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폭탄은 그들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터질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리라. - P537

불을 피울 만한 땔감도 없었다. 눅눅하고 차가운 이끼와 불길조차 집어삼키려 하지 않는 희귀한 덤불뿐이었다. 그들은 이끼덮인 바위틈에서 침낭에 들어가 그날 밤을 보냈다. 먹구름이 사라지고 얼어붙은 하늘에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자 그들은 용암 덩어리가 얼굴의 형상을 취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속삭임과 중얼거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지의 따뜻한 온기를느끼기 위해 이끼 아래, 돌 밑에다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미세한 진동과 움직임, 그리고 호흡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의심의 여지가없었다. 대지는 살아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통해 그날 밤 별일 없이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를 깨우쳤다. 그들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있으면, 대지는 기꺼이 자신의 따뜻한 젖꼭지를 내어준다고 아이슬란드인들은 말했다. 그러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젖꼭지를 빨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모유를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그 모유는 아마도 수산화마그네슘 같은 맛이리라. 위산 과다증이나 속 쓰림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약국에서 판매하는 바로 그 약품 말이다. - P545

나는 펠로폰네소스 해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양이라고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손이 아닌, 위대한 어머니의 손 모양을닮았다. 자식을 씻길 목욕물의 온도가 적당한지 확인하기 위해 물속에 담근 어머니의 손. - P552

그러나 교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의 강물이 흘러넘쳐 붉은대양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닷물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범람했다. 먼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유럽의 한 평원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다리,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어렵게 지은 댐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갈대숲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집 문턱까지 침범했고, 과감하게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돌바닥에깔린 붉은 양탄자와 토요일마다 문질러 닦던 부엌의 나무 바닥을 휩쓸더니, 마지막으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고 찬장과 테이블까지 덮쳤다. 그다음으로는 기차역과 공항,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교수가 고향을 떠난 바로 그곳을 집어삼켜 버렸다. 또한 그가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과 거리들이 전부 물에 잠겼다. 그가 임대해서 지내던 방, 싸구려 호텔,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점도 모조리 사라졌다. 붉게 빛나는 그 수면은 그가 너무도 사랑하던 도서관의 첫 번째 서가를 공격했다. 책장들이 물에 젖어 퉁퉁 불었다. 표지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혓바닥이 문자들을 핥았고 검게 인쇄된 활자를 지워 없앴다.
자녀들이 졸업장을 받은 학교의 계단과 마룻바닥도, 교수 임명을 받기 위해 자랑스럽게 달려가던 도로도 전부 붉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와 카렌이 함께 누워 늙고 노쇠한 육신을 처음으로결합했던 침대 시트도 붉게 물들었다. 붉은빛의 그 끈끈한 점성액체는 그가 자신의 신용 카드와 비행기 표, 손자들의 사진을 넣어둔 지갑의 칸막이도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물살은 기차역과 철로, 공항과 활주로를 모조리 덮쳤고, 이제는 그 어떤 비행기도, 그 어떤 기차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수면은 끈질기게 상승했고, 말과 개념과 추억을 모두 집어삼켰다. 가로등 불빛이 모조리 꺼지고 전구들이 터져 버렸다. 전선은 끊어지고 네트워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죽은 거미줄이되어 버렸으며 전화기는 먹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느리고 무한한 대양이 마침내 병원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아테네 전체가 핏물에 잠겼다. 신전들, 성스러운 길과 수풀들, 이 시각엔 늘 비어있는 아고라, 여신의 빛나는 조각상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올리브나무까지 모두.
그녀는 계속 그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불필요한 장치를 그에게서 떼기로 결정하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리스 간호사가 단 한 번의 능숙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얼굴을 시트로 덮는 순간까지. 시신은 화장했다. 유골은 그의 자식들과 함께 에게해에 뿌렸다. 이런 식의 장례를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고 믿으면서. - P587

누가 이것을 읽을 것인가?
곧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승무원들이 게이트 앞에 서서 승객을 맞을 준비를 끝내자 지금껏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승객들이벌떡 일어나서 기내 수화물을 챙긴다. 탑승권을 뒤적거리고, 채읽지 못한 신문을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각자 머릿속에서 말없이 양심의 성찰을 한다. 여권과 표, 서류 등등을 모두 챙겼는지, 환전은 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그리고 그곳에 가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제대로된 방향을 선택했는지.
천사처럼 아름다운 승무원들이 우리의 여행 적합도를 확인하고 난 뒤, 호의적인 손짓으로 우리를 들여보낸다. 폭신한 카펫이 깔리고 둥근 벽이 에워싼 터널 속으로, 이 터널을 통과하여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차가운 공중 도로를 날아서 새로운 세계로 향할 것이다.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미소에는 일종의 약속이 담겨 있다. 그 미소가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 P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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