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 P108
해고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갑자기 ‘산자‘와 ‘죽은 자‘로 나뉘어 어제까지형, 동생 관계였던 ‘산자들이 "나라 망치는 빨갱이"라고 욕하는것을 경험하며 생겨난 트라우마가 큰 상처였다. 그런데 해고 노동자의 아내들도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어제까지 같은 아파트에서 언니, 동생 하며 함께 다니던 이들이 남편의 ‘생존‘ 여부가 갈리자 길에서 마주쳐도 눈맞춤을 피했던 것이다. 그 인간적 배신감이 때로는 남편의 정리해고 자체보다 더 아팠다. 남편들이 투쟁하는 동안 집안을 감정적·경제적으로 돌보는 것은 아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정리해고와 그 이후 투쟁과정에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돌보며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시댁에서는 "너라도 남편 마음 편안하게 해줘야 되지 않겠냐?"라며 격려 아닌 격려를 했고, 친한 친구들은 "그렇게 힘들면 남편과 이혼을 하든지 해라"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상처는 안에서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들에게 "당신은 괜찮은가요?"라고 묻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P112
일하고 살아가는 공간에 나를 위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화장실이 있더라도 그걸 이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그 공간이 나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사회가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당신을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가학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수자들이 사회 곳곳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합리적인‘ 근거가되어,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화장실의 부재는 일터와 대학과 국회를 비롯한 공공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근거로 작동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트랜스젠더나 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 P125
야간 교대 노동이 발암 요인이라는 근거는 학술적으로도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2007년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교대제 근무shift work"를 납과 같은 등급인 유력한 발암물질 IARC 2A(Probable Carcinogens)로 분류했습니다. 전 세계 노동인구 중 20% 정도가 야간 노동이 수반되는 교대제근무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놀라운 결정이었지요. 2019년 7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제암연구소에서 주최한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 27명은 2007년의 분류결정 이후 출판된 논문을 재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이들은 교대제 근무를 여전히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며,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발암물질의 이름을 "야간 교대제 근무night shift work"로 바꿉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뿐, 야간 교대제 근무는 유력한 발암물질입니다. - P134
같은 인간이지만 경쟁하는 무대 자체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코끼리가 전쟁으로 동료와 부모가 무참히 죽어나가던 고롱고사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코끼리는 안전한 국립공원에서 보호받으며 지내는 것처럼요.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2011년 『지역보건과 역학』에 발표된 이화여자대학교 정최경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사망 불평등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1995~2000년에 태어난 어린이를 기준으로 1~4세 영유아는 아버지가 중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경우,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경우와 비교해 사망률이 2.5배 높았습니다. 5~9세의 경우 이 수치는 2.8배로 증가합니다. 이러한 사망률 차이의 가장 큰 원인은 교통사고를 비롯한 사고성재해입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위험한 지역에서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대개 사고를 당했을 때 즉시 필요한 응급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 환경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더 자주 다치지만 더 늦게 치료받습니다. 진화의 힘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하지요.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목숨이 계속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인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롱고사‘는 어디인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지, 이 부조리한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밀렵꾼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 P136
2022년 8월 8일, 폭우가 내리는 동안 서울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졌다. 46세 홍 모 씨는 갑자기 쏟아진 빗물에잠겨 발달장애를 가진 언니, 자신의 10대 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물이 들이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해 며칠을 서성였다. 참사 이틀 뒤, 서울시에서는 ‘지하· 반지하‘를 주거 목적으로 짓는 것을 전면 불허하고, 향후 20년 안에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안전대책‘ 발표 다음 날, 숨진 홍 씨가 2018년에 내가 책임연구원으로 진행했던「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 연구」의 참여자였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세월호 참사가 떠올랐다. 가라앉는 배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했던 304명처럼, 반지하방에 살던 세 가족은 물에 잠겨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2014년, 살릴 수 있었던사람을 살리지 못했던 참사를 두고 당시 대통령이 내놓았던 대책은 ‘해경 폐지‘였다. 구조 과정에서 무책임했던 해경을 처벌하는 일은 필요했지만, 해상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기관을 성급히 폐지하는 것이 미래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대책일 수는 없었다. 두 사건 사이의 8년을 돌이켜 보면 질문이 남는다. 해경폐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대책‘이었을까. 서울시의 대책은 얼마나 다를까. 장기적으로 반지하방 거주자가 줄어야 한다는 데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반지하를 좋아해서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반지하방은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햇빛이 들지 않는 자리까지 찾아간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반지하방이 없어지면 그들은 더 안전한 곳을 선택해 살 수 있을까. 정책 결정 과정에 지하와 반지하에서 살고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반영됐는가. 그 복잡한 맥락을 헤아릴 시간도 가지지 않은 채 반지하방 주거 금지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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