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 Money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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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최고의 영화(소재)영화. 브래드 피트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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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Money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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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백부터 하면서 시작해야겠다. 헐리웃 영화를 보다 샌프란시스코 주변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센티멘털리즘에 빠져든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도 아닐진대 이 지역에서 몇 년간 살면서 추억을 쌓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사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정확히 S.F.는 아니었다. Bay Bridge를 사이에 두고 샌프란시스코 건너편에 위치한 오클랜드라는 동네였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와 달리 미국내에서 위험한 도시로 유명한 지역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2002년 즈음에 발표된 결과로 수년째 미국내 살인사건 발생률 1위를 지키고 있었다 (2007년 발표에서 오클랜드는 미국내 가장 위험한 도시 4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즈음 오클랜드의 부자 동네 친구 샌프란시스코는 뉴욕과 미국내 집값 상위 1,2위를 다투고 있었으며, 2002년 오클랜드 A`s는 기적의 20연승을 기록했다.

잠시 더 이 지역에 대해서 내가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을 얘기하자면, 대표적인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와 대표적인 위험한 도시 중 하나인 오클랜드가 다리 하나 사이로 함께 있음은 물론, 그 둘 옆엔 전통적인 명문 대학 도시 버클리가 위치하고 있고, 그 셋 사이 어딘가에 디즈니에 버금가는 꿈의 공장 픽사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2002년으로 돌아가자. 그 해 A`s의 기적 같은 연승행진에 온 동네는 열광했었다. L.A.로 이사를 해 살던 몇 년 동안도 내 관심은 다저스나 에인절스, 혹은 레이커스가 아니라 A`s와 Raiders였다. 이쯤되니 바로 그 A`s를, 좀 더 정확히는 A`s의 단장인 빌리 빈을 내세운 영화가 나온다 했을 때 내가 흥분하지 않을 도리란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며 어떤 냉정한 입장을 지킨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이다. 20연승이 이루어지는 순간 열광하는 콜리세움의 관중들을 보며 친구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던 나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브래드 피트다.

 

글쎄, 처음 그가 등장했을 땐 그가 이정도로 성장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수많은 잘생긴 배우들 중 하나, 로버트 레드포드와 유난히 닮아보이는 그냥 잘생기기만 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여기까지 성장했다. 개인적으론 그가 <트로이>와 같은 영화에서 보다는 <오션스 일레븐>이나 이번 <머니볼>과 같은 영화에서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머니볼>은 내가 본 야구(소재)영화 중 최고이다. 어려움을 헤쳐내고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 극적인 우승을 달성하며 경기장에서 껴안고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며 끝나는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다. 마지막 두 씬. 낙담하고 있는 빌리 빈에게 무거운 몸 때문에 한번도 2루까지 갈 생각을 안하다 처음 2루로 가려고 질주하던 도중 넘어지는 타자. 하지만 곧 자신이 홈런을 친 것임을 알고 주변의 환호를 받으며 기쁘게 베이스를 도는 그 타자의 비디오를 보는 씬. 그리고 이어지는 차 안에서 딸의 녹음된 노래를 들으며 운전하는 빌리 빈. 그리고 그의 눈으로 카메라가 들어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언젠가 A's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날이 오기를.

혹은 그 날이 오지 못하더라도 Just enjoy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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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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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는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를 화면 가득한 안나 카리나의 얼굴 옆모습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이 첫장면에서 이것은 이 여인에 관한 영화이며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직감한다. 뭔지 알 수 없는 미세한 표정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그녀의 얼굴은 어쩌면 그 하나로 이미 한 편의 완성된 영화일지도 모른다. <수진들에게>는 <비브르 사 비>의 첫 장면과 방향만을 바꾼 채 정확히 같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다만, <수진들에게>의 그녀는 안나 카리나에 비해 표정이 좀 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관객은 이 짧은 첫 장면에서 앞으로 이 여인의 힘든 삶의 얘기를 들어야 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짧은 첫 쇼트에 이어서 타이틀이 뜨고, 이어서 카메라는 미로와 같은 대형마켓의 복도를 걸어간다. 처음엔 이것이 1인칭 시점의 화면으로 보이지만 이내 화면 안으로 어느 손님의 뒷모습이 들어옴으로써 관객은 카메라가-그러므로 결국 관객 자신이-이 손님의 뒤를 쫓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카메라가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쇼트는 이후 세 차례 더 등장한다. 수진이 어두운 창고로부터 문을 열고 밝은 매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상관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기까지의 쇼트. 그녀가 그녀의 고자질로 인해 정리해고된 동료의 집을 찾아 골목길을 걷는 쇼트. 그리고 수진이 매장 복도를 걸어가는 마지막 씬의 첫 쇼트이다.


이들이 흥미로운 것은 인물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빠졌다를 반복하며 카메라와 인물, 즉 관객과 인물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때로 인물의 뒤에서 따라가다 어느 순간 시선의 주체인 인물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말하자면, 관찰자의 역할을 하던 카메라가 불현듯 시선을 던지는 주체의 자리로 옮겨가고, 이를 통해 감독은 이것이 관객인 나의 시선인지 영화 속 인물의 시선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시선의 주체가 뒤섞이는 모습은 두 번째 경우에서 두드러진다. 창고에서 막 나오는 수진을 부르는 상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것은 수진이다. 카메라 역시 동시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고 짧은 순간이지만 수진의 모습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이순간 카메라는 수진이기도 하고 관객인 나이기도 하다. 나와 수진은 함께 서있는 것이며, 그 자리에서 이제 수진의 괴로움을 함께 느낄 도리 밖에 없다.


이것은 다른 쇼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진이 골목길을 따라 그녀 때문에 해고된 동료를 찾아가는 길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뒤를 따르고 관객 역시 그녀의 뒤를 따르게 된다. 수진이 걷는 미로와 같이 이어지는 골목길은 마치 진열대로 이루어진 매장의 미로와 같은 복도의 또다른 버전이다. 수진은 매장 밖으로 나왔지만 한편으론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갇혀버린 그녀. 수진은 일말의 죄책감을 안고 동료를 찾아 이 길을 걷는다. 그리고, 감독은 그 울퉁불퉁한 회색의 골목길을 카메라가 함께 걷도록 함으로써 관객을 수진과 같은 자리에 가져다놓고 그녀의 고통의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감독은 왜 이것을 온전한 1인칭 시점의 화면으로 구현하지 않은 것일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관객과 인물의 동일시가 좀 더 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의 형태에서는 비록 그 경계가 희미해지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관객은 자신을 어느 정도 한 발 물러선 관찰자로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 '물러선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끝내 '방관자'가 되진 못한다. 말하자면, 관객은 고통을 겪는 친구의 바로 옆에서 그 고통을 바라보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런 처지에 놓인다. 이 상황에서 관객은 어쩌면 일종의 죄책감마저 느끼게 된다. 감독은 아마도 그 '죄책감', 혹은 일종의 연대의식에 방점을 두고, 당신이 비록 '수진'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당신 바로 옆에 있는 수많은 '수진들'을 방관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행여 이것이 '나는 어찌되었든 당사자가 아니니 언제든 고개 돌려 다른 곳을 볼 수 있다'라는 도망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어선 안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진은 대형마켓 매장의 미로와 같은 복도를 걸어가고 카메라는 그 뒤를 뒤따른다. 그녀는 만두 시식을 준비하고 있는 점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이 마지막 씬은 처음 등장했던 씬과 마치 댓구를 이루는 듯한 구조로 이루어진다. 즉, 사람만 바뀌었을 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 될 것이다. 영원히 끊기지 않고 돌고 도는 같은 이야기. 그리고 현실. 소위 '88만원 세대'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수진은 이곳에 단수로서가 아니라 복수인 수진'들'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돈을 쥔 자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시식을 하고 떠나가던 첫 장면의 손님과 달리 수진은 또다른 '수진'을 돕는다. 수진은 이미 첫 장면에서 그녀에게 다가왔던 손님이, 그녀가 부럽게 바라보던 명품백의 주인공이었던 손님이, 그래서 똑같은 옷까지 사입게 만들었던 그녀가 결국 자신과 다를게 없는 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이다. 이 시간을 지나온 수진은 과연 같은 처지의 또다른 수진을 보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운 것일까? 혹은 힘을 내어 함께 이곳을 나가자고 손을 내미는 것일까? 이제 '수진들'은 서로를 도울 수 있을까? 그들은 함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에서 나올 수 있을까? 저 멀리서 수진을 부르던 상관은 그녀들을, 그들을 바라봐 줄까?

수진들이 있는 공간은 어찌되었든 미로와 같이 얽혀서 그녀들을 끝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진열대로 이리저리 복잡하게 이루어진 거대한 매장. 에스컬레이터가 기하학적으로 얽힌 공간. 그 자본주의의 무게 아래에서 수진들은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녀들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하고 동료를 고자질 해야 한다. 밖으로 나선다해도 이미 세상은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 속에서 다시 그녀들을 가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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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송 - A Love Song for Bobby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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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텁지근한 여름의 뉴올리언스. 화면 위의 뉴올리언스엔 왠지 모를 무료함과 느긋함이 함께 한다. 사람들은 모여 앉아 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부르고, 맥주를 마시고, 웃고 떠든다. 그러나 동시에 바비 롱, 퍼슬레인, 로슨이 함께 있는 집에선 매일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 없을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오래 전에 - 하지만 '오래 전'이라고 해봐야 그녀는 이제 열 일곱, 열 여덟 정도의 나이일 뿐이다 - 고향을 떠났던 것으로 보이는 퍼슬레인은 어머니 로레인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에 돌아온다. 돌아온 어머니의 집엔 어머니의 친구라는 두 남자, 바비 롱과 로슨이 기거하고 있고, 퍼슬레인은 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영화는 각자의 아픔과 기억을 지닌 채 한 공간에서 서로 부딪히고, 때로는 서로 감싸며 상처를 치유해 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몸을 부대끼는 공간은 좁게는 퍼슬레인의 죽은 어머니가 남긴 집이고, 넓게는 뉴올리언스이다. 뉴올리언스. 그곳엔 재즈와 슬픈 역사가 있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이 흑인 노예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여행을 하며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배워가던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곳이 바로 이 뉴올리언스이다. 18세기에 정착한 노예의 후손인 흑인 인구가 2/3이상인 뉴올리언스와 그곳의 사람들은 저 밑바닥에 흐르는 아픈 역사의 기억을 품고 살며, 그 정서는 그들의 거리, 음악, 그리고 얼굴에 새겨져있다. 바로 이 속으로 감독은 각자의 묻고 지나가고 싶은 기억을 간직한 인물들을 끌고 들어간다. 퍼슬레인과 바비 롱, 그리고 로슨은 그들만의 아픈 기억을 품고 산다. 퍼슬레인은 아픔을 덮고자 자신만의 기억을 만들어내고, 가짜 기억은 진짜 기억과 뒤섞여 어떤게 진짜고 어떤게 가짜인지 심지어는 퍼슬레인 본인조차도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그 기억을 안고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뉴올리언스로 불려 들어온다. 한때 영문학 교수였던 바비 롱과 그의 조교였던 로슨은 학교를 떠나 뉴올리언스로 들어와 그들의 아픔을 덮고자 매일 술을 마시고 강가에 앉아 체스를 두며 서로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기억은, 아픈 역사는 결코 모른 척 덮어버리고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장막을 거둬내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극복하고, 마침내 건너뛰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은 죽은 로레인이 남긴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것을 배워나간다.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본고장으로 알려져있다. 루이 암스트롱의 바로 그곳이다. 루이 암스트롱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 혹은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 연주는 이미 그들의 솔로 연주만으도 충히 좋다. 그러나, 종종 훌륭한 연주자들이 모여 서로 주고 받으며 하모니를 이루어 낼 때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여러 악기가 서로 주고 받으며 그 속에서 화음을 이루어내며 하나의 연주를 탄생시키는 과정은 어쩌면 뉴올리언스의 바비 롱, 퍼슬레인, 로슨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인물들이 한 장소에서 서로 할퀴고 때론 감싸며 하나의 인생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다. 말하자면, 바비 롱이 뉴올리언스의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를 꼭 닮은 목소리로 얘기하다가 문득 트럼펫을 연주하면 로슨이 그 옆에서 색소폰으로 돕고, 그 리듬 위에 퍼슬레인이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얹는다. 처음엔 엇나가던 연주도 그들이 눈을 마치며 서로의 흡을 배워감에 따라 하나의 잘 어우러지는 완성된 연주로 탄생한다. 이처럼 세 인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끈적끈적한 화학작용이 언뜻 대단할 것 없는 그저그런 하루 하루를 보여주는 영화에 동력을 더해주는 요인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후반부에 찾아온다. 부치지 못한 편지와 그로인해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 이렇게만 말하면 이건 우리 안방 저녁시간대에 찾아오는 수없이 반복되는 TV 드라마의 설정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출생의 비밀이라는 설정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 문제는 그것을 밝히는 방식과 받들이는 도에 있다. 퍼슬레인은 죽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부치지 못하고 모아놓은 편지 상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비 롱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강가로 곧장 달려가 바비 롱에게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밝힌다. 그러한 사실을 역시 알지 못했던 바비 롱은 퍼슬레인으로부터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임을 듣고 둘은 진한 포옹과 함께 사랑스러운 부녀의 관계를 회복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딸은 아버지를 얻고, 가족을 잃고 방황하던 아버지는 잃었던 - 혹은 없었던 - 딸을 얻는다. 침내 그들은 상처를 치하고 다시 가족을 이룬다. 진실을 알주는 메지는 상자 속에서 그냥 툭하니 튀어나오고, 진실을 접한 사람들은 아무런 갈등 없이 그것을 받들인다. 이건 치 세 인물이 한 공간에서, 한 집에서 서로 부딪히고 껴안으며 후텁지근한 날 햇빛 아래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듯한 기분으로 읽던 소설이, 갑자기 예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요정이 나타나 마술봉을 뿅하고 내리치며 '사실 너희 둘은 부녀였어'라고 알려주자 둘이 눈물을 흘리며 껴안는 동화로 변질되어 버리는 느낌이다. 달리 말하자면, 미시시피 강가에 있었는데 갑자기 디즈니랜드에 도착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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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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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부분 꽤 이기적이다. 내가 아닌 타인, 다른 존재의 입장에 서보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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