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는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를 화면 가득한 안나 카리나의 얼굴 옆모습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이 첫장면에서 이것은 이 여인에 관한 영화이며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직감한다. 뭔지 알 수 없는 미세한 표정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그녀의 얼굴은 어쩌면 그 하나로 이미 한 편의 완성된 영화일지도 모른다. <수진들에게>는 <비브르 사 비>의 첫 장면과 방향만을 바꾼 채 정확히 같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다만, <수진들에게>의 그녀는 안나 카리나에 비해 표정이 좀 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관객은 이 짧은 첫 장면에서 앞으로 이 여인의 힘든 삶의 얘기를 들어야 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짧은 첫 쇼트에 이어서 타이틀이 뜨고, 이어서 카메라는 미로와 같은 대형마켓의 복도를 걸어간다. 처음엔 이것이 1인칭 시점의 화면으로 보이지만 이내 화면 안으로 어느 손님의 뒷모습이 들어옴으로써 관객은 카메라가-그러므로 결국 관객 자신이-이 손님의 뒤를 쫓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카메라가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쇼트는 이후 세 차례 더 등장한다. 수진이 어두운 창고로부터 문을 열고 밝은 매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상관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기까지의 쇼트. 그녀가 그녀의 고자질로 인해 정리해고된 동료의 집을 찾아 골목길을 걷는 쇼트. 그리고 수진이 매장 복도를 걸어가는 마지막 씬의 첫 쇼트이다.
이들이 흥미로운 것은 인물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빠졌다를 반복하며 카메라와 인물, 즉 관객과 인물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때로 인물의 뒤에서 따라가다 어느 순간 시선의 주체인 인물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말하자면, 관찰자의 역할을 하던 카메라가 불현듯 시선을 던지는 주체의 자리로 옮겨가고, 이를 통해 감독은 이것이 관객인 나의 시선인지 영화 속 인물의 시선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시선의 주체가 뒤섞이는 모습은 두 번째 경우에서 두드러진다. 창고에서 막 나오는 수진을 부르는 상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것은 수진이다. 카메라 역시 동시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고 짧은 순간이지만 수진의 모습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이순간 카메라는 수진이기도 하고 관객인 나이기도 하다. 나와 수진은 함께 서있는 것이며, 그 자리에서 이제 수진의 괴로움을 함께 느낄 도리 밖에 없다.
이것은 다른 쇼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진이 골목길을 따라 그녀 때문에 해고된 동료를 찾아가는 길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뒤를 따르고 관객 역시 그녀의 뒤를 따르게 된다. 수진이 걷는 미로와 같이 이어지는 골목길은 마치 진열대로 이루어진 매장의 미로와 같은 복도의 또다른 버전이다. 수진은 매장 밖으로 나왔지만 한편으론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갇혀버린 그녀. 수진은 일말의 죄책감을 안고 동료를 찾아 이 길을 걷는다. 그리고, 감독은 그 울퉁불퉁한 회색의 골목길을 카메라가 함께 걷도록 함으로써 관객을 수진과 같은 자리에 가져다놓고 그녀의 고통의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감독은 왜 이것을 온전한 1인칭 시점의 화면으로 구현하지 않은 것일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관객과 인물의 동일시가 좀 더 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의 형태에서는 비록 그 경계가 희미해지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관객은 자신을 어느 정도 한 발 물러선 관찰자로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 '물러선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끝내 '방관자'가 되진 못한다. 말하자면, 관객은 고통을 겪는 친구의 바로 옆에서 그 고통을 바라보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런 처지에 놓인다. 이 상황에서 관객은 어쩌면 일종의 죄책감마저 느끼게 된다. 감독은 아마도 그 '죄책감', 혹은 일종의 연대의식에 방점을 두고, 당신이 비록 '수진'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당신 바로 옆에 있는 수많은 '수진들'을 방관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행여 이것이 '나는 어찌되었든 당사자가 아니니 언제든 고개 돌려 다른 곳을 볼 수 있다'라는 도망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어선 안 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진은 대형마켓 매장의 미로와 같은 복도를 걸어가고 카메라는 그 뒤를 뒤따른다. 그녀는 만두 시식을 준비하고 있는 점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이 마지막 씬은 처음 등장했던 씬과 마치 댓구를 이루는 듯한 구조로 이루어진다. 즉, 사람만 바뀌었을 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 될 것이다. 영원히 끊기지 않고 돌고 도는 같은 이야기. 그리고 현실. 소위 '88만원 세대'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수진은 이곳에 단수로서가 아니라 복수인 수진'들'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돈을 쥔 자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시식을 하고 떠나가던 첫 장면의 손님과 달리 수진은 또다른 '수진'을 돕는다. 수진은 이미 첫 장면에서 그녀에게 다가왔던 손님이, 그녀가 부럽게 바라보던 명품백의 주인공이었던 손님이, 그래서 똑같은 옷까지 사입게 만들었던 그녀가 결국 자신과 다를게 없는 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이다. 이 시간을 지나온 수진은 과연 같은 처지의 또다른 수진을 보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운 것일까? 혹은 힘을 내어 함께 이곳을 나가자고 손을 내미는 것일까? 이제 '수진들'은 서로를 도울 수 있을까? 그들은 함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에서 나올 수 있을까? 저 멀리서 수진을 부르던 상관은 그녀들을, 그들을 바라봐 줄까?
수진들이 있는 공간은 어찌되었든 미로와 같이 얽혀서 그녀들을 끝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진열대로 이리저리 복잡하게 이루어진 거대한 매장. 에스컬레이터가 기하학적으로 얽힌 공간. 그 자본주의의 무게 아래에서 수진들은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녀들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하고 동료를 고자질 해야 한다. 밖으로 나선다해도 이미 세상은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 속에서 다시 그녀들을 가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