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난 건축과는 무관한 공부를 했고 무관한 일을 하고 있지만 주변엔 건축을 전공한 친구들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학교를 다닐 적에도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건축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고, 급기야 지금은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한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만약 다른 공부를 했더라면 건축을 공부했을지도 모르겠단 상상을 하곤 한다. 정 따지고 들자면 건축에 아주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니다. 건축,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이라는 개념으로서 건축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관련 서적도 여러 권 들춰보곤 한다. 이번에도 서점에서 괜찮아 보이는 책을 발견하여 리뷰를 옮겨 놓는다.
현대 도시 문화와 삶에 대한 성찰정윤수지음 | 궁리 | 403쪽 | 1만8000원
저자는 "꽤나 긴 시간 동안 무소속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도시를 배회"했다고 한다. 배회라 이름 붙였지만, 지적인 열망을 안은 탐사였다. 탐사 공간은 멀티플렉스, 모델하우스, 테마파크, 백화점, 극장, 모텔 같은 사람들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투사되는 곳들이다.20~30년 전에는 어떻게 살았고, 20~30년 후에는 어떻게 살까라는 물음을 갖고 도시 공간을 돌아다녔다.
저자는 "날로 비대해져가는 메트로폴리스, 맹진하는 속도와 휴식없는 노동과 번들거리는 물신의 네온사인으로 가득찬 무국적의 글로벌폴리스"라고 공간을 진단했다. 특히 '메트로'와 '글로벌'이 수식하는 '폴리스'에 들어찬 인공 공간을 두고 "도시는 거대해졌고, 인간은 왜소해졌다. 인공 공간은 찬란한 빛을 발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점점 주눅들고 있다"라고 서문에서 적었다.저자는 첫장에서 광화문광장을 조명한다. 이 글엔 '일그러진 구경거리와 균형 잃을 삶'이란 작은 제목이 달렸다. 광화문광장은 광장인가. '역사성 회복'과 '국가 상징 가로'를 내세운 곳이다. 세종대왕 동상과 역사문화 전시관, 역사물길, 해치상 같은 국가 상징에 부합하는 장식물에다 출입이 금지된 꽃밭이 주인인 듯하다. 이탈리아 건축학자 프랑코 만쿠조가 광장의 특징으로 제시한 '만남' '의견교환' '산책' '휴식'은 광화문광장에서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이다."거대한 중앙분리대에 가까운" 광화문광장에 상주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경찰은 일상적으로 순찰을 돌고, 지하 해치마당으로 이어지는 통로엔 서울시 홍보 영상이 흐른다. 저자는 "거대한 국가주의적 이벤트와 서울시정 홍보만이 가능한 공간, 그곳을 광장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라며 " '국가상징의 거대한 공간'이 되는 순간, 관제화되거나 박제화되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인공 공간은 자본의 거대 전시장이다. 저자가 '가설무대의 삶'이라며 예로 든 것은 '견본 주택'에서 시작한 모델하우스다. 이곳은 더 이상 구체적 설계도면과 모형을 보여주는 데가 아니다. "주택 경기의 심리적 지표이자 대형 건설사의 전쟁터"다. 클래식 공연과 미술강좌를 열며 '도심 문화 공간'을 표방하는 이곳은 "브랜드 가치의 공세적인 마케팅으로 귀결"되는 곳이자 "우리 욕망을 대리해 세팅해놓은 임시 가설물"이다.백화점 또한 욕망의 신전이다. 세계 최대 백화점을 표방한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같이 신개발, 재개발 부지에 들어선 초대형 백화점들은 해당 지역의 장소성을 말끔히 제거한 터 위에 들어선 자본과 소비의 욕망이자 물신이다. 저자는 "백화점은 우리 앞에 새롭게 건조되고 새로운 경험 공간을 계속 제공한다. 그 공간 생산의 궁극이 전 국민을 '소비하는 인간'으로 재조직하는 데 있다"고 한 요절 문화비평가 이승욱의 진단을 인용한다.테마파크는 "인위로서 무위를 구현하려는 욕망의 공간"이다. "달이 비추던 세계, 달빛 때문에 제 그림자 길게 논두렁 위로 일렁거리던 세계, 어머니 손잡고 외갓집 가던 고갯마루의 세계, 너른 마당에 솥단지 걸쳐놓던 세계, 집 마당이나 뒤란이나 언덕이나 논두렁이나 가는 곳마다 '놀이방'이었던 자연과 육친의 관계를 맺었던 세계"와 단절된 곳에 인공의 테마파크가 있다. 테마파크는 책 제목인 '인공 낙원' 뜻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일부러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현실의 고통이나 대립을 일시적으로나마 잊어버리"려고 자임하는 곳이다. 용인에서 시작한 테마파크는 산하 곳곳으로 퍼져간다. 저자는 어느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만들어진 테마파크의 과장된 장시과 조형을 두고 "거꾸로 세워진 현대의 지옥문"으로 비유한다.저자가 그나마 위안을 찾은 인공 공간은 경기장이다. 축구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이력과 무관치 않을 터다. 그는 6만명이 꽉 들어찬 상암동 서울월드컵 경기장을 두고 "현대 사회의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에 이 아름다운 열정의 용광로가 없다고 상상해보자. 그 얼마나 삭막한 콘크리트 더미이겠는가. 경기장은 세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려는 현대인의 합창 무대"라고 말한다.책은 '도시 인문학'에 가까운 인문 에세이다. 저자는 국내외 문학과 비평 문헌을 넘나들며 인문학적 성찰을 담아냈다. 공간을 두고 벌어진 사건을 추적하며 사회학적 비판을 녹여냈다. 저자가 인공 낙원을 탐사하며 얻은 결론은 또 다른 물음이다. "과연 삶이란 가능한가."<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