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신(神)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나는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 나는 텍스트 다음에 있었고 모든 인간은 텍스트 이전에 있었다. 이건 오만이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내가 이 땅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건이라는 말에서 다소의 불순함이 풍긴다면 기꺼이 태도라는 말로 바꿀용의가 있다. 나는 나를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태도가 다른 점이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강민주의 노트에서 - P9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강민주의 노트에서 - P155
희극에 관해 수식할 때 사람들은 보통 ‘재미있는‘이란 형용사를 쓴다. 마찬가지로 비극에 대하여 말할 때 사람들은 슬프다거나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을 한다. 희극은 재미있어야만 하고 비극은 눈물이 쏟아지도록 슬퍼야한다는 전제에 이미 합의하고 있는 이런 식의 관용적 어구들은상상력을 제한하는 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해서 폭소나 눈물 이외의 어떤 다른 감정도 용납하지 않을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슬픈 희극도 있는 법이고 우스운 비극도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나 삶이란 이름의 연극무대에는 어떠한 전제도 의미를 갖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어떠한 반(反)도 수용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삶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경험을 생산하는 것은 다시없다. 사람을 이야기하는 모든 예 - P209
술의 그 무한정한 넓이와 길이의 원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황홀한 비극이 있다. 역시 삶이란 이름의 무대에올려진 것이다. 희극에는 결코 황홀함이 없다. 희극이 허용하는감정 이동은 페이소스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비극에는 오르가즘이 있다. 비극만이 절정에 이를 수있는 것이다. 절정이 없는 비극은 눈물의 배설에 도움을 줄 뿐 황홀함의 경지로 우리를 데려다주지 않는다. 천박한 비극이라면 우리는 이미 신물 나게 보아왔고 겪어왔다. 그것들은 때로 희극적이기조차 해서 누구의 눈물도 얻지 못하는 수가 많다.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간다.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앙코르도 받을 수 없는 단 한 번의공연.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대한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주장대로 형식을이끌어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는 신이 내린다 해도 절정을 느끼는 것은 삶의 주인공인 바로 우리다. 황홀함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만은 우리가 소유한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황홀감을 지향한다 - P211
모든 금지된 것은 유혹이고 아름다움이다. 죽음조차도. _강민주의 노트에서 - P323
무대에서 다른 삶을 살아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 나를 떠나 전혀 다른 타인으로 변신하는 일이 이처럼 신선할 줄이야. 이건 연습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연습은 언제라도 중단할 수 있지만, 공연은 마지막 대사를 발음할 때까지 중단할 수 없다. 마치 삶처럼.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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