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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헤닝 만켈 '불안한 낙원'을 읽고-
아나, 이게 다예요.
한나 뢴스트렘은 한나 룬드마르크가 된다. 한나 룬드마르크는 세뇨르 바즈의 부인이 되고, 미망인이 된다. 펠리시아와 사창가의 여자들에게 구조를 받고 살아난다. 그녀는 가난한 여자에서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게 된다. 포르스만의 자비를 갈구했던 그녀, 베르타처럼 그의 가재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그녀였다. 왜 그녀는 이사벨을 구하고자 했는가? 이 소설의 전반부에서 그녀의 첫 남편이 죽으면서 그녀 또한 죽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긴장감이 드리워지고, 점차 그녀가 새로운 로맨스보다는 생존하기에 급급해 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후반부에 갑자기 모세스라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어떤 이유도 없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나 브랑카라고 인식한다.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사유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인류애가 뛰어난 것도 아니며 괜한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다. 혼혈인인 변호사 안드레가 아는 ‘걸리버 여행기’도 읽지 않았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그녀가 펠리시아의 뜻을 모르겠다고 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우리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때라고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때다.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때. 가난은 그녀를 쫓아내고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아프리카도 온전한 ‘낙원’이 되지는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을 껴안은 채 그녀는 불면증과 의심에 시달린다. 식민주의-개척주의는 사실 순수한 모험정신이 아니라 생존과 새로운 시장 자원의 개척을 위한, 죽음을 무릅쓴 항해의 결과였다. 그들은 전설의 섬 엘도라도를 찾을 수도 없었고 흑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공격했다. 어떤 인과론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했고 그 곳을 자신의 낙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세뇨르 바즈를 비롯한 백인 남성들이 흑인들에게 보이는 적의는, 아프리카가 온전한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함구하려 한다. 그들은 흑인을 두려워한다. 이 곳을 벗어나면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나 브랑카도 마찬가지로, 그런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다. 만약 다른 곳이었다면 그녀는 세뇨르 바즈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그리고 이곳에서만 가능하게도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녀가 아프리카 땅에서 맨 처음 배운 교훈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나 돌로레스에게서 배운 혐오를 그대로 행한다. 공격받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방어가 아닌 선제 공격이다. 하지만 아나 브랑카는 베르타를 기억한다. 그녀의 친구, 포르스만의 발치에서 집안을 치우고 엎질러진 차를 묵묵히 닦아내던 그녀를.
걸리버의 여행
아나 브랑카, 한나가 아프리카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백인과 흑인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다. 그들이 벌이는 축제는 모두 가장이며, 거짓말이다. 그들은 공격받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 평온한 전장, “흑인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백인들은 현재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 아랍인과 인도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진실이 파고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208p)” 그녀는 가장 최상위 카스트인 백인이다. 그녀가 매음굴의 창녀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스스로를 동양풍으로 꾸민다 하더라도, 그저 우스울 뿐이다. 단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모든 ‘수난’들을 겪고 난 그녀는 지극히 멜로드라마에 해당하는 감상적인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행동들을 다시 돌이켜 보면,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이나 다른 백인-흑인의 대립 구도를 그린 소설의 인물들과는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그녀의 어떤 의미있는 성찰보다는 질문이 많다.
펠리시아는 매음굴의 창녀지만 그녀의 돈을 훔치는 대신 내버려 두고, 그녀를 간호한다. 그녀가 건네준 약이 어쩌면 세뇨르 바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바즈의 자살 여부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펠리시아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아나 돌로레스와 같은 백인 여성이다. 그녀가 아나 브랑카를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흑인인 이사벨을 구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 또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은 에스메랄다도 펠리시아도, 한나의 마지막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들은 계속 매음굴에 머물고 싶어한다. 이 곳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백인들의 세상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를 죽인 것이 백인처럼 흰 촌충이라 할지라도.
라틴계의 갈색 피부를 지닌 안드레는 도둑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도둑이 되지 않는 법을 공부했다. 하지만 백인이 통치하는 세상은 그에게 매음굴에 들어갈 권한조차 내주지 않는다. 아나 브랑카는 ‘공정한 거래’를 위해 매음굴의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애당초 매음굴 자체가 ‘공정한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 피멘타가 ‘그나마 공정하다’라고 말했듯이, 공정한 것에 조금 더 가까울지언정 공정하지 않다.
바즈의 형 제는 피아노를 조율한다. 아나 브랑카가 이 불안한 낙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계시와 같은 그의 피아노 조율 때문이었다. 이곳에도 음악이 있고, 아름다운 합창이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소리를 하찮게 여기거나 비웃는다. ‘조금 이상한 사람’인 제는 카를루스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은 지극히 선량하게 보인다. 그는 어떤 날이면 아 마그리냐에게 구애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한다.
이 불안한 낙원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미쳐야 하거나 끊임없이 불안에 떨어야만 하는가? 이사벨을 구하면서 아나 브랑카가 얻고 싶어했던 건, 어쩌면 떠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 곳을 온전한 낙원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실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사벨은 살해당하고, 강인해 보였던 경비대장 설리번은 끝내 실패하며 모세스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계속 재촉한다. 매음굴의 여자들마저도 그녀를 매음굴의 주인으로 볼 뿐, 아나 브랑카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실패한 것이다.
재:출애굽
이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주 단순한 유추지만, 모세스라는 이름은 출애굽기의 모세를 연상하게 한다. 한 때 예수가 흑인이었을 수 있다는 추측들이 떠돌곤 했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직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수가 백인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백인우월주의적 가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스는 맨 처음 이사벨을 구하려 한다. 그는 이사벨에게 먹으면 나비처럼 날아갈 수 있는 가루를 주지만 실패한다. 땅굴을 파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아나 브랑카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돈을 쓰지만, 그 돈도 실패한다. 어느 누구도 이사벨을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사벨의 살해는 정당한가? 그 전에, 피멘타에 대해 살펴보자. 피멘타는 아프리카에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남았고, 기존의 가족과 똑같은 가족을 거울처럼 비추어 만들었다. 그는 불안을 보았고, 그 불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세뇨르 바즈의 신임을 얻었고, 한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인하지만 그녀를 이해한다. 그가 이사벨에게 살해당했을 때, 그는 이 불안에서 끝날 수 있었다. 이사벨은 그와 해왔던 이 모든 긴장어린 관계들을 순식간에 끊어버린 것이다. 거울을 깬 순간 피멘타는 해방되었다. 이사벨이 피멘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사벨은 백인을 죽인 흑인이 아니라, 남편을 죽인 아내로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그 가루의 효과를 보는 건 한나 뿐이다. 그녀는 매음굴이 있는 대륙을 떠난다. 그녀의 사랑을 이해해 주는 선장을 만나고, 또다른 호텔을 잡아 들어가지만 그 곳 또한 그녀가 떠나온 호텔-매음굴과 마찬가지다. 그곳은 ‘마룻바닥이 벌써 삐걱거린다’. 한나는, 아나 브랑카는 검은 아나로-모세스와 함께 이 ‘불안한 낙원’을, 거짓 낙원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 성공은, 알길이 없다. 다만 모든 식상한 로맨스 소설처럼 그들이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