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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 상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85
볼레스와프 프루스 지음, 정병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0월
평점 :
이 책의 배경은 19세기 폴란드이고 주인공은 상인 보쿨스키 그리고 귀족의 딸 이자벨라이다.보쿨스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입에 풀칠할 길이 없어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다. 그 과부가 죽고 난 뒤에 별다른 꿈도 포부도 없이 아내가 남긴 상점을 꾸려가다 어느날 우연히 귀족의 딸 이자벨라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할 방법을 미친듯이 생각한다. 천대받는 '상인'인 그가 고귀한 귀족 아가씨의 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대상인이 되는 것 뿐.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전쟁터로 떠난다. 그리고 군수사업에 뛰어들어 보통사람은 꿈도 꾸지못할 큰 돈을 벌어 귀향하는데...
단순한 사랑이야기라 하기엔 당시 몰락해가는 귀족들의 허위의식, 신흥 자본가 계급의 도약,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죽어라 고생하며 사는 폴란드 민중의 삶이 촘촘히 그려져 있어서 대하소설과 같은 느낌이 난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이자벨라를 향한 보쿨스키의 사랑이다. 그는 이제 귀족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업가가 되었지만 혼자인 순간이 오면 어떻게 이자벨라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고 그녀의 미소와 말 한마디에 온갖 의미를 부여한다. 마흔다섯에 열다섯 소년처럼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은 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만의 방식이란, 이자벨라의 아버지와 포커를 치면 일부러 져주고 이자벨라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은식기를 시장에 내놓으면 모른척 일부러 고가에 사들이고 그녀의 교양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남몰래 영어를 배우는 것 그리고 가끔 그녀의 냉당함에 그녀를 미워하게 될 때면 '나는 그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 할 거야. 내가 그 사람에게 미치지 않았다면 재산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가게 계산대 뒤에서 썩어 가고 있었을테니...'라고 정신승리하며 다시 그녀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는 것.
보통 소설속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신분상승을 이룬 남자 캐릭터는 차가운 경우가 많은데 보쿨스키는 인간적인 따뜻함을 간직한, 명석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다. 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운의 도움은 받았지만 부정한 짓은 절대 저지르지 않는다. 돈을 번 다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주저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창녀들에게는 직업교육을 제공한다. 보수적인 동네 사람들은 그가 창녀를 가까이 한다는 것만으로 온갖 입방아를 찧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이처럼 밝은 사람이 경박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 앞에 어떤 갈피도 잡지 못한 채 미친 사람처럼 번뇌하고 회의한다는 것이 소설의 포인트일 것이다.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전쟁의 위기감이 전 유럽을 위협하는 19세기 후반, 바르샤바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보쿨스키는 과연 자신의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폴란드 작가의 소설은 읽어본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작품을 통해 폴란드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구글 맵으로 바르샤바의 모습도 찾아 보았다. 독자들은 알테다. 지도로 그 곳을 찾아본다는 건 그만큼 그 문학 작품이 생생했다는 것, 사실과 관계없이 이미 내 가슴 속에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바르샤바의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다는 것. 무려 1200페이지를 통해 작가가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는 이 책이 내가 아는 세상에 양감을 더해주었단 생각이 들었다. 문학작품을 통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달까.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런 실감을 준 작품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멋진 작품.

* 인형이 폴란드에서 수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하여 구글로 찾아본 보쿨스키의 모습.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거의 일치해서 놀랍고 만족스러웠다. 강한 의지와 불안함으로 인한 신경질이 묻어나는 얼굴 그리고 비싼 고급 외투와 모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