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의 여성, 여성 속의 신화
장영란 지음 / 문예출판사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계절학기 수업으로 '그리스 신화의 이해'를 들었는데, 단순한 에피소드 나열을 떠나서 다양한 시각에서 신화를 바라보고 싶었고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가부장적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그리스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서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실 이 책을 고른건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몇장 읽을 땐 책의 '포스'가 조금 딸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쉽게 읽어 나갈수 있는 점'이 이책의 큰 장점이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점에 비한다면 만족도 100%였던 책이다.

여자인 나에게는 책 속의 주장들. 신화에 대한 재해석들이 모두 '당연'하게 보였기 때문에 술술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문체또한 쉽다.  아 그러니까 쉬우면서도 열정적이고 기존의 가부장적 신화에 대한 분노가 담긴 '생생한' 문체이다.  원래 가부장제에 대해 삐딱한 나 같은 사람은 책을 읽는 내내 '맞아 맞아 그러치 그러치 옳치' 하고 신날수 있지만 남성독자들에겐 좀 짜증날 수도 있는 그런 문체이다. 알라딘 리뷰를 쭉 ?어봤더니 역시나 남자독자분이 남긴 낮은 별점의 리뷰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이야기에서 이아손이 권력을 위해 조강지처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려고 하자 이아손이 변명을 늘어놓는 부분에서..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수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운다. 그녀는 이아손을 위해 자신의 조국을 등지고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제를 죽인 지난날의 행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제 메데이아에게 지난 세월은 너무나 후회스럽고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아손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메데이아에게 코린토스를 떠나기를 종용했다.

과거에 아르고호의 영웅이었던 이아손은 스스로 가장 비겁하고 몰염치한 남자로 전락해버렸다. 어떻게 신들에게 맹세한 약속을 깨고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새장가를 들 수 있느냐는 메데이아의 비난에 이아손은 가장 치사하고 궁색한 변명을 주섬 주섬 늘어놓는다. (변명 내용 중략. 대략 찌질한 변명들,,)

이아손 자신은 실제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자가 아닌가! (이런 !나 ?로 끝나는 문장이 많다.  '사실 어머니는 여자로서의 삶을 모두 박탈당하며 살지 않았던가? '등,,,이런 문장들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옆에서 흥분해서 말을 다다다 해주는거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오로지 여자로 인해 출세한 자이다. 그는 과거에 메데이아 덕분에 황금 양피를 구해 돌아와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또 이제 크레우사와 결혼하여 왕이 되려 하고 있다.

고대에나 현대에나 비겁한 납편들이 아내에게 늘어놓는 변명은 어쩌면 이리도 한결같이 똑같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런 부분

이 책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을 포함하여 당시의 사회상. 여성혐오의 배경(철학) 까지 다루고 있다. ( 여신. 열녀.악녀. 미녀. 어머니 살해.  가부장제 신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질료성. 성차별. 그리스의 여성 혐오증. 그리스 동성애. 여성괴물등..) 에피소드 속의 부조리한 시각을 끄집어 내어 분석하고 그러한 시각이 만연해있던 시대적 배경. 철학까지 이야기 해주니 이해가 쏙쏙 잘 될 수 밖에..

그리스 신화를 어릴 적 부터 그리 많이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가부장제 시각의 흔적을 이 책은 하나하나 집요하리만치 정확하게 캐내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요괴나 악귀는 대부분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들이 여성의 형상을 띠는 것은 이러한 의식의 주체가 남성이기 때문이라던지. 하는 이런 사소한 것. 하지만 모르고 있었던 점을 많이 알게 되어서 읽고 나서 신화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내가 가장 열심히 봤던 부분은 메데이아와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나오는 '악녀편'이었다.

대표적인 악녀로 손꼽히는 두 여인을 다루면서 저자는 그녀들이 왜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간다. 결국 그러니까 그녀들이 살인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아손.아가멤논=영웅. 그러나 여자 잘 못 만나서 안타깝게 죽은...

메데이아. 클뤼타임네스트라= 악녀

라는 고정관념. 선입견을 어릴적부터 주입받고 있었단 걸 이 책을 보고 나서 알 수 있었다.

어릴적 그리스 신화 만화를 봐도 메데이아는 마녀같이 악랄한 여자로 그려졌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어릴적부터 이야기는 객관적인 것이라 믿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러한 이야기들이 모두 가부장제 하에서 변형되고 뒤틀린 것이었다니 이제와서 속은 기분이 들었다.

신나게 다 읽고 나서 책 뒷장의 각주와 참고문헌 페이지를 보니 이것만 24페이지나 된다.

저자가  이 책에 참 정성을 많이 들였구나..싶었다. 2001년에 나온 책인데 별로 유명하지 않고 출판사도 모르는곳이라 혹 절판됐음 어떡하나 조마조마한 맘으로 검색을 해보니 다행히 아직도 판매중이다.

나에겐 완전소중책 ♡이지만 참 안타까운건 타인에게 추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책이지만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들에겐 짯응나는 책일 가능성이 80퍼센트 이상이기 때문이다^^ 

아마 책의 저자가 자기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굳이 말한건 그런 점을 의식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는. 내가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생각이야.' ---요런 의미로.

그리스 신화 공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방학이 뿌듯할 수 있게 해준 한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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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6-08-0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서 아쉽긴 하지만요..윽윽 도시에서 보내는 여름은 왠지 우울해서 빨리 가을이 되어버렸음 좋겠어요!!^^

얼룩말 2006-08-04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소중.. ㅋㅋㅋ(요즘 이 말이 무척 재밌다는 생각을 해요. 그치 않아요?)

LAYLA 2006-08-0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완전소중한 말이에요 자주 애용하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