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85
볼레스와프 프루스 지음, 정병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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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아가씨에게 ‘세상은 무엇이고, 아가씨는 누구냐?‘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아가씨는 틀림없이 세상은 마술 정원이고, 마술로 가득 차 있는 성이며, 자기는 육체에 갇힌 여신이거나 요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자벨라는 요람에서부터 초인간적일 뿐 아니라 초자연적인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았다. 잠은 오리털 이불 속에서 잤고, 비단옷과 뜨개질한 것을 입었으며, 흑단 혹은 자단 목재를 조각해서 속을 넣은 의자에 앉았으며, 크리스털 잔으로 마셨고, 식사할 때는 금만큼 비싼 은이나 자기 그릇을 썼다.
이 아가씨에게는 사계절이 없고, 항상 부드러운 햇빛,생생한 꽃들과 향기로 가득한 봄만 있다. 밤과 낮의 구별도 없어서 어떤 때는 한 달 내내 아침 8시에 잠자리에 들고, 점심은 새벽 2시에 먹는다. 지리적 차이도 없다. 왜냐하면 파리, 빈, 로마. 베를린 혹은 런던에서도 같은 사람들이고, 관습도 같고, 가재도구도 같은 것들이며 심지어 음식도 동일하다. 태평양산 해초, 북해에서 딴 굴, 대서양이나 지중해산 생선, 모든 나라에서 온 야생 고기, 전 세계에서 사 온 과일 등. 이 아가씨엑는 중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을 때는 다른 사람이 부추겨서

히고, 접시도 다른 사람이 들어서 놓아주고, 거리에서는 다른 사람이 태워 가고, 계단은 다른 사람이 부축해서 내려가고 위로 돌라갈 때는 다른 사람이 들고 간다.
휘장으로 바람을 막고, 황마차로 비를 막고, 검은담비 모피로 추위를 막고, 햇빛은 양산과 장갑으로 막았다. 이렇게 사람들 위에, 자연의 법칙 위에 매일, 매달, 매년을 살았다. 그녀는 폭풍우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알프스에서, 다른 한 번은 지중해에서. 당시 용감한 사람들도 겁에 질렸지만 이자벨라는 바위가 갈라지고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즐거운 듯 웃었다. 그것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이 아가씨에게 자연은 번개, 바위, 바다의 소용돌이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현상이다. 자연은 다른 때에는 이 아가씨에게 제네바 호수 위의 달을 보여 주고, 해를 가리고 있는 라인 강 폭포 위의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 그것은 마치 무대 연출가가 하는 작업 같은 것이다. 신경이 예민한 귀부인들도 그것을 보고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 할 거야. 내가 그 사람에게 미치지 않았다면 재산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가게 계산대 뒤에서 썩어 가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동경, 절망, 희망이 없으니 이제 슬퍼지겠지...어리석은 인생! 지상에서는 각가 가슴 속에 담고 있는 환상을 좇다가, 저세상에 가서야 그것이 미친 짓이었음을 알게 되겠지.

-마흔다섯이라...사랑을 하기엔 마지막 나이인데, 최악의 시기지.
-전문가들은 첫사랑이 최악이라고 하던데
-틀린 소리야. 첫사랑 다음에 백 가지 다른 사랑이 자네를 기다리지만, 백한 번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어. 결혼해. 그것만이 자네의 병을 치료할 수 있어.

그는 항상 행동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머리나 가슴으로 무엇을 느끼면 그것을 바로 실행했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을 때 대학에 들어갔고, 돈을 벌기로 결정했을 때 돈을 벌었잖습니까. 그래서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역시 물러서는 법 없이 아주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고 말아요.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놀랄 것 없어요. 그의 안에는 두 사람이 녹아 있어요. 1860년대 이전의 낭만주의자와 1870년대의 실증주의자. 밖에서 보는 사람에겐 모순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완벽한 일관성을 갖추고 있어요.

그들에게는 의지가 부족합니다. 의지의 병...이 병이 전체 계급에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칭호, 존경, 심지어 여자 복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겐 추진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야심 있는 사람들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보쿨스키는 사람들을 잘 안다. 그래서 자주 그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어디에서든 도처에서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점원으로 일할 때도 밤에는 잠을 안 자고 공부했고, 가난을 이기고 대학생이 되었고,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군인으로 살아남았고, 추방되었을 때에도 점토로 지은 오두막에서 눈을 맞으면서도 학문을 연구했다. 그에게는 항상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급급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아! 갈증이 심한 사람은 우물에서 물러나지 않아. 죽어야 한다면 마시면서 죽겠어.

만일 보쿨스키가 그런 여행가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10년 동안 땅속에 살면서 수백만 달러를 모은 광산가였다면! 그러나 그는 상인에 불과하다. 그것도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상인이지 않은가! 그는 영어도 모르고, 그에게는 늘 벼락부자 티가 난다. 그것도 젊은 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손님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은 기껏해야 좋은 조언자, 심지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방문객이 없을 때에 한해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면 매우 불행해질 것이고, 애인으로는....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심지어 동물들 중에도 인간들과 같은 그런 비열한 동물은 없지. 자연계에서는 서로 마음에 드는 암컷과 수컷끼리 짝을 이루게 되지. 그래서 짐승들에게는 바보가 없어.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나는 유대인이니까 기도교인을 사랑해선 안 되는 거야. 그는 상인이니까 백작 아가씨를 사랑할 권리가 없는 거야. 자네는 돈이 없으니까 여자를 가질 권리가 없는 거야. 자네들의 그 잘난 문명이라는 것이 그런 거라네...!

-성격이라고요? 그는 사랑에 빠질 사람이 아닌데.
- 그 성격 때문에 그가 파멸하는 거요. 10만 킬로그램의 눈 덩어리도 가볍고 엷은 눈송이로 나뉘어 떨어지면 가장 작고 연약한 풀조차 상하게 하지 않지요. 그러나 눈사태로 내려오는 10만 킬로그램의 눈은 가옥을 파괴하고 사람들까지 희생시킵니다. 만일 보쿨스키가 일생 동안 일주일 단위로 다른 여인들을 사랑한다면, 그는 꽃봉오리처럼 보일 것이고, 생각도 자유로워질 것이고,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수전노처럼 사랑의 자본을 모았는데, 그 결과는 우리가 보다시피 어떻습니까? 사랑은 나비와 같은 매력을 가질 때 아름다운데, 오랫동안 가사 상태에 있다가 깨어나면 호랑이처럼 되어, 보는 사람도 재미가 없지요. 입맛이 좋은 사람과 배가 고파서 속이 뒤틀린 사람은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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