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이 너를 붙잡지 못해도
서영은 지음 / 해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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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다음에 커서 바람둥이 깡패한테 시집가면 좋겠다.
좀 더 일찍 태어나 기생이 되었더라면 좋을 텐데.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사랑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위험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나는...나밖에 모르는 남자에겐 관심이 없다. 사랑을 나눈 대상들이 열 명쯤, 또는 그보다 더 많아도 좋다. 그런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선택된 여자이고 싶다. 나의 사랑을 얻으려는 남자는 그런 모험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졌든, 수도승이든, 아편에 미쳤든, 노름에 미쳤든,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치르는 대가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내 동년배 청년들이 보여주는 관심이 내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사랑을 위해 무릅써야 할 위험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펼쳐져 있는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연인을 끌어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쉬운 것일 리가...? 타넘을 담도 없고, 피해야 할 눈도 없고, 버려야 할 값진 것도 없고, 대적해야 할 적들도 없이, 어떻게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단지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 나이의 꽃다움을 스스로 져버렸고, 동년배 남자들의 눈부신 젊음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은 아무렇게나 뚤뚤 말아논 침구에 비스듬히 기댄 채 나를 맞이했다. 허름하고 우중충한 바지에 윗도리는 속내의 바람인, 다소 우스꽝스런 차림인데도, 군주와 같은 당당한 위엄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 위엄은 단순히 가부장적인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실제로 큰 영지를 지니고, 휘하에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듯한 힘으로 느껴졌다.

결국 나는 어린시절부터 자기 내면의 이 신비로운 넘침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기생이 되고 싶다든가, 깡패한테 시집가겠든가 하는 철부지한 생각 속에 이미 파란 많은 운명의 불씨가 묻히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열여섯 살 소녀가 삼십대 중반의 중국인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인데, 그 책의 화보에는 작가 자신의 열여섯 살 때 사진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 사진의 소녀야말로 순결하고 청순한 용모이면서도 인생에 대한 선험적 감성을 타고난 듯, 성숙한 여인의 우아하고도 요염한 자태가 흘러, 백만장자인 중국인 남자의 영혼을 한순간에 뒤흔들어놓을 만했다.

나는 방금 내 품으로 넘어온 고양이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의 강보를 여러 겹 느끼게 한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모든 여자들이 아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를 했어도 끝내 아내로서 거듭나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을 수 있다.

오, 저주받은 종족, 여성들, 너무 깊이 사는 자들에게 안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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