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 머신건스
미나미 나쓰 지음, 전새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너는 벌레이고 나는 성자라고 생각해야 이겨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나는 너희처럼 하찮고 시시하고 천박하지 않으니 이 따위 치욕따위야 얼마든 감내하겠다는 오기가 삶을 지탱해주는 순간들. 하지만 나 역시 하나의 벌레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 순간이 나머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것 같다. 누구는 좌절하고 누구는 냉소하고 누구는 그나마 나은 벌레가 되겠다고 기를 쓴다. 아주 극소수만이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른이 된다.(고 한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내 주변의 벌레들까지 사랑하는 벌레가 되고 싶었다. 일을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입사초기의 거창한 다짐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입사한 지 만 일년이 지난 요즘도 그 약속을 지켜보고자 미움이 차오르면(이라고 고상하게 쓰고 조낸 뽝치면 이라고 읽는다) 화를 쏟아내기보다는 조용히 이너피스를 외치며 별모양 포스트잇을 떼내어 모니터에 하나씩 붙인다. 손은 떨리고 호흡은 불규칙하다. 착한 벌레로 살겠다는 다짐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하다. 미움을 겨우 참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천사표 벌레로 살지 못할 거라면 눈치 빠른 벌레로 포지셔닝하여 편하게 살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영리하지도 못했다. 머리론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사에겐 아부를/남자사수에겐 애교를/동기에겐 가식을 그 3박자를 맞출수가 없었다. 박치인 주제에 오직 실력으로만 인정받겠다면 100점 만점에140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또 그렇게 일할 정도로 체력이나 야심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괜히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면서 별로 잘난것도 없는 주제에 나와 같은 벌레들을 미워하게 되는 내가 미웠다. 나는 왜 내가 벌레인걸 알면서도 왜 벌레처럼 살지 못하는걸까?


15세 최연소 문예상 수상작이 어떤건가 싶어 아무 기대없이 집어든 이 책을 보니 답은 간단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찌질하고 볼썽사나운 벌레인지 진지하게 바라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벌레스러움에 대해 통달한 냥 굴고 있었던 것이다. '어둑해진 저녁에 형광등을 켰을 때 드러나는 어질러진 살림살이의 거뭇거뭇한 때와 카펫의 얼룩들'(76p)같은 벌레스러움을 직시한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의 벌레다움에 대해 분노하고 이럴 순 없다고 끝까지 부정하고 난리 부르쓰를 춘 다음에서야 삶의 방향을 정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인데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너무도 순순히 내가 벌레인게 당연하다며 수긍해버렸다. 성찰없이 무작정 천사표 벌레가 되겠다 하였더니 이렇게 몸과 마음과 머리가 지 멋대로 노는 사태가 도래한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온적이 없으면서 알을 깨고 나왔다고 믿었다.


15살 소녀가 만들어 낸 14살 주인공이 자신의 벌레스러움을 깨닫고 단박에 어른이 되는 모습은 캬, 소리가 나올 만큼 경쾌하고 멋있다. 지난 몇 달간 내 마음을 그리 고생시키던 문제의 원인을 한 번에 짚어주니 내 속이 다 후련하다. 이것이 문학의 힘인가 보다. 심리학 서적이나 실용서 수십권으로도 못할 일을 백여쪽의 소설 하나가 해내었다. 애기가 쓴 소설이라 어느 정도는 허세일거라고 얕봤던거 미안해진다. '누구든 연습으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는 평가가 영 과장은 아닌듯하다. 십대에 하고 넘어왔어야 할 자기탐구라는 숙제를 열심히 해나가야겠단 생각이 든다. 이십대에는 부디 마칠 수 있기를 바라며.


* 책은 좋았는데 93쪽짜리 중편을 꼭 양장 단행본으로 내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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