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 내 인생 - 이 시대 최고 명사 30人과 함께 하는 한 끼 식사
신정선 지음 / 예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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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냉면 맛을 알기 어렵듯이, 이십대가 그런 사랑을 이해하기 어렵겠지. 맛을 아는 사람이 최고로 꼽는 맛이 있듯이, 살아본 사람 눈에 보이는 감정의 물결이 있는 법이니까.

-이순재, 비빔냉면-22쪽

최근에 문 연 이태원 식당 '더 믹스드 원' 메뉴 짤 때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요. 미친 거죠. 입에서 냄새 나죠, 몸에서도 땀내 풍기죠. 하지만 완성됐을 때의 성취감! 제가 저를 쓰다듬으면서 "아, 역시 또 한 건 했다. 야, 에드, 잘했다." 하는 거죠. 속된 말로 '자뻑'인데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자뻑이 있어야 해요. 후배들한테도 꼭 이야기해줘요. 네 음식에 네가 감탄하지 못하면 남들이 감탄 해주지 않는다고요. 내가 뭔가 하나 해냈구나, 라는 그 순간의 느낌 때문에 미친 듯이 일할 수 있는 거죠.

-에드워드 권-46쪽

주로 일했던 게 일식당이었어요. 스물여덟 살쯤이었는데, 어떤 스시집에서 일하다가 또 일하기가 싫은 거예요. 일도 너무 많고 엄했어요. 그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아르바이트란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한번 취직하면 거기서 평생을 보내는 거죠. 장어구이 집에 취직하면, 쌀 씻는 것만도 2년을 해요. 장어 만지려면 7년이 걸리고, 장어 구우려면 10년은 걸렸죠. 그런 곳에서 한두 달 일하고 그만두겠다고 말한다는 건 도무지 인간으로 취급해주기가 힘든 수준이었죠. 하지만 저는 허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만두려고 했어요.
... 밤늦게 영업이 다 끝나고 나서려는데 사장이 "팁통을 열어라"그러시는 거예요. 전부 놀랐어요. 팁을 모아두는 그 통은 매월 말에야 열어서 나눠 갖는 거였거든요. 그런데도 사장은 팁통을 열더니 정확하게 사람수대로 나눈 몫만큼 저에게 줬어요. 주위 직원들 반응이야 설명드릴 필요 없겠죠. 어색하게 돈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나왔죠. 30미터쯤 갔을까, 사장이 나오더니 절 불러요. 잠깐 와보라고 하는데 속으로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했구나'했어요.-55쪽

어쨌든 다시 들어갔죠. 몇 대 맞는 것쯤 겁 안 나던 나이였으니까요.
사장이 들어온 저를 보고 스시 카운터에 앉으라더니 "너 우리 집 초밥 먹어본 적 없지?" 묻더라고요. 사실 전 그때까지 초밥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가게에 남는 거야 물론 있었지만 괜한 자존심에 먹기가 싫더라고요. 사장이 "오늘 네 생일이니까 초밥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한 점씩 만들어서 카운터에 올렸어요. 그냥 올리는 게 아니고 하나씩 올릴 때마다 "농어!" "장어!" "도미!' 하는 식으로 엄숙하고 힘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면서요. 허투루 만든 게 아니고 사장이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뜻인 거죠. 아,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진짜 상상도 못할 맛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음식이 있지' 하면서 정신없이 입으로 집어넣었어요.-56쪽

다 먹고 나니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했더니 사장이 그랬어요. "나는 못난 집에서 자랐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지만, 사람 볼 줄은 안다. 너는 언젠가는 꼭 세상에서 제일 비싼 초밥을 먹을 사람이다. 나쁜 마음먹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김대우-57쪽

...그러면서 차츰차츰 친해진 거야.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김 시인이 치질에 걸렸어.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 돈이 없으니까 치료를 제대로 받기 어려웠어. 내 용돈을 치료비로 썼지. 그걸로도 모자라서 우리 집 다락에 있던 피륙을 한 필 두 필 몰래 빼다 팔아서 보탰어. 그러다 우리 아버지한테 들켰잖아. 난리가 났지. 절대로 만나면 안된다고 강제로 떼놓는 바람에 몇 달 동안 못 만난 거야. 그동안에 김 시인은 몸이 어지간히 회복돼서 서울대학교 부속 간호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했어. 우리 집에 몇 번 찾아왔지만, 아버지가 문전박대했다.
어느 날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익숙한 손이 내 팔뚝을 붙잡아. 첫마디가 아, 아직도 생생해 "마이 소울 이즈 다크" 그 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콱 쏟아지대. 그날부터 집에 안들어갔어. 결국 시어머니가 방을 하나 얻어주셨지. 그게 1949년. 살림을 시작한 거지. 아버지 몰래 내 물건을 하나씩 살살 옮겨왔어. 오늘은 옷가지, 내일은 책, 하는 식으로. 어머니가 명주 이불 해주시고 시어머니가 금반지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됐어. -96쪽

시 한편에 300원 하던 시절이었지. 내가 양계하고 바느질감 얻어서 한 달 생활비 2600원을 벌었어.

지금도 김 시인의 작품을 꺼내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받아. 시는 그림 같고, 산문은 조각 같아.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역시 최고다, 싶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어.

-김현경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97쪽

음식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게 과하게 익히는 거예요. 차라리 덜 익은게 맛있어요. 덜 구우면 물이 약간 배어 있어서 보드랍잖아요. 그런데 과하게 익히면 뻣뻣해지죠. 연출자도 요리사와 같아요. 재료, 즉 배우나 대본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하고, 재료가 지나치게 익지 않도록 잘 조절해야 하죠. 사람이 지나치게 성공해서 어느 수준을 넘어가 버리면 음식과 마찬가지로 질겨져요. 원재료 안에 있던 수분기가 없어지면 음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매력이 없어지더라고요. 배우에게는 순수함과 인간적인 매력과 풋풋한 연기가 원래의 수분이겠죠. 그걸 잘 지키도록 요리사인 연출자가 도와주는 거고요.

- 이지나-156쪽

"내가 업어서라도 통학시켜주마. 그 학교 가라.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필요한 돈인데 어떻게든 못 구해주겠냐"라고 했겠죠. 저희 어머니는 딱 한마디 하셨어요. "버스비 없다." 결국 저는 집에서 가까운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됐죠. 1등으로 입학하게 돼서 입학식 때 선배들 환영사에 답사를 맡게 됐어요.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입학식 전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멀건 죽을 저녁으로 먹었어요. 두 살 아래 동생도 배고프다고 투정부리다가 같이 잠들었죠. 다음 날 일어나서 세수하고 방에 들어왔더니 밥상 위에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인절미가 세 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무런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이게 웬 떡이야" 했죠. 바로 그때 ‘떡’이라는 소리에 자던 동생이 번쩍 눈을 뜨더니 순식간에 하나를 집었어요. 그런데 동생만큼이나 빨랐던 게 어머니였죠. 동생이 떡을 집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손등을 야멸치게 내려치신 거예요. 원래 때리는 분이 아니셨거든요. 그런 어머니한테 한 대 맞은 동생은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 멍해졌죠.
-164쪽

어머니는 "형이 1등으로 들어가서 오늘 답사해야 되니까 이걸 먹고 가야 해. 배가 고프면 말이 나오겠니" 하셨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울먹이시는 거예요. 저는 떡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허둥지둥 방을 나섰어요.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는데 그날은 가도 가도 학교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어요. 눈물 젖은 어머니 모습도 떠오르고 철없는 동생도 생각났지요.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 쌀이 점점 떨어지고 먹을 게 없다고만 생각했지, 생계나 생존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어요. 하지만 그날, 인절미 하나를 먹고 학교 가던 날, 아, 이제는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하는 선명한 자각이 저를 두드렸어요.
어머니가 준비한 인절미,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걸 구하셨을까 싶게 작고 볼품없었어요.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됐을까. 차지고 쫄깃하지도 않았고 약간 꾸덕한 채로 콩고물을 살짝 덮고 있었죠. 그 인절미가 저를 소년에서 청년으로 만든 거지요. 열세 살 소년으로 집을 나섰던 저는 열세 살 청년이 돼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64 쪽

지금이야 아파트에 많이 사니까 층별로 다니면서 신문 돌리면 속도가 꽤 나지요. 하지만 그때는 걸어 다니기도 힘든 단독주택이었어요. 비가 오면 특히 난감했어요. 지금처럼 신문을 비닐로 싸는 기계도 없었고, 초인종을 눌러서 반드시 사람에게 전달해야 했죠. 비오는 새벽에 사람을 깨워 나오게 하려면 시간은 오죽 걸렸겠으며 마음은 좀 초조했겠어요. 개 있는 집도 얼마나 골치가 아프던지요. 대문 너머로 던져 넣은 신문을 개가 물어뜯기도 하니까요. 학교에 가면 보급소에서 연락이 와요. 어느 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으니 다시 갖다 주라고요. 모든 정보가 신문에서만 나오던 때이니 하루 배달이 안 되면 정말로 큰일이었죠.
고생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 위에 놓여있던 인절미가 생각났어요. 다시는 울면서 인절미를 먹지 말자, 엄마를 울게 하지 말자, 동생을 배고프게 하지 말자. 그때의 결심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약속에 철저해진 바탕이 거기서 온 거죠. 개가 있는 집은 철저하게 표시를 해뒀다가 대문 옆에 끼워둔다든지 따로 꾀를 썼거든요. 약속을 못 지키면 불편한 건 나다, 아무리 불편한 약속도 일단 했으면 지켜야 한다. -배한성-167쪽

건축은 삶을 짓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그랬던가요. 우리는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거주는 건축을 통해서 이뤄진다고요. 건축이라는 건 삶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삶이 스며든 건축에는 기억도 깃들겠고요. -252쪽

건축하는 후배들은 물론이고, 요리사, 화가 등 창조하는 고통을 선택한 젊은이들에게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얘기를 해주고 싶네요. 브랑쿠시는 무척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 고향을 떠나서 천신만고 끝에 파리에 갔지요. 간신히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아틀리에를 얻었는데, 거기 들어간 첫날, 벽에 선언하듯 써 붙인 글귀가 압권입니다.
"너는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아, 이 말 너무너무 근사하지 않습니까. 제 가슴에 선연한 빛줄기처럼 와서 꽂힌 말입니다. 자신의 창조적 재능에 관해서 믿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존감을 잃지 말고 왕처럼 절대 굴하지 말라는 것이며, 작업을 할 때는 노예처럼 성실하게 하라는 것이죠.
일단 자기 재능을 믿어야 합니다. 재능이 있다는 걸 믿어야 신처럼 창조도 하게 되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일 겁니다. 저는 건축이 우리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건축을 통해서 삶을 바꿀 수 있고, 나아가 삶을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처럼 위대한 직능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가요. 그렇게 믿으니 이 일 자체가 저의 의지를 북돋워주고, -259쪽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단단히 서게 하는 거죠.

-승효상-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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