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품절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한 적이 없다. ....물론 소설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아는 체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나는 어쩌면 시대가 도치된 자서전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지금 허구 속에 들여놓은 집들 중의 어느 하나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찰스는 변장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28쪽

-만나뵙게 돼서 기쁩니다, 부인, 참으로 멋진 집이군요
-나한테는 너무 크지요. 이 나이가 되도록 이 집을 지키고 있는 건 다 남편을 위해서랍니다. 그이가 그걸 원했으니까요.
풀트니 부인의 시선은 찰스를 지나 남편 프레더릭의 초상화에 가서 멎었다. 1851년에 세상을 떠나기 꼭 2년 전에 그려진 초상화에는, 그가 현명한 기독교인이고 위엄있고 잘생긴 남자-무엇보다 대다수 남자보다 뛰어난 남자-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확실히 그는 기독교 신자였고,극도로 위엄을 차리는 인물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나머지는 화가가 상상해서 그려 넣은 것이다. 고인이 된 지 벌써 16년이 지난 풀트니 씨는 대단한 부자이긴 했지만, 보잘것없는 위인이었다. 그가 인생에서 진실로 뜻 있는 일을 한 게 있다면, 그것은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난 일이었다. -137쪽

그녀가 갑자기 뒤쪽에 있는 숲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그는 말을 끊었다. 찰스보다 예민한 그녀의 청각은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도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모아 쥐더니, 동쪽으로 50미터쯤 떨어진 풀밭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잔디 위로 약간 높게 뻗어 오른 가시금작 덤불 뒤로 사라졌다. 찰스는 공범자처럼 어쩔 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좀 더 기다렸다. 그들이 가버린 것을확인한 다음, 그제야 가시덤불을 빙 둘러 돌아갔다. 사라는 덤불 밑에 얼굴을 돌린 채 웅크려 앉아 있었다.
"가버렸소. 밀렵꾼들인가 보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가시금작화는 활짝 피어 있었고, 샛노란 꽃봉오리들이 촘촘하게 매달려 있어서, 초록빛 나뭇잎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기는 그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가 말했다.
"체면을 염려하는 신사라면 라임의 스칼렛 우먼(주홍빛 여자. 창녀라는 뜻)과함께 있는 모습을 들켜선 안 돼죠"
이것도 역시 하나의 단계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적인 신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뒤통수에 미소를 보냈다.
"아가씨한테서 주홍빛을 볼 수 있는 곳은 두 뺨뿐인 것 같은데요"-161쪽

찰스는 창밖으로 목을 길게 빼고, 소금기가 배어 있는 공기를 맡았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네레이데스들이 드나드는 이동식 탈의실의 검은 윤곽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날 밤 깊은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파도가 자갈으 굴리며 속삭이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어디에선가, 잔잔한 바다 위를 날며 보금자리를 찾는 갈매기들의 목쉰 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 램프가 켜진 방 한구석에서 의사가 딸그락 거리며 약을 조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스는 두 세계- 등 뒤에 있는 따뜻하고 잘 정돈된 문명의 세계와, 눈 앞에 있는 차갑고 어두운 신비의 세계-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우리는 누구나 시를 쓴다. 시인은 다만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쓸 뿐이다. -198쪽

아내보다 못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아내보다 잘난 여자들이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남자도 있다. -296쪽

남자의 허영심은 여자에게 복종받는 데 있었고, 여자의 허영심은 궁극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 복종하는 데 있었다. -344쪽

찰스는 맞은편 보도에 서서, 그 건물을 영원히 없애 버리고 싶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물론 그의 이 같은 거부감 속에는 비열한 면-조상들의 판단과 그 영향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단순한 속물근성- 도 있었다. 그러한 거부감 속에는 게으름-노동에 대한, 판에 박힌 일상에 대한,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데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한 거부감 속에는 비겁한 면도 있었다. 여러분도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찰스는 다른 사람, 특히 자기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 건너편 창문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 출입문을 토?드나드는 사람들-이들과 관꼐를 맺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그를 구역질 나게 했다.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거부감 속에도 한 가지 고상한 요소가 있었다. 돈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는 다윈이나 디킨스 같은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 고작해야 딜레랑트, 한량, 무위도식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속에는 야릇하고 덧없는 자존심도 섞여 있었다. 쓸모 없는 존재-가시 말고는 암것도 가진게 없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신사의 수많은 결점을 보충해 주는 유일한 장점, 즉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유라는 생각은 그에게 너무도 분명히 다가왔다. 저 가게에 한 발짝만 들여놓으면, 나는 끝이야.-384쪽

그래, 내가 창녀면 어때요? 사회가 무슨 권리로 나를 욕할 수 있죠? 도대체 사회가 나한테 무슨 혜택을 주었단 말인가요? 그래, 내가 사회에서 소름 끼치는 암적존재라면, 그 병의 원인은 썩은 시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사회의 불행한 사생아가 아닌가요? 예, 잘난 선생님?
- 더 타임스 에 실린 독자의 편지에서 1858.2.24-389쪽

태어날 때부터 노섬벌랜드의 넓은 토지를 주머니에 넣고 나온 토머스 버그 경은, 역사의 흐름조차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바위임을 입증해 보인 사내였다. 그는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추구해 온 일을 집안 전통에 따라 계속 추구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란 바로 사냥과 술과 오입질이었다. .....그를 클럽에서 제명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광산에서 나오는 석탄을 클럽에 공급하고 있었고, 그것은 선물이나 다름없을 만큼 염가였기 때문에, 언제나 그를 옹호하는 쪽이 우세하곤 했다. 게다가 그의 새오할 방식에는 어딘가 솔직한 데가 있었다. 그는 수치심도 없이 악덕을 저질렀지만, 위선을 부리는 일도 없었다. 그는 남의 실수에 관대한 편이었다. 클럽의 젊은 멤버 가운데 절반은 적어도 한두 번은 그에게 빚을 진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신사답게 상환기일을 무기한 연장해 주었고, 이자도 받지 않았다. ....탁한 푸른색을 띤 그의 눈동자는 당당한 천진난만함, 악마처럼 타락한 인간의 불경스러운 솔직함을 담고 있었다.-390쪽

아아, 그 입술은 벌써 다른 사람들의 입술을 맞췄고, 그 가슴은 나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을 껴안았구나
-매튜 아널드 <이별> 1853-404쪽

"그 점도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찰스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저도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얘기할 때 쓰는 알쏭달쏭하고 위선적인 겉치레 말은 잔뜩 알고 있으니까요. 여자들은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처럼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고, 남자들이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집어 보고 물건을 고르듯 여자를 고르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남자들은 이 여자나 저 여자가 내 마음에 든다고 지목하지요.여자들이 이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그 여자들을 점잖고 존경할 만하고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물건들 중에 하나가 건방지게도 자š燒?변호하고 나서면..."
"짐작건대 그 여자는 아마 더 했을 걸?"
찰스는 의사의 심한 질책에서 슬쩍 비켜섰다
"그 여자는 상류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상류 사회에서는 결혼 서약을 어긴 여자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대부분 용서받습니다. 반면에 그 여자는 주소를 보냈을 뿐인데도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더구나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저한테 훨씬 많습니다. 저는 그 여자를 찾아가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자유도 갖고 있었으니까요"-515쪽

작가는 서로 충돌하는 두 욕망을 링 위에 올려놓고, 그 싸움을 묘사한다. 그러나 승부는 사실 작가가 편드는 쪽이 이기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가 승부를 결정하면서 보여주는 솜씨(바꿔 말하면, 승부는 미리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고 독자들을 설득하는 솜씨)와, 작가가 편드는 욕망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보고 작가를 평가한다. 괜찮은 작가, 한심한 작가, 못된 작가, 웃기는 작가...등등-527쪽

그에게 가장 큰 적은 권태였다. 그리고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자기는 파리에 오고 싶지도 않았고 , 그렇다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아니면 유럽의 어디 다른 곳으로 다시 떠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를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도 권태였다. -555쪽

"여긴 어떻게 오셨나요 스미스선 씨?"
주소를 보낸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찾아온 것이 전혀 달갑지 않다는 투였다. 그는 그녀의 질문이 언젠가 언더클리프에서 뜻밖에 마주쳤을 때 그가 던졌던 질문과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이 이상하게도 서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는 그가 사정하는 입장이었고, 그녀는 마지못해 들어주는 입장이었다.-574쪽

견딜 수 없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를 가난에서 구해 주려고, 이 야릇한 집구석의 야릇한 처지에서 구해 주려고 여기 왔다. 완전 무장을 갖추고, 못된 용을 찔러 죽일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할 그녀가 규칙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그녀는 사슬에 묶여 있지도 않았고, 흐느껴 울지도 않았고, 손바닥을 비비며 제발 구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장무도회가 열리는 줄 알고 괴상한 옷차림으로 만찬 파티에 나타난 사람 같았다. -577쪽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도안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어서, 격식을 차리는 그의 딱딱한 태도를 저주했다. 그 체면 차리기야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로운 낮과 외로운 밤들, 눈만 뜨면, 아니 꿈속에서조차 사방에서 그녀의 영혼을 느껴야 했던 그 숱한 나날들......그리고 느닷없이 흐르곤 하던 눈물을 털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었다.-578쪽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그녀보다 뛰어난 점을 알았다. 그것은 타고난 신분도 아니고, 교육 정도도 아니며, 지성도 아니고, 남녀 간의 차이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능력이었고, 이것은 한편으로는 타협에 대한 무능력이기도 했다. 반면에 그녀는 소유하기 위해서만 베풀 수 있을 뿐이었다. -603쪽

신비로운 법칙과 신비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강물은 황량한 강둑을 지나 흘러간다. 그리고 또 다른 황량한 강둑을 따라서 찰스는 자신의 시체가 실린, 눈에 보이지 않는 상여를 뒤따라가는 사람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임박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드디어 자신에게서 믿음 한 조각, 그 위에 자기 존재를 세울 수 있는 진정한 고유성을 찾아냈기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비통하게 그것을 부인하려 하지만, 그리고 그의 눈에는 그 부인을 지지하는 눈물까지 고여있지만, 그리고 사라가 어떤 면에서는 스핑크스 역할을 맡기에 유리한 점을 많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은 결코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도 아니고, 따라서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패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인생은 하나의 얼굴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주사위를 한 번 던져 내기에 졌다고 해서 포기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도시의 냉혹한 심장부로 구제할 길 없이 끌려 들어간 인생이 아무리 부적합하고 공허하며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견뎌 내야 한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친 바다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 놓는 고독한 바다로 다시금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606쪽

......앤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리어트 씨, 제가 생각하는 좋은 친구는 똑똑하고 박식한, 그러니까 화제가 풍부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좋은 친구라고요."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겁니다."

그가 점잖게 말했다.

"그건 좋은 친구가 아니라 최상의 친구지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예의범절만 갖추면 누구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교육은 그렇게 훌륭할 필요도 없습니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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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2007-06-1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음. 김영하씨 에세이집에서 링크를 따라 왔는데, 역시 한권의 책은 여러권의 책을 낳는 모양이에요 : )

LAYLA 2007-06-1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해요 ^^ 내이름은 빨강. 읽고 싶어서 중도 예약하려고 보면 언제나 예약초과에요 잉잉 ^^ 김영하씨가 책 소개하는 에세이집 내면 좋을거 같은데 말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