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여행은 나를 놓아두는 일이다. 일상의 틀에 스스로 가둬둔 빗장을 열고 어디에도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최소한의 무게로 가볍게 떠나는 것. 누군가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자연에, 바람에 나를 맡기고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게 하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걷고 생각하고 보고 느끼기만 하는 것. 바람을 따라 길을 걷다가 잠시 '무인카페'에 앉아 마시는 차 한 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 그게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 내게 허락한 만큼의 시간 동안 풍경을 눈에 담고 느끼며, 그 여행지만이 품고 있는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와 하나 되는 것. 그런 게 내가 생각하는 여행이다.
제주의 바람을 맞고 돌아왔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 바람, 갈대, 파도, 그리고 노랑과 초록이 어우러진 감귤 밭과 옹기종기 둘러앉은 검은 돌담. 그 사이사이로 해안과 숲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길들. 어느 하나 눈길이 머물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내 발목을 잡았던 곳 중 하나는 김영갑 선생 갤러리 ‘두모악’이다.
‘절망의 끝에 서니까 제주를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제주도 토박이 마음을 볼 수 있었다’던 선생이 병 깊은 몸으로 폐교의 운동장에 손수 만든 ‘삼다’의 정원, 그리고 작품 속의 쓸쓸하고 고독한 선생의 모습이 그가 혼신으로 남긴 작품들 사이에서 나고 드는 이들의 눈길을 잡는다. 길고 고독하고 치열하게 살다가 이제는 제주의 바람이 된 선생이 그의 정원 돌담 사이를 혼으로 걷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