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이야기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습작생으로서 소설을 구상하다 보면 언제나 괴롭히는 문제들이 ‘주제’, ‘사건’, ‘인물’, ‘시점’, ‘갈등’, ‘구성방식’ 등의 일련의 소설의 규칙들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소설적 문법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할 것이나, 지나치게 그 규칙에 얽매여 허우적이다 정작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해 보기도 전에 지레 절망해 버리곤 한다.
소설은 반드시 규칙에 맞게 쓰여야 할까?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만이 소설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으로 뒤척이다 보면 이미 구상했던 것들조차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이는 그저 쓰라고 한다. 무조건 쓰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정말 쓰고, 쓰고, 또 쓰다보면 짙은 안개 속에서라도 뭔가 보이긴 할까? 의구심을 가라앉히려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뒤적이다 체홉의 글을 만났다. 이것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번쩍 든다.
체홉은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다만 작가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재판관이 아니라 편견 없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고 글을 쓰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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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쓰레기 같은 남녀로 넘쳐난다.”는 것은 완전히 옳은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문학의 임무가 오물 더미에서 깨끗한 알곡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문학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문학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인생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진실, 무조건적이고 정직한 진실에 있습니다. 작가는 사탕 제조업자가 아니고 화장품 상인도 아니며 흥행업자도 아닙니다. 작가는 의무와 양심을 실현해야 한다는 제약 조건에 묶여 있습니다. 화학자가 보기에는 지구상에 있는 어떤 것도 더럽지 않습니다. 작가는 화학자만큼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작가가 신, 비관주의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할 일은 신과 비관주의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한 사람이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했는지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자신이 그려 내는 인물과 그들의 대화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저 편견 없는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지성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만, 당신은 두 가지 문제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그 문제를 정확히 말하는 것. 예술가의 임무는 오직 후자입니다.
당신은 내가 주장하는 객관성이 선악에 대한 무관심이며 이념과 이상에 대한 결핍 등등이라는 이유로 나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 도둑을 묘사할 때, 당신은 내가 “말을 품치는 것은 범죄이다.”라고 말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에 대한 판단은 재판관에게 맡깁시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씁니다. 당신은 말 도둑들과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지가 아니라 잘 먹고 사는 사람들이며, 특별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말을 훔치는 일은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열정이라고 말해 두지요. 물론 예술과 설교를 결합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기법상의 제약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아시다시피 말도둑들을 700행에 걸쳐 묘사하려면 줄곧 그들의 말투로 생각하고 그들의 기분대로 느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단편소설에서 요구되는 만큼 함축적인 작품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작품을 쓸 때, 이야기에 빠진 주관적 요소는 전적으로 독자가 채워 넣기를 기대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작가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와 사기꾼뿐입니다. 어리석으면 어리석을수록 자신의 안목이 더 넓다고 생각합니다. 한 예술가가 자신이 바라보는 것 가운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면, 그 자체가 사고의 명확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큰 진전을 의미합니다.
*안톤 체홉의 서신 중에서